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문유석이 글을 쓰는 이유
2017년 초 한 일간지에 실린 칼럼이 젊은 직장인 사이에 회자되며 SNS에 관련 글이 도배될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다.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유머러스하지만 4050 세대에 일침을 가하는 글이었다. 문유석 부장판사는 “스스로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사회인으로 살고 싶어” 이 글을 썼다고 말한다.
얼마 전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라는 칼럼이 큰 이슈가 되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제목은 심히 비장해 보이지만, 그리 야심 찬 글은 아니었다. 신년을 맞아 동료와 선배들에게 농도 좀 섞어가며 ‘우리 올해는 좀 조심하자고요’라는 의미를 담은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니, 이게 뭐라고…’ 하는 생각이 들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내 글이 많은 공감을 사고 있다는 것 자체에 씁쓸해졌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직도 멀었구나 싶어서.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해도 본인은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전국의 부장님들께…’ 칼럼을 한번 읽어보고 울컥하는지, 킥킥 웃음이 나오는지 스스로 테스트해보길 바란다. 당뇨병 검사 받는다고 생각하고.
저녁 회식 하지 마라.
젊은 직원들도 밥 먹고 술 먹을 돈 있다. 친구도 있다. 없는 건 당신이 뺏고 있는 시간뿐이다. 할 얘기 있으면 업무시간에 해라. 괜히 술잔주며 ‘우리가 남이가’ 하지 마라. 남이다.
존중해라.
밥 먹으면서 소화 안 되게 ‘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자유롭게들 해 봐’ 하지 마라. 자유로운 관계 아닌 거 서로 알잖나. 필요하면 구체적인 질문을 해라.
젊은 세대와 어울리고 싶다며 당신이 인사고과하는 이들과 친해지려 하지 마라.
당신을 동네 아저씨로 무심히 보는 문화센터나 인터넷 동호회의 젊은이를 찾아봐라. 뭘 자꾸 하려고만 하지 말고 힘을 가진 사람은 뭔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뭔가를 할 수도 있다는 점도 명심해라.
부하 직원의 실수를 발견하면 알려주되 잔소리는 덧붙이지 마라.
당신이 실수를 발견한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위축돼 있다. 실수가 반복되면 정식으로 지적하되 실수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인격에 대해 얘기하지 마라. 상사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처음부터 찰떡같이 말하면 될 것을 굳이 개떡같이 말해 놓고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니 이 무슨 개떡 같은 소리란 말인가.
술자리에서 여직원을 은근슬쩍 만지고는 술 핑계 대지 마라.
취해서 사장 뺨 때린 전과가 있다면 인정한다. 굳이 미모의 직원 집에 데려다 준다고 나서지 마라. 요즘 카카오택시 잘만 온다. 부하 여직원의 상사에 대한 의례적 미소를 곡해하지 마라. 그게 정 어려우면 <도깨비> 속 공유, 이동욱을 유심히 본 후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는 요법을 추천한다. 내 인생에 이런 감정이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용기 내지 마라. 제발, 제발 용기 내지 마라.
‘내가 누군 줄 알아’ 하지 마라.
자아는 스스로 탐구해라. ‘우리 때는 말야’ 하지 마라. 당신 때였으니까 그 학점 그 스펙으로 취업한 거다. 정초부터 가혹한 소리 한다고 투덜대지 마라. 아프니까 갱년기다. 무엇보다 아직 아무것도 망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하려면 이미 뭔가를 망치고 있는 이들에게 해라. 꼰대질은, 꼰대들에게.
- 2017년 1월 10일자 <중앙일보>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 중
왜 ‘부장님(으로 대변되는 4050 남성)’들은 꼰대가 될까?
나도 그 꼰대 중 한 명이라 자문자답할 수밖에 없겠다. 어느새 쥐꼬리만 한 권력이 생겼기 때문 아닐까. 주변에서 ‘오냐오냐’, ‘어화둥둥’ 해주니까 정말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응석부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가 야단 치지 않으면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인간의 본능 같다. 대학 2학년이 신입생들한테 군기 잡고 꼰대질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그렇다면 꼰대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의 어른’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굳이 ‘사회의 어른’ 같은 거창한 사람이 되려고 생각한 적 없다. 그런 능력도 없고. 나도 그저 ‘타인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것도 꽤나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다.
‘행복한 삶’이란 어떤 삶이라고 생각하나?
‘행복한 삶이 뭘까, 굳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삶’이라면 답이 될까? 정말 그렇다.
대한민국의 중년 남성은 한 가정의 가장이자 남편, 아버지, 또 누군가의 아들, 회사의 부장 등 다양한 사회적 역할이 주어진다. 한 개인으로서 행복해지기란 쉽지 않다.
다 잘하려 하지 말고 그중에 포기할 건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주제 파악을 정확히 해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해 말, 일반직 인사로 한 해 같이 일한 세 명이 떠났다. 파스타집에서 점심을 먹고 이런 날이라고 특별한 말 하는 건 그렇고 이걸로 작별합시다 했다. 그런데 이들이 찾아왔다. 나와 근무하며 좋았단다.
한 명은 내 낡은 법복과 넥타이를 나 몰래 드라이클리닝한 후 갖다 놓았다. 다시 같이 일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단다.
궁금했다. 대체 왜? 실수해도 혼내지 않으셔서 좋았어요. 글쎄다. 내 편의를 위한 거였다. 법원 일은 실수하면 큰일이다. 그런데 실수를 숨기면 더 큰일이다. 바로 얘기하면 고칠 수 있다. 부모가 엄하면 애들은 매사에 숨기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다. 업무 지시 때 이유도 설명해 주셔서 좋았어요. 마찬가지다. 그러지 않아도 바쁜데 서로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다. 업무 일정을 함께 협의하니 휴가 계획 미리 세울 수 있어 좋았어요. 그래야 나도 결재 부담 없이 여행 가지. 달랑 이걸로 좋아들 한다. 깨달았다. 내가 이 관계에서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자제함으로써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 힘, 그건 권력이다.
- 2017년 1월 31일자 <중앙일보> ‘부장님들께 원래 드리려던 말씀’ 중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이들도 외향적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행복을 느끼는 체질인 것이다. 미각이 지나치게 예민해 강한 맛의 음식에는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이런 차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조건 집단이 요구하는 술 잘 먹고 윗분 잘 모시고 분위기 잘 띄우는 씩씩한 전사로 거듭날 것을 강요하는, 그래야 어른 되었다고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배려하는 성숙한 개인주의 문화의 사회라면 이들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집단의 강요 없이,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취향이 맞는 작은 인간관계의 고리 속에서 말이다.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 ‘행복도 과학이다’ 중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냥 노는 거다. 나에게 글쓰기란 TV 예능 프로그램 시청보다는 재미없지만 영양가 없는 술자리에 앉아 관심 없는 이야기에 맞장구쳐주는 것보다는 100배쯤 재미있는 놀이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 글을 쓴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저 단체 채팅방에서 수다 떨기 같은? 단지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그 상대일 뿐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일상을 공개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나?
관심 가지는 건 사람들의 자유이고,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가는 내 자유다. 각자 알아서 하면 될 것이다. 원치 않는 관심에 응답해야 할 의무감까지는 못 느낀다.
<판사유감>이나 <개인주의자>같은 에세이집을 냈고, 지난해에는 <미스 함무라비>라는 소설도 썼다. 앞으로 또 쓰고 싶은 책이 있는지?
미리 계획해서 쓴 것들이 아니다. 늘 그래왔듯, 앞으로도 그냥 그 시점에 가장 ‘꽂히는’ 것에 대해 쓸 것 같다. 그게 무엇이든 미리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스 함무라비>를 쓰면서 “관습적인 것의 불편함을 깨달았고 누군가 곁에서 일깨워주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라고 했는데, 그 목소리는 과연 누구라고 생각하나?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게 객관적일 수가 없다. 내게 행운이라면 주변에 까칠하게 잔소리해 줄 이들이 꽤 있다는 점이다.
중년 남성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쉽고 재미있는 데다가 짧기까지 한 책이 있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이다. 행복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책인데,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굳이 ‘사회의 어른’ 같은 거창한 사람이
되려고 생각한 적 없다.
그런 능력도 없고.
나도 그저 '타인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현재 페이스북 구독자 수가 상당하다. SNS를 즐기는 이유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었던 알렉스 퍼거슨 경이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낭비 안 하고 모으면 또 무엇에 쓰겠는가. 대단하게 쓸 곳이 딱히 있지 않다면 어차피 어딘가에는 낭비하게 될 것이다. 이왕이면 각자 자기가 재미있는 곳에 하면 좋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지 않을까. 게다가 내 경우엔 실리도 있다. 책 홍보가 되니까.(웃음)
결국 재미있어서 쓰는 것 같다. 아마 나와 같은 이유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나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는 데서 큰 재미를 느낀다. MRI 같은 거다.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소재)에 대해 내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글을 써봐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적어둔 글을 나중에 읽는 재미가 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이 더해지면 더 재미있다.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MRI에 ‘뽀샵’을 하고 싶은 욕구가 앞설 때쯤 글쓰기를 집어치워야 할 시기일 듯하다.
-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 ‘인정 투쟁의 소용돌이, SNS’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