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展
피카소, 칸딘스키, 샤갈,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절호의 기회.
한국에 온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올여름 전시 이슈를 꼽으라면 단연 ‘거장’이다. 지난 3월 24일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오픈한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전이 그 대표 격. 피카소, 달리, 앤디 워홀 등 거장의 작품을 소유한 독일 루트비히 미술관의 컬렉션을 전시한 만큼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피카소, 칸딘스키, 샤갈, 앤디 워홀, 로버트 인디애나, 로이 리히텐슈타인, 잭슨 폴록 등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전시는 독일 표현주의, 러시안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추상 표현주의,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20세기 격변의 시대에서 태동한 예술운동의 배경과 서양 미술사의 발자취에 집중한다. 다양한 사조의 작품이 주는 시각적 재미와 20세기 미술사를 관통하는 지적 충만감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8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캔버스에 유채, 54.0×65.0cm, 1960 ⓒ 2023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작품 속 여인은 녹색 침대에 누워 있다. 그녀의 얼굴과 몸에 사용된 부드러운 곡선, 고스란히 드러난 젖가슴과 배꼽, 얼굴의 반쯤 드리워진 명암, 그리고 편안한 미소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을 연상케 한다. 여성스럽고 육감적인 면이 부각되면서도 일상에서 해방된 아주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5만여 점의 작품을 남긴 20세기 거목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1881~1973)
‘미술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피카소는 1909년, 28세의 나이에 프랑스 화가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큐비즘’ 운동을 창시했다. 사물을 과장해서 그리고, 단순하게 표현하며, 평면 위에 3차원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실험도 계속했다. 무엇보다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기본 요소로만 그린 그의 스케치는 ‘근본에 대한 깊은 탐구심’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80년간 소묘, 회화, 도자기, 조각 등 총 5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 피카소는 명실공히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캔버스에 유채, 98×80cm, 1920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이 작품을 조명하는 가운데 하얀 선이 색채 대비를 불러일으킨다. 거친 붓자국이 만들어내는 반복적 리듬감도 두드러진다. 칸딘스키가 10여 년을 갈고닦아 온 추상 실험의 결정체라 할 만한 작품으로, 그의 관심이 색채에서 선으로 옮겨 왔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이끈 최초의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1866~1944)
복잡한 현실 세계를 점, 선, 면으로 단순화한 바실리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미술을 이끈 러시아 거장이다. 아르누보와 신인상주의의 영향으로 풍부한 색채가 특징인 초기 칸딘스키의 화풍은 1910년경부터 추상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내면의 소리를 화폭에 담은 그의 작품 ‘흰 붓자국’을 볼 수 있다. 칸딘스키의 대표 추상화 작품 중 하나다. 튀니지,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거쳐 뮌헨에 정착한 칸딘스키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귀국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추상 형태로 변화했는데, 이는 음악의 리듬이 미술로 표현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캔버스에 유채, 92.5×48cm, 1909 ⓒ Marc Chagall / ADAGP, Paris - SACK, Seoul, 2023
샤갈의 초상화에 대한 연구와 가족 등 사랑하는 사람들을 화폭에 담는 따뜻한 심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명한 작품이 아니다 보니 미디어의 주목을 덜 받았지만, 원본에서 뿜어 나오는 인간적 감성에 감동하게 된다. 유명 작품이 즐비한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의외의 발견이다.
사랑을 그린 인본주의 예술가
마르크 샤걀 Marc Chagall(1887~1985)
샤갈은 고흐나 고갱 같은 ‘고독한 천재’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 그는 가난한 사랑을 하면서도 늘 행복했다. 전쟁과 유대인 박해, 그리고 영원한 뮤즈였던 아내 벨라의 요절 등 굴곡진 삶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한 가지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샤갈은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봤고, 작품을 통해 삶의 기쁨과 사랑을 표현했다. 한편, 샤갈은 전통적 미술 분야인 초상화와 자화상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그는 주로 아내 벨라와 부모님, 여동생 등 가족과 그가 존경하는 친구, 지식인까지 다정하고 섬세한 터치로 화폭에 담아냈다.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비난하지 않고 그려낸 화가’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캔버스에 레진, 142.2×167.7cm, 1951
강렬한 색채와 요동치는 선. 물감을 끼얹고 쏟아붓는 잭슨 폴록의 화풍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개인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원했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표현했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에게는 난해한 추상미술이 그에게는 자기 감정을 세상에 어필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 방법이었던 셈이다.
검은색 분노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1912~1956)
잭슨 폴록은 물감을 쏟아부으며 그리는 ‘액션 페인팅’의 창시자다. 알코올의존증과 정신분열증으로 심리치료를 받은 그는 추상화를 그리며 억눌린 내면을 해소했다. 나중에는 아예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물감을 쏟고 끼얹고 튀기며 온몸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혁신적 스타일로 현대미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44세의 나이에 만취한 채 운전하다 요절해 미술계를 안타깝게 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은 잔뜩 화가 났을 때 누군가 나 대신 욕을 해서 기분을 풀어주는 느낌이다. 고정된 형태, 즉 예상된 결과를 추구하는 일상의 틀에서 물감을 흩뿌리는 행위는 해방을 의미한다. 잡힐 만한 형태도 없고, 물감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결과를 통제할 수도 없다. 잭슨 폴록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물감을 뿌리는 기법을 통해 본능적 감정 표현에 가까이 다가간다. 흩뿌린 검은색을 통해 우리는 욕이나 폭력 같은 감정이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작품에 어우러진 배경색 혹은 흰색이 마음을 풀어주기도 한다.
캔버스에 유채, 173×143cm, 1962 ⓒ Estate of Roy Lichtenstein / SACK Korea 2023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8월부터 11월까지 남태평양 솔로몬군도에서 가장 큰 과달카날섬 탈환을 위한 미 해병대원의 실제 전쟁을 그린 만화를 리히텐슈타인이 새롭게 해석했다. 기관총이 불을 뿜고 수류탄이 날아오는 등 원작보다 더욱 실감 나게 그렸다. 폭음은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했고, 색과 형태를 단순화해 차갑고 견고하게 전쟁 분위기를 살렸다.
만화에서 찾은 현대사회의 단면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1923~1997)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의 한 장면을 확대하고 화면을 망점으로 채움으로써 대중문화와 인쇄 기술을 작품에 도입했다. 표절이라느니, 속이 텅 비었다느니 하는 질타도 거셌지만 그 못지않게 호의적 반응도 뜨거웠다. 가볍지만 강력한, 무언가 신선한 것을 기다리던 미술 팬들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원본 이미지를 과감하게 재구성하고, 말풍선은 작가의 말로 대체했으며, 흑백과 밝은 원색, 뚜렷한 윤곽선의 단순화된 형태를 추구했다. 그의 작품을 채우는 원의 망점은 ‘벤데이 점(Benday Dot)’이라 불리는데, 그린 것이 아니라 구멍 뚫린 판을 이용해 색점을 찍어내는 방식이다. 이는 대량생산 사회의 단면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