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 사투 벌이는 종양 전문의, 임윤지 수의사
국내 수의학에서 암에 대해 가장 저명한 수의사를 꼽으라면 임윤지 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비일본인 최초 일본 수의 종양 전문의이자 반려동물 암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녀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1300만 명.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국내 인구수다. 5명 중 1명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듯 새로운 신조어도 등장했다. 반려동물을 뜻하는 ‘펫(Pet)’과 가족을 의미하는 ‘패밀리(Family)’를 합친 펫팸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오랜 시간 함께하고 싶은 펫팸족을 방해하는 최대 걸림돌이 있다. 반려동물 사망 원인 1위인 ‘암’이 바로 그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강아지와 고양이 4마리 중 1마리는 암에 걸린다고 한다. 가족과도 같은 반려동물이 암을 진단받으면 대부분 충격에 휩싸인다.
임윤지 원장은 절망한 보호자를 다독이며 현실적인 치료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진료에 임한다. 임 원장은 “암 하면 이별부터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심각하게 여기기보다 얼마나 더 건강한 모습으로 반려동물을 마주할지 고민해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아울러 “암과 사투를 벌이는 반려동물은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외발자전거를 평평한 아스팔트에서 탈지, 울퉁불퉁한 비탈길에서 탈지는 반려인과 주치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덧붙였다.
과거에 비해 반려동물의 암에 대해 반려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과거에는 암에 대한 인식이 낮아 말기 상태에서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기보다 안락사를 언제 시킬지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진료를 보면 반려인들의 인식이 개선됐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가장 큰 변화는 건강검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조기 발견율이 높아진 것이다. 건강검진을 받은 후 암을 발견하거나 보호자가 이상 증세를 알아차리고 오는 경우도 많다.
암을 조기 발견하기 위해 평소에 눈여겨 체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갑자기 체중이 10% 이상 빠지거나, 육안으로 봤을 때 혹이 1cm 이상 커지거나 만져지는 경우에는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아울러 반복적으로 있었던 염증이 잘 회복되지 않거나 출혈이 있다면 암을 의심해 봐야 한다.
10여 년간 수의사를 하다가 암 분야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진료를 보면서 유독 예뻐한 반려견이 열 살 때 암이 생겼는데, 수술 대신 다른 치료를 하면서 지켜본 결과 1년 후 암이 더 커지고 전이되어 생을 마감하게 됐다. 반려인은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만족했지만 정작 나는 ‘이게 과연 최선이었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이후 암에 대해 좀 더 공부해야겠다 마음먹던 차에 때마침 일본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일본에서도 암 하면 희망이 없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어렴풋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종양 분야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종양 전문의와 내과 전문의 과정 중 암 환자들은 만나면서 ‘결이 맞다’고 판단했다.
암은 위중한 질병이지만, 사실 마지막에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되지 않는다면 그전에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상태로 상당 기간 유지가 가능하다. 그 때문에 증상이 악화되기 전까지 현재 상태를 잘 지키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반려인에게 설명해 안심시키고,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나아지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일본에서 전문의 자격을 딸 때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사실 당시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됐고, 나는 15년 차 수의사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외국인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큰 점수 차로 1등을 한 걸 보니 새삼 대견스럽다.(웃음)
암 환자의 시한부 통계는 숫자에 불과하다. 조기에 발견하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 건강하게 지내기도 하고,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도 많다.
이별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현재 반려인으로서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사랑하는 반려동물과 더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다.
암 센터를 직접 설립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뒤 종합병원급의 병원에서 내과 진료를 하면서 종양 환자들을 많이 만났다. 일반 환자와 암 환자의 비율이 6:4 정도로 암 환자가 많았는데 큰 병원이라 환자들이 많다 보니 상담 시간이 짧고 공간도 협소한 편이었다. 많은 환자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암 환자들을 위한 공간이 충분한 암 센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좋은 기회가 되어 설립하게 되었다.
일반 병원과 암 센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암 관련 기본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 병원과 다른 점이지만, 수의사의 경험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 약 4000건이 넘는 암 초진 케이스를 갖고 있다 보니 반려인을 안심시키면서 치료 방향을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또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여러 경우의 수를 얘기해 줄 수 있는 것도 메리트라고 생각한다. 이 밖에도 암 센터에는 암 환자가 대부분이다 보니 반려인끼리 공감하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암 센터를 운영하면서 생긴 진료 철학이 있다면?
암을 진단받은 반려동물들이 최소한 병원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에 편안하게 떠날 수 있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증상이 악화되기 전에 조기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역할인 것 같다.
반려동물의 암 치료는 어떻게 진행되나?
반려동물의 암 치료는 사람과 동일하다. 종양 제거가 가능하다면 수술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 밖에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면역치료가 기본 치료 방법이다.
반려동물 암에 대해 잘못 알려진 정보들이 있다면?
잘못 알려진 정보들은 대부분 주치의의 설명이 부족해 초래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세포 검사를 하면 암이 전이된다’라는 속설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몇 가지 원인이 떠오르더라. 먼저 림프종양과 비만세포종양인 경우다. 이 암들은 악성도가 높아 빠르게 퍼지는 경향이 있는데, 세포 검사를 받지 않았어도 퍼졌을 암인데도 불구하고 설명을 잘 듣지 못하면 검사를 받아 암이 퍼졌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또 다른 원인은 실제로 악성도가 높은 종양은 세포 검사를 하다가 바늘에 묻어 피부로 세포가 딸려 나오면 전이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암이 퍼진 것은 맞지만 표피에 퍼진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오해가 오해를 낳아 폐 전이가 된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노령견에게 암이 생겼다면 수술을 하는 것이 맞나
나이는 치료에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령이어도 수술 예후가 좋은 환자가 있고, 반면 어려도 예후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나이가 많아도 건강한 체질이라면 수술을 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 건가?
몇몇 연구에 의하면 리트리버 계통이나 닥스훈트, 샴 고양이 등이 암이 잘 생기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런데 진료 경험에 의하면 유전보다는 생활습관이나 성격 등 생활 환경이 암과 더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암을 예방하고 조기 발견하기 위한 생활습관에는 어떤 것이 있나?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 평소에 반려동물의 발가락부터 코끝, 꼬리 끝까지 섬세하게 만져 암으로 의심되는 혹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영양제를 챙기고 싶다면 유산균, 오메가3, 항산화제를 추천한다. 영양제는 암을 예방한다는 개념보다 평소 건강관리라고 생각하며 꾸준히 먹이는 것을 추천한다.
암 환자를 둔 반려인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진료를 받으러 온 보호자에게 늘 “이 병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한다. 자책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생각했으면 좋겠다. 암 환자는 외발자전거를 타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호자가 자전거 바퀴 수를 늘려줄 수는 없지만, 자전거를 타는 환경은 마련해 줄 수 있다. 자전거를 울퉁불퉁한 흙길에서 탈지 혹은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에서 탈지는 보호자가 하기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