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속 클래식을 찾아서

K-팝에 클래식 샘플링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한 해 블랙핑크, 레드벨벳, (여자)아이들 등 잘나가는 여자 아이돌이 클래식을 삽입한 신곡을 발매한 것.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클래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K-팝을 모았다.

2023-01-03     진주영 에디터

 

 

 

 

샘플링이란?

기존 곡의 일부를 차용해 새롭게 가공하는 것을 말한다. 저작권은 저작자 사후 70년까지 보호되는 만큼 대부분 클래식 음악은 저작물 권리가 소멸됐다. 누구나 잘 아는 익숙한 클래식을 샘플링함으로써 보다 쉽게 대중성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로 뻗어 나가는 K-팝의 클래식 샘플링은 해외 팬의 마음을 사로잡을 무기가 되기도 한다.

 

 

K-팝 속 클래식 샘플링의 시초 

철이와 미애 ‘하늘 따먹기’(1993) 

베토벤 ‘엘리제를 위하여’(1810)

1992년 데뷔한 혼성 듀오 철이와 미애의 데뷔곡 ‘너는 왜’(1992)는 1980년대 미국의 3인조 걸 그룹 커버 걸스의 노래 ‘Because of You’를 샘플링한 곡이다. 뒤이어 선보인 후속곡 ‘하늘 따먹기’에서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샘플링했다. 샘플링이라는 용어마저 낯설던 1990년대 초, 시대를 앞서 나간 선택이었다. 노래 중반부에 등장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는 곡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역할을 한다. ‘엘리제를 위하여’에 맞춰 격렬하게 춤추는 철이와 미애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샘플링한 또 다른 노래로는 가수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2007)가 유명하다. 

 

 

희망을 노래한 K-팝과 클래식 

H.O.T. ‘빛’(1998)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1824)

1990년대를 주름잡은 남자 아이돌 그룹 H.O.T.의 3집 타이틀 곡 ‘빛’은 멤버 강타의 자작곡으로 20년 넘게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다. “다 함께 손을 잡아요”, “마주 잡은 두 손으로 우리 모두 함께 만들어가요” 같은 가사는 1997년 IMF 외환위기로 힘들어하던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했다. 이 곡 중반부에 들어서면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 멜로디가 잔잔한 랩과 함께 흘러나온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 (1786)를 가사로 삽입한 곡이다. “모든 사람은 서로 포옹하라!”, “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같은 시구에서 알 수 있듯, 이 시 역시 인류애를 주제로 한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H.O.T.의 ‘빛’에 샘플링된 것은 단순한 멜로디 차용을 넘어 희망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H.O.T.는 이후 발매한 4집 앨범 타이틀곡 ‘아이야!’(1999)에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G단조 K.183을 샘플링했다. 

 

 

 

아이돌 그룹의 운명을 바꾼 노래 

신화 ‘T.O.P.’(1999)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1877)

신화의 2집 타이틀곡 ‘T.O.P.’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샘플링해 이별 후 절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1998년 ‘해결사’라는 노래로 데뷔한 신화는 당시 별달리 주목받지 못하다가 이 곡으로 첫 번째 음악 방송 1위를 거머쥔다. 전 세대에 걸쳐 사랑받는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를 도입부에 사용한 덕분에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간 것. 또 순백의 의상을 입은 여섯 남자가 무용수 못지않은 부드러운 몸짓을 선보이며 ‘백조의 호수’의 아련한 느낌을 제대로 살렸다는 평. 

 

 

 

샘플링곡으로 표현하는 화자의 심정 

플라워 ‘눈물’(1999)

오페라 <리날도>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1705) 

록 발라드 대표 밴드 플라워의 데뷔곡 ‘눈물’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작곡한 오페라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로 시작한다. ‘울게 하소서’는 적장에게 납치된 여자 주인공이 자유를 염원하며 부르는 노래다.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이 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같은 애절한 가사가 엄청난 고음으로 이뤄진 소프라노 아리아다. 플라워의 ‘눈물’은 이뤄질 수 없는 짝사랑으로 괴로워하는 남자의 마음을 담은 곡이다. 자유를 염원하는 ‘울게 하소서’를 앞부분에 배치해 짝사랑의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워의 보컬이자 성악 전공자인 고유진은 몇몇 무대에서 ‘울게 하소서’ 부분을 라이브로 소화해 놀라움을 안겼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로 타파한 낯섦 

AKMU ‘오랜 날 오랜 밤’(2017) 

요한 파헬벨 ‘캐논’(1694) 

2012년 SBS 오디션 프로그램 <일요일이 좋다-K팝스타 시즌2>에 출연한 악동뮤지션(현재 AKMU)은 ‘다리 꼬지 마’, ‘매력 있어’, ‘라면인 건가’ 등 재치 있는 가사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단숨에 천재 남매 듀오로 등극한다. 악동이라는 이미지에 걸맞은 노래를 발표 하던 이들이 2017년 선보인 ‘오랜 날 오랜 밤’은 멤버 찬혁의 실제 이별 이야기가 녹아든 발라드곡이다. 도입부에 피아노로 연주한 요한 파헬벨의 ‘캐논’이 흘러나오는 덕분에 악동뮤지션표 발라드가 낯설던 이들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엽기적인 그녀> (2001), <클래식>(2003) 등 영화 OST로도 친숙한 ‘캐논’은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중 하나로 손꼽힌다. 

 

 

 

K-팝이 사랑한 클래식 명곡, ‘캐논’ 

세계인이 사랑하는 명곡 중 하나인 ‘캐논’은 그 명성에 걸맞게 그동안 수많은 노래에 샘플링되어 왔다. 그중 스위트박스 ‘Life is Cool’(2004), 이터너티 ‘Wonderful World’(2009), 마룬5 ‘Memories’(2019) 등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팝송이다. ‘캐논’은 K-팝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돼 왔다. 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1994), god ‘어머님께’(1999), 자전거 탄 풍경 ‘너에게 난 나에게 넌’(2001), 박상민 ‘해바라기’(2005), 양파 ‘사랑… 그게 뭔데’(2007), 백지영 ‘사랑 안 해’(2009) 등이 그 예다. 

 

 

 

힙합 분위기를 고조하는 클래식 선율 

블랙핑크 ‘Shut Down’(2022) 

니콜로 파가니니 ‘라 캄파넬라’(1831) 

지난해 9월 블랙핑크가 발매한 정규 2집 타이틀곡 ‘Shut Down’의 도입부는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한다. 바로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가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 2번 3악장 ‘라 캄파넬라’다. 이탈리아어로 작은 종이라는 뜻인 ‘라 캄파넬라’는 종소리 같은 고음이 연달아 이어지는 곡이다. 빠른 속도의 바이올린 선율 위에 얹어지는 블랙핑크의 파워풀한 래핑이 인상적이다. 블랙핑크는 도입부, 후렴구 등에 이 곡을 영리하게 사용해 클래식과 힙합 비트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했다. 

 

 

 

바흐를 위한 헌정곡 

레드벨벳 ‘Feel My Rhythm’(2022) 

바흐 ‘G선상의 아리아’(1723) 

레드벨벳의 ‘Feel My Rhythm’은 단순한 샘플링을 넘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곡이다. 우선 레드벨벳이 지난해 이 곡을 발매한 날짜인 3월 21일은 바흐의 생일이다. 또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G선상의 아리아’에서 영감을 받아 명화를 오마주 한 오페라 형식으로 제작했다. 노래의 도입부에 사용한 ‘G선상의 아리아’에 맞춰 레드벨벳 멤버들이 선보이는 우아한 몸짓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 후렴구에 등장하는 ‘G선상의 아리아’는 빠른 템포로 변주해 혹시 모를 지루함을 덜어냈다.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똑똑한 샘플링 

(여자)아이들 ‘Nxde’(2022) 

오페라 <카르멘>의 아리아 ‘하바네라’(1875) 

(여자)아이들의 곡 ‘Nxde’는 마릴린 먼로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노래다. (여자)아이들은 “말투는 멍청한 듯, 몸매는 섹시 섹시요”라는 가사로 1950~1960년대 최고 섹시 스타 마릴린 먼로를 묘사한다. 이후 마릴린 먼로가 실제로는 지적이었음을 강조하며 자신들 역시 고정화된 걸 그룹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한다. 또 오페라 <카르멘>의 아리아 ‘하바네라’를 샘플링했는데, 하바네라를 부르는 주인공 카르멘은 팜 파탈의 원조이자 자유분방한 집시 여인이다. 1875년 <카르멘>이 초연될 당시 전통적인 여성 캐릭터에 익숙했던 대중은 파격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카르멘>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여자)아이들은 주체적인 여성상을 노래하며 그 전면에 마릴린 먼로를 내세우고, <카르멘>의 ‘하바네라’를 샘플링하면서 주제 의식을 공고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