남자가 만년필을 써야 하는 이유

만년필은 비싸다. 불편하다. 그런데도 쓰고 싶다. 이유는 단 하나. 멋지기 때문이다.



만년필, ‘The Peace Pen’

1945년 5월 7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달았다. 독일군의 항복이 공식화되던 그날,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 아래 ‘파카51’ 만년필로 독일군과 연합군은 독일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서명 직후 아이젠하워 장군은 서명에 사용된 두 자루의 파카51로 ‘V’ 자를 만들어 보였고, 이 사진은 전 세계에 대서특필된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 승선한 어깨에 별을 단 수십 명의 남자는 무기 대신 만년필을 들고 서 있었다. 일본군의 공식적인 항복 선언문 서명에 쓰인 펜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맥아더 장군의 빨간색 만년필, 파카 ‘듀오폴드’였다.

이전에도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을 끝낸 파리강화조약 때는 파카 ‘조인트리스’가 사용됐고, 1905년 러일전쟁을 끝낸 포츠머스조약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베르사이유조약 때는 워터맨 만년필이 사용됐다. 이처럼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만년필이 등장해 대미를 장식했다. 


남자를 상징하는 액세서리

남자가 만년필에 빠지는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멋지기 때문이다. 시계를 제외하면 별다른 액세서리가 거의 없는 남자의 패션에서 만년필은 은근히 품격을 드러낼 수 있는 아이템이다. 특히 사업가나 고위직군에 있는 남자가 서명할 때 사용하는 만년필은 품격은 물론 재력, 센스를 티 나지 않게 과시하는 용도로 적합하다. ‘The Peace Pen’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만년필은 남자의 지위와 품격을 상징한다. 여기에 더해 잘 관리한 만년필은 사용자의 필기 습관에 맞춰 길들여지기 때문에 온전히 ‘나만을 위한’ 아이템이 된다는 것도 남자의 만년필 소유욕을 자극한다. 



만년필의 구조

캡 Cap / 뚜껑
잉크가 마르는 것을 방지한다. 당겨서 빼는 슬립온 방식과 돌려서 빼는 나사식이 있다.

닙 Nib / 펜촉
잉크를 내보내는 역할.
팁(Tip) 펜촉 끝의 뭉툭한 부분. 팁의 크기에 따라 선의 굵기가 결정된다.
슬릿(Slit) 펜촉 중간의 갈라진 부분. 슬릿을 통해 잉크가 팁까지 전달된다.

배럴 Barrel / 몸통
보디(body)라고도 하며, 안쪽에 잉크통이 들어 있다.

컨버터 Converter / 잉크통
컨버터/카트리지 방식과 피스톤 필러 방식이 있다. 사진은 컨버터/카트리지 방식으로 대부분 만년필이 채용한다. 간편하지만 잉크 저장량은 적다. 피스톤 필러 방식은 몽블랑, 펠리칸 등 고가 라인에 적용되며, 잉크 저장량은 많지만 수리하기가 어렵다.


닙(Nib)을 알면 만년필이 보인다


만년필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펜촉(nip)이다. 재질에 따라 경성과 연성으로 나누며, 이에 따라 필기감이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펜촉의 굵기. EF<F<M<B<BB 순서로 굵다. EF(Extra Fine)가 가장 가는 펜촉으로, 사각거리는 느낌이 나며 획이 많은 한글, 한자 필기용으로 적합하다. F(Fine)는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굵기다. 알파벳을 쓸 때 표준이 되는 사이즈. M(Medium)은 중간 굵기로 부드러운 필기감이 특징이다. 필기용보다는 서명용으로 많이 사용한다. B(Broad)는 필획이 굵으며 본격적인 서명용 펜이다. B보다 굵은 획은 BB, BBB, OBB 등으로 표현하며 캘리그라피 등 특정 용도로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 필기 시 굵기는 닙 제조사의 특성, 슬릿의 간격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므로 직접 사용해 보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오픈 닙 Open Nib
가장 많이 사용되는 형태의 닙. 닙 전체가 드러난 형태로 잉크가 쉽게 마르지만 커다란 펜촉과 화려한 각인이 인기 요인이다. 

후디드 닙 Hooded Nib
닙의 끝부분만 밖으로 노출된 형태. 잉크가 잘 마르지 않지만 만년필의 개성이 드러나는 닙이 가려져 멋이 없는 것이 단점이다. 파카 모델에 많이 적용됐다. 

인레이드 닙 Inlaid Nib
쉐퍼사가 특허를 갖고 있는 닙. 제작 과정부터 닙과 보디 일체형으로 만든다. 형태와 문양이 독특해 개성 있는 디자인을 찾는다면 추천한다.


초보자를 위한 만년필 선택법


디자인

가장 중요하다. 일단 보고 마음에 드는 만년필을 고르는 게 우선이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야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상 필기가 일상에서 멀어진 요즘, 만년필은 나의 감성을 돋울 수 있는 기호품이다. 따라서 일단 맘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야 오랫동안 아끼며 쓸 수 있다.


펜촉

필기용으로 쓸 것인지 아니면 계약서나 결재 서류에 사인할 때 등 ‘결정적 한 방’이 필요할 때 쓸지에 따라 달라진다. 대부분 브랜드의 F촉은 알파벳을 기준으로 만든다. 한글, 한자 등의 획이 많은 글씨나 작은 글씨를 쓸 때는 ‘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따라서 한글 필기를 주로 한다면 EF촉이나 F촉을, 서명용이라면 M촉 이상의 굵기를 추천한다.


가격

시중에 나와 있는 만년필은 1만원도 안 하는 중국산 저가 제품부터 100만원은 우습게 호가하는 고급품까지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만년필 초보라면 아무리 만년필이 멋과 자존심을 살려주는 아이템이라지만 처음에는 저렴한 제품군을 다양하게 사용해 보고, 촉의 굵기, 재질, 브랜드의 특성 등을 경험해 본 후 ‘나만의 만년필’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만년필 대표 브랜드

대표적인 만년필 브랜드 제품 중 중년 남성의 기호와 품격에 어울릴 만한 모델을 추천한다. 


몽블랑
마이스터튁 149

‘만년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명사. 독일 브랜드로 철저한 고급화 전략으로 만년필 브랜드 중 독보적 위상을 확립했다. 각국 정상, 대기업 임원 등 사회 지도층이 사용하는 펜으로 유명해 뭇 남성의 선망의 대상이 된 제품. 1952년 처음 출시 후 지금까지 똑같은 디자인을 고수하고 있다.
122만원. 

파카
듀오폴드 클래식 빅 레드 CT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알린 일본의 항복 선언문에 서명할 때 맥아더 장군이 사용한 펜. 당시 검은색 보디 일색이던 만년필 시장에 최초로 강렬한 붉은색을 도입해 ‘빅 레드’라는 별칭을 얻으며 폭발적 인기를 구가했다. 한때 단종되었다 1987년 파카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복각했다.
80만원. 

워터맨
까렌 블랙 GT

까렌은 단종된 플래그십 ‘에드슨’의 디자인을 계승한 라인이다. 물살을 가르는 요트를 형상화한 유선형 디자인이 대단히 세련됐다. 18K 금촉, 독특한 디자인의 인레이드 닙이 포인트. 재질과 디자인 등에 따라 40만~80만원대로 제품이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다.
46만원. 

펠리칸
소버렌 M1000

‘버터가 녹는 듯한 부드러운 필기감’으로 유명한 펠리칸의 플래그십 모델이다. 연성 닙과 압도적인 펜촉의 크기, 풍부한 잉크량이 합쳐저 펠리칸 제품 중에서도 독보적인 부드러움을 자랑한다. 크기 또한 견줄 모델이 드물 정도인 대형기라 초보자에겐 부담스럽지만 그만큼 품격과 개성이 있는 모델이다.
100만원.

크로스
타운젠트 플래티넘 플레이티드

‘미국 대통령의 펜’으로 유명한 크로스의 대표 모델. 그중 타운젠트는 특히 오바마 전 대통령이 애용하는 펜으로도 유명하다. 유럽 만년필이 정교함, 화려함 등을 무기라면, 크로스는 실용성과 중후함을 내세운다. 스틸 펜촉에 크롬 도금을 입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멋이 있으며, 플래그십이지만 한정판을 제외하면 가격이 50만원 이하로 책정되어 있다.
100만원. 

파이롯트
커스텀 우루시

일본 브랜드 파이롯트의 플래그십 모델. 에보나이트 재질에 ‘옻(우루시)’을 칠해 ‘우루시’라는 이름이 붙었다. 옻칠 공정이 어렵다 보니 재고가 없으면 주문 후 수령까지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타사의 동급 펜과 견줘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반면, 일본 만년필답게 펜촉이 가늘어 획이 많은 한자나 한글 필기에 유용하다.
132만원.

라미
사파리

독일 브랜드 라미의 보급형 모델. 2022년 기준 5만원대의 저렴한 제품이지만 그만큼 관리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 사용자가 많다. 중후한 멋 대신 현대적인 디자인과 극도의 실용성을 추구해 입문기로 강력하게 추천하는 제품. 가장 가는 EF촉은 한글 필기에도 적합한 세필용이며, 특유의 사각거리는 느낌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에디터가 이 원고의 초안을 쓰는 데 이용했다).
5만8000원.

그라폰 파버카스텔
클래식 퍼남부코

그라폰 파버카스텔은 ‘세계 최초의 필기구 회사’인 파버카스텔의 프리미엄 만년필 브랜드로, 클래식은 그중 플래그십 라인업에 해당한다. 거의 모든 공정을 파버카스텔 장인이 수작업으로 진행하고, 심지어 펜촉도 수작업으로 길들여 출고한다. 귀족인 파버카스텔 가문의 정체성을 계승해 중세 기사의 갑옷을 연상시키는 외관과 나무 재질을 활용한 배럴의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80만원.


Den 163호 <남자가 만년필을 써야 하는 이유>
에디터 김구용 도움말 박종진(만년필 연구소 소장) 포토그래퍼 김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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