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한 이 ‘물건’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투기부터 최근의 비트코인까지, 단일 품목의 가치 변동이 세계경제를 나락에 빠뜨린다. 반면 이 품목들이 다시 가치를 회복할 때는 그에 편승해 엄청난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이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투자에 대한 분별, 세계경제의 전후 사정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높일 수 있다.

2022-03-03     이영민 에디터

 

 

Gold

  - 개요 : 안전자산 확보 수요가 투기로이어짐.

  - 시기     

     1차 : 1848~1860년(서부개척시대,골드러시)

     2차 : 1973~1980년(대공황 이후,투기의시대)

     3차 : 2008~현재(코로나 골드러시)

선택해야 한다. 

금 본연의 안정성을 믿을 것인가.

정부 관계자의 정직과 지능을 믿을 것인가.

존경하는 여러분께 충고하는 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은

금에 표를 던져라.

- 조지 버나드 쇼 -

서부 개척 시대, 골드러시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강 근처에서 금맥이 발견됐다. 사람들은 황금을 좇아 서부로 몰려들었고, 1만5000명에 불과하던 캘리포니아 인구는 1855년 30만 명으로 불어났다. 6개월 정도 금을 캐면 일반 직장에서 6년 동안 일한 대가와 맞먹는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인들은 채굴 장비 가격을 10배 이상 올려 팔았고, 술집과 도박판만 큰 수익을 올렸다. 사실 1차 골드러시의 실질적 승자는 사업가와 상인이었던 셈이다. 1860년을 전후해 금 매장량도 바닥을 드러내며 골드러시는 끝이 났다.

 

대공황 이후, 투기의 시대

달러 금본위제(중앙은행에 금을 비축해 두고, 비축된 금 가치만큼 화폐를 발행하는 제도)가 1973년 완전히 폐지됐다. 이로써 공식 화폐의 사슬에서 풀려난 금은 날개를 달았다. 특히 금값은 1973년 1차 오일쇼크, 1979년 2차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1980년 1월에는 온스당 850달러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1981년 세계경제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금값이 하락, 무려 25년간 내리막 곡선을 그린다. 특히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이 형성될 때는 아무도 금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성장 기대감이 큰 IT 기업 주식과 비교하면 금은 그저 ‘누런 돌덩이’에 불과했다. 1999년 7월 금값은 온스당 252달러를 기록하며 1980년 이후 최저점을 찍었다.

금본위제와 금 시세는 어떤 관계?

1929년 대공황으로 화폐의 가치는 하락했다. 당시 미국은 금본위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경기를 부양하려면 더 많은 화폐를 찍어내야 했다. 이에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민간의 금 소유를 금지한다. 개인적으로 보유한 모든 금을 은행에 넘기면 화폐로 바꿔주는 식으로 종이 화폐 유통을 늘린 것이다. 이후 미국은 세계경제의 중심이 된다. 달러는 세계 준비통화가 되었고, 세력을 넓히기 위해 동맹국의 재건을 돕는 등 많은 달러를 지출했다. 그럴수록 적자는 심해졌고, 화폐가 더 필요해졌다. 결국 1973년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자유롭게 달러를 찍어 유통한다.

코로나19 골드러시

2000년대 들어 금값은 다시 한번 상승 기류를 탄다. 경제가 혼란해지면서 돈보다는 금을 통해 재산을 보존하려 했기 때문이다. 9·11테러가 일어난 2001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계경제를 위축시킨 2012년까지 금값은 11년간 상승해 온스당 1900달러를 기록했다.

2020년부터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금 수요가 꾸준히 증가, 그해 8월 사상 최초로 온스당 2000달러 고지에 올랐다. 금값이 온스당 3000달러를 돌파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기도 했지만, 코로나19 백신 개발 가능성 등의 얘기가 나오면서 금값이 하락했다. 그럼에도 안전 자산으로서 가치가 증명된 만큼 사실 금을 팔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이아몬드 (Diamond)

  - 개요 : 독점기업의공급량 조절로가격폭등

  - 시기 : 1979년 

드비어스 社

‘드비어스’社의 위험한 장난

1970년대 미국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달러의 가치가 절하되자 다이아몬드의 수요가 늘었다. 1979년 당시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던 기업 드비어스는 공급량을 인위적으로 줄였다. 

막대한 원석을 창고에 쌓아놓고 공급을 통제한 결과 1979년 한 해 동안 1캐럿 최상품 가격은 6000달러에서 6만 달러로 10배나 폭등했다. 투자 광풍이 몰아쳤고, 드비어스는 공급량을 확대해 시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드비어스의 통제를 벗어났고, 시장이 지나치게 과열됐다고 본 은행들은 다이아몬드를 담보로 받지 않았다. 대출이 막히자 사람들은 경쟁하듯 다이아몬드를 팔았고, 1캐럿의 가치는 1년 만에 6000달러로 원상 복귀했다. 그 여파로 드비어스는 광산 하나를 통째로 폐쇄해야 했다.

Episode. 100년 기업의 몰락

2006년 유럽연합(EU)으로부터 다이아몬드 독점이 ‘불공정거래’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받은 이후 드비어스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최근에는 MZ세대의 결혼 기피 현상, 인조 다이아몬드 기술혁신으로 시장이 재편되며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 시장점유율이 30%대로 떨어졌다.


 

은 (Silver)

  - 개요 : 의도적시세조종이시장을 왜곡

  - 시기 : 1979~1980년

윌리엄 헌트(왼쪽)와 넬슨 헌트(오른쪽)

재벌 형제의 은 투기 사건

텍사스 석유 재벌가 출신인 넬슨 헌트와 윌리엄 헌트는 1979~1980년 은을 사들였다. 1973년 미국의 금본위제 해지로 시장이 종이돈 위주로 흘러가자 이를 못 미더워한 나머지 은을 모으기 시작한 것. 헌트 형제의 은 사재기는 5달러였던 은값을 1년 만에 50달러까지 치솟게 했다. 그들은 가치가 치솟은 은을 담보로 다시 돈을 빌려 은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무려 5600톤의 은을 긁어모았다. 이는 세계 공급량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러자 뉴욕상업거래소가 은의 담보 비율을 줄이는 규제를 단행했다. 헌트 형제는 대출 상환을 위해 1억 달러 이상의 은을 매도했고, 이는 은 가격이 더욱 떨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1980년 3월 27일 온스당 은 가격은 하루 만에 40달러에서 15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결과적으로 헌트 형제는 돈을 벌기는커녕 10억 달러 이상을 잃었다. 시세 조종 혐의로 1억 달러가 넘는 벌금도 물었다.

 

원유 (Crude Oil)

개요 : 미국의원유 시장 패권 장악과 코로나19로인한 유가격변

시기 : 2016~현재

석유 생산량을 둘러싼 갈등

1973년과 1979년의 중동발 오일쇼크는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다. 산유국들이 생산량을 줄여 원유 가격을 높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서구 사회는 에너지 비축량이 제한적이라는 인식이 없었기에 세계경제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1991년 발생한 걸프전 역시 석유 생산량을 둘러싼 이라크와 주변 국가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이라크는 주변국이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합의한 내용보다 많은 원유를 생산해 유가가 하락했고, 이로 인해 자국 경제에 손실을 끼쳤다고 주장하며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 셰일오일의 등장

2000년대 들어 미국이 자국 내 매장된 막대한 양의 셰일오일을 채취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세계 원유 시장이 재편됐다. 2010년 하루 100만 배럴을 생산하던 미국의 셰일오일은 2019년 하루 800만 배럴로 생산량이 늘었다. 이에 중동 산유국은 원유 생산량을 대폭 늘리고 가격을 후려치는 ‘치킨 게임’을 벌였고, 국제 유가는 폭락했다. 결국 버티다 못한 중동 산유국들이 생산량을 줄이고, 셰일오일의 성장세는 지속되면서 미국은 2018년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됐다. 

 

팬데믹 시대의 롤러코스터 유가

코로나19로 석유 소비가 줄면서 유가가 폭락했고, 셰일오일업체는 생산량을 줄였다. 그런데 2021년 여름 허리케인 ‘아이다’가 미국 남부 석유 시설을 강타하고, 겨울에는 강추위로 시설 가동이 중단되면서 원유 공급량이 턱없이 부족해져 유가가 다시 폭등했다. 이처럼 원유 시장이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다 보니 투자자 이탈이 빨라졌다. 원유는 더 이상 안정적 수익을 보장하는 자산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탄소중립을 강조하는 만큼 원유보다 다른 성장산업에 투자가 몰린 것도 영향을 미쳤다. 투자가 정체되니 셰일오일업체도 증산을 꺼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팔라듐 (Palladium)

  - 개요 : 러시아의재고 조작, 디젤 차량 기피가 팔라듐 수요로 이어짐.

  - 시기

     1차 2001년

     2차 2015년~현재

배기가스 규제 바람 타고 폭등

팔라듐 소비의 85%는 자동차 매연 저감 장치에 쓰인다. 팔라듐 가격은 1990년대 말 자동차 촉매 개발로 상승하기 시작해 2001년 온스당 1100달러까지 치솟았다. 당시 금 가격은 300달러 미만이었다. 팔라듐 가격 상승 요인은 주요 생산국인 러시아가 전략적으로 재고를 비축하는 등 팔라듐 가격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수출을 늘리자 가격은 2003년 150달러로 하락했다. 이후 오르내림을 반복하던 팔라듐 가격은 2015년 ‘폭스바겐 사태’(기준치를 초과하는 디젤 배기가스 배출량 결과를 조작한 사건)를 기점으로 다시 폭등해 2019년 1500달러를 웃돌며 백금과 금값을 추월했다. 디젤 차량 기피 현상이 휘발유 차량용 촉매인 팔라듐 수요 전망을 높여 가격을 끌어올린 것이다.

필라듐 원석

 

희토류 (Rare-Earth Element)

  - 개요 : 중국의독점·통제에인한 희소성으로가격폭등

  - 시기 : 2009~2011년

가격은 엿장수 마음대로

세계 희토류 공급의 97%를 차지하는 중국은 2010년부터 희토 자원 보존 및 환경보호 등을 이유로 희토류 생산량을 제한했다. 이로 인해 2009~2011년 희토류 가격은 10배 이상 급등했다. 하지만 2011년 북미와 호주 등이 희토류 개발에 나서고 대체물질 연구가 진행되면서 급격한 하락세로 돌아섰다. 품목에 따라서는 최고 50% 정도 가격이 떨어지는 등 거품이 빠진 것. 

중국은 희토류 가격이 떨어지자 북부와 남부의 대표적 희토류 회사의 가동을 중단했다. 공급량을 줄여 가격 상승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지한 투기 세력이 한꺼번에 발을 뺀 데다 순식간에 거품이 빠지면서 가격은 계속 떨어졌다.


 

비트코인 (Bitcoin)

  - 개요 : 새로운 재테크 수단의 등장으로 투기 세력 결집

  - 시기 : 2017~현재

투기일까, 투자일까?

2009년 최초의 암호화폐 비트코인이 등장했다. 개당 1000달러도 되지 않던 비트코인의 가치는 2017년 2만 달러 이상 폭등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에는 가치가 거의 80%나 폭락했다. 그야말로 ‘널뛰기’라는 표현이 제격인 상황으로 비트코인의 미래 전망은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비관론 : 화폐로서 기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비트코인에 대한 의견은 두 가지로 엇갈린다. 비트코인은 대략 10분에 하나씩 채굴을 통해 추가되는데, 이는 전통적 화폐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가치를 추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안정적 교환 수단이라는 기본 역할은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또 비트코인을 사고 보유하는 기술을 이해하기 어려워 지갑-서비스 중개자 등 제삼자에게 그 과정을 맡기는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이들 제삼자에게 해킹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건 가장 큰 불안 요소다.

 

낙관론 : 블록체인 기술이 발전하면 자리 잡는다

블록체인 기술의 응용이 아직 초기 단계이기에 10년 정도는 기다려야 비트코인의 가치가 자리 잡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애플 공동 설립자 스티브 워즈니악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10년 내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고, 트위터 CEO 잭 도시도 “비트코인이 세계의 단일 통화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JP모건 체이스 CEO 제이미 다이먼은 “비트코인은 사기다”라고 말해 왔지만, 이내 자신의 말을 철회하고 암호화폐 거래 데스크를 설치했다.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비트코인 가격 변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가 2020년 12월 20일 “생산적 삶을 위해 비트코인 투자를 참고 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자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한 것. 지금도 그의 말 한마디에 비트코인은 폭등과 폭락을 반복하며 투자자, 투기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