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물리면 프랑스로 떠난다, 이기진 교수 이야기

물리학자, 작가, 화가, 영화배우, 요리사. 모든 타이틀을 뒤로한 채 그는 딴짓을 택했다. 프랑스 다락방에서 한 달을 생활한 그의 이야기.

2024-01-04     이상문(여성조선 선임기자)

 

 

물리학자 이기진은 올해로 24년째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선친도 같은 학교에서 정년퇴임한 물리학자이니 시쳇말로 명망 높은 학자 집안. 그런데 이기진 교수 이름을 더 빛내주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글을 쓰는 작가요, 갤러리 대표이자 화가요, 영화배우이자 요리사이기 때문이다. 과거 유명 아이돌 그룹 2NE1의 멤버 씨엘(CL)의 아버지라는 수식이 나오면 절정에 이른다.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건 하고 마는 이 사람을 세상은 ‘딴짓쟁이’라고 부른다. 저러다 본분을 잃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딴짓을 많이 하기 때문. 오죽하면 ‘물리 말고 다 잘하시는 분’이라는 애교 섞인 우스갯소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는 엄연한 물리학자다. 자신의 연구를 설명하기엔 너무 어려워 웬만해선 아예 물리학 얘긴 안 꺼낼 뿐.

 

‘부캐’가 다양한 만큼 부산물도 많다. 그림 에세이 <우주 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나 <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물리학>, <뚜띠의 모험>은 ‘이기진’을 곧바로 연상시키는 아이콘 같은 책이다. 직접 운영하는 갤러리 ‘창성동실험실’에서 만난 서촌 사는 영화감독의 권유로 연기를 배운다더니 2023년엔 독립영화에 출연해 배우가 되었다. 한국과 프랑스, 일본, 아르메니아 등 공부와 연구를 위해 지내던 나라에서 배운 요리로 레시피 책을 낸다는 소식도 있었다.

 

한옥 갤러리 창성동실험실은 서촌에서 나름 이름 있는 명소다. 전시 대관이 끊이지 않는 ‘핫플’ 갤러리이자 그가 애정하는 아지트이기도 하다. 좁은 골목에 위치한 낮고 비좁은 한옥 뒷마당은 예술가 친구들이 자주 방문하는 와인 파티장, 막걸리 잔치 마당이다. 그럼에도 그곳을 드나들 때마다 대화의 주제가 되는 장소는 ‘파리의 다락방’이다.

 

ⓒ이기진

 

언젠가 나도 꼭 가보고 싶은 그곳에 그는 해마다 간다. 방학 내내 게서 보낸다니 ‘한 달 살기’에 딱 맞는 표본이다. 오랜 역사와 추억이 있는 곳이라 낯설지 않은 곳일 뿐. 지난 여름방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꼭 한 달을 파리에서 지내고 돌아왔다는 그를 만났다. 어쩌면 그의 여행은 익숙한 곳을 떠나 익숙한 곳으로 가는 것이라 설렘이 없다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번도 안 가본 곳이어야만 낯설고 설레는 건 아닐 터.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머무는 곳 어디라도 새롭고 설레지 않겠나. 이기진식 한 달 살기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과 자유를 느끼게 한다.

 

 그의 ‘파리의 다락방’은 자필 책과 기사를 통해 여러 번 언급됐다. 이기진 교수는 결혼 생활 12년 동안 이사를 열 번 다녔다. 서울 마포의 조그만 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해 너덧 동네를 전전했고, 공부를 위해 일본에서도 살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도 한번 파리에서 살아볼까’라는 호기심이 들자 바로 짐 싸 들고 실행에 옮긴 것이 ‘파리 다락방’의 시초. 14구에 있는 조그만 다락을 세내어 온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가난한 연구자 신분이었지만 그때만큼 아름답고 빛난 시절이 또 없었다고 회고한다. 교수가 되고 난 뒤 다락방을 아예 매입했다. 이후 그곳은 매년 방학 때마다 찾아가는 도피처이자 낙원이 되었다. 둘이 지내기도 빠듯하지만 고급 호텔과도 바꾸기 싫은 그만의 ‘파리 별장’ 이다.

 

ⓒ이기진

 

그는 안전한 것보단 흥미를 끄는 것을 찾아 늘 떠날 준비를 한다. 솔로 독립 후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 중인 씨엘의 끼는 아빠의 DNA에서, 그리고 유년 시절 이색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강가에 살고 싶다고 말하면 “오늘밤이라도 알아볼까?”라고 묻는 아빠라니. 한 동네에 산 지 1년쯤 되면 아이들이 먼저 “아빠, 우리 이사 안 가?”라고 물었다는 후일담은 지인 사이에선 꽤 유명하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듯, 이기진 교수 부친 역시 호기심 많은 자유 영혼이었다고 한다. 특유의 딴짓쟁이 기질은 부친인 고 이병혁 박사로부터 이어받았다고 그는 말한다. 이병혁 교수 역시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를 거쳐 1991년 정년퇴임을 했는데, 퇴직 후 곧바로 전남 신안의 한 섬에 내려가 배를 만들며 살았다. 그러더니 얼마 후엔 서해 대부도로 옮겨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농한기엔 배를 타고 무인도 탐험에 나서는 게 그의 루틴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4년 전 병마로 먼저 떠난 이 교수의 부인은 생전에 “시아버님이나 남편이나 보물섬을 동경하는 꼬마 선장처럼 산다”라고 말했다.

 

섬을 좋아하고 탐험을 멈추지 않았던 할아버지, 호기심 가는 곳이면 어디든 살아보려는 아버지, 언니는 아티스트, 동생은 매니지먼트로 한 팀을 구성해 세계를 누비는 딸들. 그들에겐 한 달 살기만으로는 부족한 여행 본능이 터질 듯 꽉 차 있는 듯하다.

 


 

이기진’S REAL TIP

‘파리 한 달 살이’는 이렇게

파리에 다락방 거처를 둔 만큼 파리지앵 못지않게 파리를 잘 안다.

이기진 교수의 파리 생활 노하우를 요약했다. 핵심 포인트는 ‘관광객처럼 지내지 말기’다.

ⓒShutterstock

 

1. 혼자 떠나라

현지 친구는 함께 놀다가 잠잘 땐 헤어질 수 있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등 동반자는 떼어놓을 수 없다. 그곳에서의 일상을 음미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애초에 혼자 가길 권한다. 여행의 본질은 자유다.

 

2. 먼저 인사하라

한 달 살 곳 정해 놓고도 매일 ‘명소 관광’에 혼을 빼놓고 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본전 생각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일찍 지친다. 도시의 속살은 보지 못한 채 일상이 망가진다. 동네 카페나 레스토랑과 친해지고 이웃을 만들어라. 인사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 무뚝뚝한 편인 파리지앵도 일단 첫인사 후 친해지면 인간적이다. 관광지 투어를 꼭 하고 싶으면 2,3일에 한 곳 정도? 마트나 벼룩시장에서 친구 만드는 것도 권한다. 장보기가 수월해진다.

 

3. 프라이버시 침해는 금물

현지 친구와 이웃이 생기면 훨씬 즐겁다. 하지만 한국식 대화법은 조심해야 한다. 사적인 대화에도 그들만의 선이 있다. 선 넘지 않는 대화법을 염두에 둘 것.

 

4. 뉴스 따위는 잊어라

마음을 온전히 그곳에 두길 권한다. 나를 찾는 여행이니 스스로 고독해져야 한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노트북을 열어놓아야 직성이 풀린다면 한 달 살기 여행은 절반의 성공에도 못 미친다. 특히 뉴스는 보지 않길 권한다. 따지고 보면 나랑 아무 관계도 없는 것들이다.

 

5. 먹을 것 싸들고 다니지 말라

한국 음식점이 많아졌다. 고추장 싸 들고 김치 싸 들고 다닐 필요 없다. 다양한 K-푸드 레스토랑이 생겼으니 편히 즐길 수 있다. 깊은 맛은 여전히 아쉽지만.

 

6. 거점을 잘 선택하라

파리는 엄청나게 큰 도시가 아니다. 한복판이 아니어도 파리를 품에 안기에 어렵지 않다. 걸어서 산책하기 좋은 대표적 도시가 파리다. 에어비앤비를 선택하는 게 합리적인 것 같다. 13, 14구, 15구를 권한다. 에펠탑 근처도 좋다. 샹젤리제는 좋긴 한데 방값이 비싸다. 생드니 지역은 우범지대여서 종종 총기 사건도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