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스페셜리스트의 확언, "치매 환자도 많은 걸 할 수 있다"
이동영 교수의 말에서 치매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 <Den>이 ‘명의 인터뷰’를 새롭게 연재합니다.
‘의사들이 인정하는 명의’를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가 추천하는 명의를 릴레이 인터뷰합니다.
“(시어머니는) 뭐든지 물어봤다. 에미야, 나 아침 먹었냐 안 먹었냐? 에미야, 나 머리 빗을까 말까? 에미야, 전깃불 끌까 말까? 수돗물이 넘치는데 잠글까 말까? 온종일 이런 백치 같은 질문을 하면서 내 뒤를 쫓아다녔다.”
소설가 박완서는 <포말의 집>(1976)에서 치매 노인을 이렇게 표현한다. 독자들은 며느리에 감정이입해 가엾이 여겼고, 치매 노인은 악역으로 치환됐다. 미디어에 비친 치매는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치매에 걸린 당사자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뒷바라지는 오롯이 가족의 몫으로 남는다.
“당신은 이 병에 걸릴까 봐 무섭다고요? 고령화사회로 진입하면서 가족, 이웃 할 것 없이 지인 중 서넛은 치매에 걸릴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주변의 도움이 있다면 치매 당사자도 여전히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동영 서울대학교병원 치매 및 기억감퇴 클리닉 책임교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이 교수는 30년 넘게 치매환자를 진료하고 병을 연구하면서 인간의 기억과 망각, 치매가 펼쳐지는 뇌라는 공간을 혼신의 힘을 다해 탐구했다. 그와 연구팀이 쓴 논문만 270편에 달한다.
최근에는 미국 국립보건원으로부터 약 130억원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와 공동으로 알츠하이머 발병 예측 및 기전 규명을 위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국립보건원의 연구 지원을 받은 국내 사례는 이 교수가 최초로, 세계적으로 알츠하이머 연구 수준을 인정받았다는 방증이다.
그런 이 교수가 “치매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아직 완치시킬 수 있는 치료제는 없지만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데다, 걸릴 수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와의 인터뷰는 치매에 관한 생각의 지평을 넓힌 계기가 됐다. 치매에 관한 그의 사려 깊고 적절한 답변을 공개한다.
Part 1.
치매 스페셜리스트의 조언
수많은 정신질환 중 치매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치매 권위자 우종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은사님이다. 1992년 레지던트 시절 우 교수님께 지도를 받았고, 그때부터 치매에 집중하게 됐다. 당시에는 치매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전까지 우 교수님도 치매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는데, 당시 최초의 치매약이 나오면서 치매 연구의 계기가 마련됐다. 1992년 서울대학교병원에 우리나라 최초로 치매 클리닉을 만들고, 1993년에 한국치매협회를 설립한 것은 그 일환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치매를 연구하게 됐다.
노인이나 치매에 처음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노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치매가 사회적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 1992년 당시만 해도 환자가 많지 않았고 약도 이제 막 나오는 태동기였다. 나도 한창 젊은 혈기에 노인질환보다는 젊은 사람을 치료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뒀다. 치매를 다루면서도 ‘이 길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기도 했고.(웃음) 그래도 일이니까 성실히 임했고, 꾸준히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사명감이 생겼다. 원래 뭔가 한 가지를 시작하면 잘 바꾸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다. 학문도 10년은 해야 깨달음을 조금 얻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몸소 겪은 것이다.
“주변의 도움이 있다면, 치매 당사자도 여전히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다.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모든 지적 능력을 한꺼번에 잃는 게 아니다. 치매는 종류도 많고 저마다 특징도 다른데, 대체로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잊어버린다. 다녀온 곳, 먹은 것, 만난 사람 등을 까먹는다. 하지만 본인이 예전부터 갖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 등은 잘 보존되고 있으니 주변에서 도와주면 치매에 걸리기 이전 환자의 장점을 그대로 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가령 치매가 진행되면서 지식을 점차 잃고 옛날 기억에도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누군가 바로잡아 주는 식으로 도와주면 된다.
치매에 관한 상식 중 바로잡을 것이 있을까?
사람들은 치매뿐 아니라 모든 질병을 좀 더 쉽게 예방하고 싶어 한다. 백신처럼 주사 한 대, 알약 한 알로 예방되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그런 약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현시점, 미디어에는 ‘어떤 약을 먹으면 치매가 예방된다’, ‘특정 건강기능식품이 치매에 좋다’ 같은 허위 과장광고가 흔하다. 그런 것에 현혹되면 안 된다. 치매든 다른 질병이든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치료제가 없다는데, 현재 나와 있는 치매약은 어떤 것들인가?
치매약 중 예방 효과가 검증된 것은 없다. 의료계에서는 증상이 악화되는 속도를 늦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약을 주로 처방한다. 그 밖에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도 치매 악화 요인인데, 이런 병들을 잘 관리함으로써 치매 진행 억제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유전적 요인이 크게 영향을 미칠까?
모든 병은 유전적 영향을 받는다. 치매도 유전적 요인이 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야 할 건 치매는 특정 유전자 한두 개로 발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매는 인체의 수많은 유전적 요인으로 발병하고, 치매 진행을 늦추는 유전자도 있다. 반대로 어떤 유전자들은 치매 진행 속도를 빠르게 한다.
중요한 건 유전자는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없이 변화하고, 살아가면서 생활 습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결국 부모가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자식에게 반드시 유전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양친이 치매를 앓았다면 자식의 치매 발병 위험률은 평균보다 높겠지만, 건강관리 등 후천적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가족력을 걱정하기보다는 평소에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치매환자를 보면 남 일 같지 않다. 가끔 ‘내 미래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그게 두려움은 아니다. 어차피 영원한 건 없으니 모든 일에 덜 오만해지고 겸손하게 된다.
수면 부족이 치매 발병에 영향을 미치나?
물론이다. 불면이 반드시 치매를 유발한다는 말이 아니라 불면이 지속되면 뇌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치매 발병률을 높일 수 있다고 보는 거다. 예를 들어 잠을 못 자면 수면과 관련한 뇌 부위가 손상된다.
그러면 잠을 더욱 이루지 못하게 되고, 수면 부족으로 뇌 건강이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밤에 돌아다닌다든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 경우 온 가족이 잠을 설쳐 모두가 힘들어한다. 반대로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낮에 무기력해지면서 또 다른 악순환을 만든다.
치매의 위험 신호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나?
스스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초기 증상이 건망증과 비슷한 데다 무엇보다 본인이 치매 같은 암울한 질병에 걸렸다는 걸 무의식중에 부정하기 때문에 인지하기 어렵다. 치매 위험 신호는 보호자 등 주변인이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자꾸 최근 일을 잊어버린다든지, 중요한 얘기를 진지하게 나눈 뒤에 계속해서 물어본다든지 평소와 다른 증상이 느껴진다면 치매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Part 2.
기억을 치유하는 의사 그리고 철학
치매에 걸린 사람의 뇌는 기억을 편집한다는 얘기도 있다. 긍정적인 사람은 기분 좋은 기억으로 편집돼 있고, 부정적인 사람은 비극의 이미지만으로 편집되어 있다고 하더라. 맞는 얘기인가?
일부는 맞다. 미디어는 전문가들에게 ‘치매는 곧 기억을 편집하는 질병’인 것처럼 뭔가 극적인 이야기를 유도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치매를 아는 사람은 기억을 편집한다고 단정해 말할 수 없다.
기억을 편집한다는 건 일부 기억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기억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옛 기억부터 최근 기억까지 시기를 담고 있는가 하면, 여러 감정이 실린 기억도 있다. 그중 일부는 없어지고, 또 어떤 건 생생하게 남기도 한다. 몇 가지 기억이 없어진다고 한들 ‘내 기억이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남아 있는 기억끼리 연결되면서 왜곡이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치매가 기억을 편집한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드라마처럼 좋은 기억만 남을 수는 없다. 치매환자의 뇌가 어떻게 좋고 나쁜 기억을 선별해 편집할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실에서는 대개 좋지 않은 기억이 연결된다. 예를 들면, 치매환자가 최근 물건을 테이블 위에 뒀는데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누군가 훔쳐갔다고 의심하며 화를 낸다. 알고 보면 물건을 둔 건 6개월 전 기억이다. 그 사이의 기억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실제로 치매환자에게 흔한 일이다.
기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경험의 흔적’이다. 살면서 경험한 것들의 흔적 말이다. 우리가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몸에 배어 있듯이 기억도 내가 의식하든 안 하든 몸에 남아 있다. 결국 기억은 태어나서 경험한 모든 게 담겨 있는 일종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자질과 성향에, 기억이라는 살아오면서 경험한 흔적들이 더해지면 ‘나’라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치매는 기억을 조금씩 지워 결국에는 나다움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가족의 얼굴을 잊는다거나, 좋아하던 것이 왜곡되고, 싫어하던 행동을 하는 등 살아오면서 남긴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다움을 잃어버리게 될까 봐 무서워한다.
기억을 잃은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면 의사로서 마음 아플 때도 많을 것 같다
환자 한 명 한 명이 다 안타깝다. 치매환자를 대면하면 한편으론 ‘내 미래일 수도 있다’ 싶기도 하다. 의사인 나도 앞으로 10년, 많게는 30년 뒤에 치매를 앓고 있을지 모른다.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환갑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노인 환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특히 한 시대를 풍미한 선배 의사가 치매환자가 되어 찾아올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80세를 넘기는 것이 흔해진 시대에 치매 문제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대부분 치매에 노출된 노년을 맞이할까?
나, 가족, 이웃 중에 서너 명은 앓을 만큼 흔해질 것이다. 통계상 80세 이상의 약 20%가 치매에 걸리고, 85세가 넘어가면 발병률이 2배로 늘어난다. 90세 이상은 3분의 2가 치매환자다. 그런 점에서 고령화사회로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치매에 걸린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인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매여 살 필요는 없다.
흔히 치매를 ‘벽에 똥칠하는 병’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는 상당히 진행한 단계다. 치매에는 경도, 중등도처럼 단계가 있으니 경도라면 주변의 도움을 받아 얼마든지 평범하게 생활할 수 있다. 알츠하이머도 수년, 많게는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만큼 삶의 마무리를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또 의학 발전 속도가 눈부시니 희망을 가져봐도 좋다. 현재 치매는 전 세계 의학계가 연구에 매달리고 있는 만큼 전망이 밝다. 결국 우리는 각자 할 수 있는 걸 하며 기다리면 된다. 거창하게 무언가를 준비할 것도 없다. ‘어차피 죽을 텐데’ 같은 무기력한 마음가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고, 매 순간 즐겁게 사는 것이 최선이다. 혹여나 치매에 걸리더라도 모든 것이 그러하듯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중년 남성에게 치매 예방법을 알려준다면?
일상생활에서 신체 건강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치매도 함께 예방하는 걸 목표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피지기(지키자, 피하자, 지속하자, 기쁘게)’가 중요하다.
지키자 는 뇌혈관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고혈압과 당뇨, 비만을 관리하는 것은 뇌혈관을 지키는 데 중요한 일이다. 특히 고혈압은 치매 발병 원인 중 절반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다.
피하자 는 과식을 피하자는 것이다. 과음도 마찬가지다. 치매에 좋다는 식품을 찾아다니기보다는 과식하지 않는 것이 뇌 건강 유지에 훨씬 바람직하다.
지속하자 는 활동을 지속하자는 의미다. 거창한 운동이 아니라 매일 1시간 이상 걷는 정도의 활동이면 된다. 또 자신에게 맞는 지적 활동, 사회 활동도 뇌 건강을 지키는 데 효과적이다.
기쁘게 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말한다. 기억력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 부위는 부정적 감정이나 스트레스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스트레스 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울증이 있다면 치료를 받는 것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