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의 서예가 이정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 대사 중 상당수는 말이 아닌 ‘글씨’였다. ‘보고십엇소’라는 한 단어는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을 단 한마디로 녹인 절묘한 한 수였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다름 아닌 청년 서예가 이정화. 얼핏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그를 만나 서예의 매력에 대해 물었다. 

2023-01-03     진주영 에디터

 

 

 

 

Profile 이정화 •1991년생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 저자 •드라마 및 영화 서예 대필각종 드라마에서 서예 대필 작가로 활약했다

 

2021년 초 청년 서예가로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인중(仁中) 이정화. 방송에 소개된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서예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곱 살 나이에 처음 붓을 잡았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예문자예술학을 전공했다. <육룡이 나르샤>, <해를 품은 달>, <호텔 델루나> 등 다양한 드라마에서 붓글씨를 쓰는 대필 작가로 활동했다. 한 달 수입이 20만원일 정도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좌절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예를 오래오래 하고 싶다는 청춘. 그 방송을 통해 고리타분할 것만 같은 서예의 이미지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10년 넘게 서예라는 한길을 걸어왔음에도 아직 32세에 불과한 청년 서예가 이정화를 만났다.

 

각종 드라마에서 서예 대필 작가로 활약했다

2010년 드라마 <동이>를 시작으로 다양한 드라마에 참여했다.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건 2018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보고십엇소’라는 글씨다. 개인적으로는 20대 초반에 참여한 <뿌리깊은 나무>(2011) 드라마 현장이 기억에 남는다. 

실어증에 걸린 궁녀의 대필을 했던 만큼 실제 드라마에서는 필담이 주요 소통 수단이었다. 배우 못지않게 대필자인 나도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해야 그에 어울리는 글씨를 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바탕으로 서예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부가 많이 됐다. 

화살을 맞아 아픈 팔로 글씨를 쓰는 상황,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쓰는 장면 등 드라마 속 서예 대필 작업은 매번 색다른 재미가 있다. 근래에는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시즌 2 촬영에 참여하고 있다. 

 

2021년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이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방송 이후 “서예가 이렇게 신선한 거였구나”라는 인터넷 후기를 봤다. 고루하게만 여겨지던 서예가 새로워지는 시대가 왔다는 게 신기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작업하자는 연락이 와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파급력을 제대로 느꼈다. 서예의 가능성을 알아봐주신 것 같아 감사했다. 

 그 덕인지 최근 흥미로운 작업을 다수 진행했다. 일례로 한 화장품 브랜드에서 진행한 한글날 캠페인 영상에는 화장품 노출 없이 내가 서예를 하는 모습이 30초간 나온다. 화장품 광고를 이렇게도 기획할 수 있다는 게 색달랐다. 또 MBC의 제20대 대통령 개표 방송에 참여해 전국 17개 시도를 상징하는 낱말을 붓글씨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예를 통해 다채로운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슬럼프는 없었나?

20대 중반에 붓이 손에 안 잡히던 시절이 있었다. 젊은 중국 작가의 작품에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낀 탓이다. ‘청년’ 서예가가 아니라 서예가로서 자리 잡은 또래 작가를 보고서 덜컥 겁을 먹었다. 청년이라는 수식어를 떼고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두려워졌다. 

 당시엔 잘 몰랐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그때가 슬럼프였다. 그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느냐 하면, 그 작가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니 편안해졌다. 그 작가 역시 그만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 노력했을 테니, 나도 더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좌절하지 말고 한 번 더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그 시기를 넘겼다.

 

원래 서예가가 꿈이었나?

어릴 때는 그저 재미로 서예를 했다. 직업인으로서 서예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예를 하면서 배운 한문, 중국어를 활용해 통역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편집자 주: 이정화의 부친은 서예가인 송민(松民) 이주형이다)께서 서예가도 고려해 보라고 하시더라. 그때 서예가와 통역가 중 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신중히 고민하다 결국 서예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딸을 대견해하신 반면, 어머니께선 기대보다 걱정이 더 크셨던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굉장히 지지해 주신다. 

 

인중이란 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나?

<논어>에 나오는 ‘박학이독지(博學而篤志)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인재기중의(仁在其中矣)’에서 따왔다. ‘공부를 넓게 하고 뜻을 깊게 새기면 그 안에 인(仁)이 들어 있다’라는 뜻이다. 호를 지어주신 학과 교수님에 따르면, 하늘과 땅 그 사이에 가장 중요한 건 사람(人)이라는 생각까지 ‘어질 인(仁)’에 담으셨다고. 그 뜻을 생각해 보면 세상 만물과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라는 뜻인 것 같다. 

 

대학 시절, 해외에서 서예 공연을 했다고 들었다

2013년 3월 1일부터 6월 25일까지 117일 동안 15개국을 돌며 한국 전통문화 공연을 펼쳤다. ‘아리랑유랑단’이라는 이름으로 판소리, 대금, 장구 등 국악 연주자와 동행했다. 카페베네로부터 1억원의 후원금을 받은 만큼 서예 국가대표라는 마음가짐으로 비장하게 출발했다. 

 국악 연주자들이 ‘아리랑’을 공연하면 그 옆에서 서예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대부분이 종이에 먹이 번져 나가는 걸 신기해했다. 그중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외국인이 있는데, 나에게 어떤 한자를 좋아하느냐고 묻더라. 그러면서 본인은 ‘어려울 난(難)’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왜냐하면 어렵다는 건 그걸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타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나?

예전에 아버지가 산의 능선을 보고 “먹이 번진 것 같지 않아?” 하고 툭 던지듯 하신 말씀이 있는데,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작업을 하면서 먹이 번지면 그때 그 산이 생각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글씨를 찾고, 글씨 속에서 자연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얼마 전에는 “글씨는 하얀 밭(종이)에 붓이라는 호미로 콕콕 작물을 심는다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 꾹꾹 눌러쓰지 않는 건 그냥 먹칠이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데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들더라. 글씨를 쓰는 일뿐 아니라 하루 24시간을 허투루 사용하고 있진 않나 돌아보게 됐다.

 

‘어려울 난(難)’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 있다고? 

최근 몇 년간 긴급재난문자를 수없이 많이 받지 않았나. 어느 날 긴급재난문자를 보는데 그 외국인이 생각나더라. 재난이란 단어는 본래 ‘재앙 재(災)’, ‘어려울 난(難)’인데 ‘있을 재(在)’를 써서 어려움이 있는 시대, 즉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시대라는 의미로 글씨를 쓴 적이 있다. 

 

아리랑유랑단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홍콩, 인도, 이집트 등 다양한 나라를 다녀왔다. 그중 요르단의 자르카 장애학교에서 ‘아리랑’ 공연에 화답한 아이들의 모습에 감동받았다. 당시 안전상의 이유로 서예 퍼포먼스는 진행하지 못했다. 대신 공연 전 아이들의 볼, 이마, 팔, 손등 등에 태극기 문양을 그려주었다. 다른 동료들 의 ‘아리랑’ 공연이 시작되자 아이들이 신나게 춤을 추더라. 그 순수함에 예술의 힘을 느꼈다. 꾸밈없는 글씨를 써야 할 서예가로서 내 역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서예의 매력은 무엇인가? 

붓으로 쓴 글씨는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붓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붓을 쥐었다 한들, 먹의 움직임을 100% 장악하기 어렵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쓰이지 않는다. 대개 서예가 하면 차분하고 인내심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지루한 건 못 견디는 성미다. 그런데 서예는 언제 해도 재미있다. 예기치 못한 먹 한 점이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서예가로서 목표는? 

2020년 첫 번째 전시회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 덕분에 이렇게 전시회까지 진행한다는 의미에서 주제를 ‘덕분에’로 정했다. 그때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2023년 1월 서울 인사동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연다. 서예가로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얼마 전 여러 선배들과 함께한 모임에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변치 않는 모습이면 좋겠다”라는 애정 어린 조언을 들었다. 사소한 말 하나에도 온 마음이 흔들리지 않나. 지금의 순수함, 열정 등을 잃지 않는 서예가가 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거다. 그래도 꼭 지켜내고 싶다. 

 

 

일부러 포장해서 쓴 글씨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오래 두고 보아도 진심이 느껴지는 글씨를 쓰고 싶다. 개인적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을 존경한다. 조선의 피카소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예술가로서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