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의사 정현채 “죽음을 직시하면 삶이 윤택해진다”
‘사후를 알면 좀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해온 의사 정현채가 죽음학에 몰두하는 이유다. 20년 가까이 죽음을 연구해 온 정현채 교수에게 죽음에 대해 물었다.
2003년 40대의 끝 자락이던 정현채 교수는 문득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20년 넘게 의사로 일하면서 생물학적 죽음에 익숙해졌지만,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그때부터 죽음과 사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국내 죽음학 최고 권위자로서 온·오프라인 강의, 온라인 카페 활동 등을 통해 죽음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다. ‘죽음학 전도사’인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죽음은 소멸이 아닌,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서울 강남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와 죽음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2018년에 방광암 진단을 받았는데
일찍이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덕분에 암 진단도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전에는 사망 원인이나 죽음의 형태를 알 수 없어 막막했다면, 이제는 어떤 식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질병을 앓고 보니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다만 한 가지, 인공 방광 시술을 위해 방광과 전립선을 제거한 만큼 전립선암으로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웃음)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무수한 죽음을 봐왔다. 하지만 사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그즈음 죽음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스위스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가 쓴 <사후생: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라는 책을 접했다. 로스 박사는 많은 환자를 직접 돌보고 관찰한 결과 “인간의 육신은 영원불멸의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불과해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내게 큰 깨달음을 준 내용이었다. 그 후 수백 권의 문헌, 의과학 논문과 동영상 자료를 접하며 죽음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죽음학이란?
인류학, 종교학, 철학, 의학, 장례학 등 다양한 학문을 두루 다룬다.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한편,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접근한다. 이런 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죽음을 연구하기 전까지만 해도 죽음은 곧 소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장박동이 멎었다가 심폐소생술 등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 중 일부가 경험하는 근사 체험이나 임종을 앞둔 환자가 겪는 삶의 종말 체험 같은 영적 체험을 알게 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육체의 생명이 다해도 의식은 또렷이 유지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구로 여행을 왔다고 생각하면 쉽다. 일정표대로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뒤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이 그리 두렵지 않다. 또 긴 여행에 앞서 집 안 구석구석을 정리하는 것처럼 평상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미리미리 삶의 매듭을 지어두자.
죽음에서 육체와 정신은 별개의 존재라는 뜻인가?
2015년 미국 애리조나주 투산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의사 등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다수의 과학자가 참석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보다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게끔 모인 이들은 “인간의 의식은 뇌 등 특정 부위에 국한하지 않고 육체가 죽은 뒤에도 존속된다”라는 골자의 선언을 했다.
한 예로, 이탈리아의 유명한 산악인 레이놀드 메스네르(Reinhold Messner)는 산악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례를 모아 <죽음의 지대>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등반 중 추락할 경우 육체가 지독한 고통을 겪기 전 체외 이탈을 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사례가 나열돼 있다. 산 아래로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봤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외 이탈 역시 근사 체험의 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죽음과 관련한 영적인 현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죽음학에서는 근사 체험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해 왔다. 실제로 사망 판정을 받은 뒤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난 환자의 10~25%가 근사 체험을 경험한다.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인지 과학 연구소는 윤회나 카르마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3000건 이상을 모아 연구 중이다. 또 2001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의학 학술지 <랜싯(The Lancet)>은 사망 판정을 받은 후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사 체험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미국의 유명한 뇌 과학자 이븐 알렉산더는 자신의 근사 체험을 기록한 책 <나는 천국을 보았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처럼 과학 분야에서도 종교 영역이나 괴담 등으로 여기던 사후에 대한 해석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사후가 있다 한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두렵지 않나?
제아무리 성인이나 성직자라도 죽음 앞에선 초연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듣거나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또 내세관이 결여된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죽는다는 것에 심한 두려움을 느끼는 편이다.
죽음과 관련한 가장 유명한 말인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로마공화정 시대에 나온 말이다. 로마인은 이때부터 인간의 유한함을 인지하고 현실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또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에서는 이른바 ‘웰다잉’이라는 개념을 일찍부터 받아들였다. 일본은 1970년대부터 죽음학에 관심을 보여 왔다. 한국도 죽음에 대한 교육과 대화를 좀 더 활발히 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 삶의 방식이 바뀔까?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결혼이나 취업처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평상시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면 삶의 선택지가 간결해진다. 죽음이 한 달 남았다고 가정해 보자. 일의 경중이 저절로 나눠질 것이다. 잔가지를 쳐내고 진짜 절실한 일에 몰두할 수 있다.
죽기 전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40~50대는 죽음을 준비하기 좋은 나이다. 죽음이 코앞이라고 생각해보라. 자신의 신변을 미리 정리하고 싶어질 것이다. 나 역시 강의록, 월급명세서 등을 대학 박물관에 보내고 있다. 장기기증 서약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사전의료의향서, 유언장, 묘비명도 작성했다. 내 장례식 때 틀어놓을 음악도 미리 선곡해 놨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유서 작성, 영정 사진 촬영 같은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건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고, 육체만 소멸될 뿐 현생의 고통은 그대로 이어진다. 오히려 해결 도구인 육체가 사라져 더욱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자살 미수자의 근사 체험 사례를 살펴보면 아주 깜깜한 공간에 고립돼 있다가 혼자 되돌아오는 경험이 많다. 죽은 가족을 만나거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등 일반적 근사 체험 사례와는 정반대다.
현재의 삶이 괴롭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학교 수업이 어렵고 공부하기 싫다고 학교 담장을 넘어 학교 밖으로 도망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 경우엔 결국 학교로 다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루게릭병에 걸려 서서히 죽음을 맞은 살아생전의 모리 교수와 제자의 대화를 엮은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보면 매일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나온다. 그는 아침마다 가상의 새에게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니?”, “바라던 대로 인생을 살았니?”, “난 준비됐니?”라고 질문하는데, 이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삶의 모든 순간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다. 죽음은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이다. 잘 사는 것이 곧 잘 죽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기여로써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사별의 아픔을 현명하게 갈무리하는 방법도 궁금하다
사별에 대한 슬픔에는 시효라는 게 없다. 특히 죽음이 소멸이라고 생각하면 그 슬픔에서 더욱 헤어 나오기 어렵다. 죽음은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인 만큼 그곳에서 잘 지내리라는 확신이 든다면 지나친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