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시대, <시대예보: 호명사회> 송길영 작가 ①
나이는 무색하고 직책은 의미 없는 시대를 백세까지 살아야 한다. 빅데이터 전문가이자, '시대예보' 시리즈의 저자 송길영 작가는 이 변화를 '호명 사회'라 지칭한다.
지난 해, 송길영 작가는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출간하며 권위주의 기반의 공동체 중심 시대가 저물고 자립한 핵개인들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선언했다. 그런 그가 이번엔 ‘호명 사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대를 예보했다. 직책이나 나이 등 구시대적 기준을 내려놓고, 개개인의 정체성을 갖춰 서로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시대라는 의미다.
송길영
· 작가
2015년, 2021년에 이어 세 번째로 덴과 조우한다. 2015년 인터뷰 당시, “내 소원은 명함에 아무것도 넣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소원을 이뤘다고 볼 수 있나?
그런 말을 했었나.(웃음) 실제로 지금 명함엔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연락처만 들어있다. 의지가 있으면 결국은 이뤄내는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두렵다. 내 이름을 걸고 10년 전에 한 말이 지금과 맞지 않으면 자기 부정을 하는 게 아닌가. 새삼 신중하게 말하고, 조심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인터뷰 기준으로만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스스로를 중년으로 구분하나?
대중에 물어봤을 때, ‘중년’을 몇 살이라고 정의하는 줄 아나? 본인 나이에 열 살을 더하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적어도 본인은 아니라는 얘기다.(웃음) ‘중년’이라는 단어 자체가 쇠함의 이미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스스로 나이를 인식하지 않고 살고 있는 듯하다.
‘나이가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나이를 정하면 상대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그냥 이렇게 잊고 사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도 나이를 잘 모른다. 지난 20년간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내 나이를 다 넣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구글에 내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에 ‘나이’가 나온다. 그런데 경험 상 나이는 안 밝히는 게 훨씬 유리하다. 많든 적든 선입견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주변 관계를 제거한 본인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타인을 마주했을 때 “어떤 공부를 하세요?”와 같은 대화가 나오는 게 좋지, “몇 살이세요?”라고 묻는 순간 그 사람 주변의 부수적인 정보에 집착하며 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새삼 ‘몇 살이냐’는 질문이 참 ‘한국스럽게’ 느껴진다
맞다. 심지어 ‘빠른 80’ 같은 표현도 있지 않나.(웃음) 나이에 대한 집착은 한편으론 관습적인 행동이다. 나이를 고려하니 상대에게 그만큼의 관계성을 요구하게 된다. 예전에는 회사에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묻곤 했다. 이말인 즉슨 당신과 나 사이엔 큰 세월의 차이가 있으니, 내가 당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뉘앙스가 들어있기도 한 것이다. 이는 사실 구시대의 가치관에서 비롯한 흔적 같은 것이다. 그때는 옳았어도 지금은 틀릴 수 있는 것들을 당연한 듯 반복하면 새로운 세대 사람들과 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다.
앞으로는 사회에서 서로를 어떻게 지칭하게 될까?
평등한 관계를 위해서 서로가 직책과 나이를 배제하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살아야 한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신지영 교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전세계 207개 언어를 조사해 보니 한국어를 포함한 7개 언어만 2인칭 대명사를 호칭으로 못 쓴다고 한다. 영어는 '유(You)'라고 부른다. 한국어는 '너'라고 부르면 안 된다. 이는 싸우자는 얘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언어들은 호칭에 직함이나 관계가 들어간다. 원장님, 또는 형님 같은 것들 말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나 상하관계가 형성되어 평등성이 배제된다. 우리 사회가 서로 간에 평등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라고 교수님은 설명한다.
이제는 각자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대다. ‘핵개인’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를 직책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호명사회’가 오고 있다.
과거에는 관습에 대한 추종 내지는 관행이 삶을 지배했다.
삶이 이끄는 대로 ‘나’는 따라가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는 한 편으로는 잘 따라가기만 해도 되었기에
인생의 선택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개인의 이름으로 산다는 의미는, 주체적으로 산다는 장점과 책임질 것이 많다는 단점이 공존하는 듯하다
그렇다. 각자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만큼 경쟁은 심화되고 이전에는 없었던 소외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 시대엔 ‘김부장’이 힘들다. 보통 조직에는 '사수'라는 말이 있지 않나. 과거에는 조직에 들어가면 내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배를 따라가면 됐다.
시키는 것만 하며 살아온 이들이, 지금의 사회를 마주하면 억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이제라도 누군가 뭘 시키면 그걸 해야되는 건지, 옳은 건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억울한 감정만 느끼며 시대의 흐름과 멀어지게 된다.
이름으로, 즉 주체적으로 사는 방법이 뭔가?
결국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시도해봐야 한다. 나도 30년간 직장 생활하다가 지금 작가로 살고있지 않나. 물론 책을 써온 건 13년이 넘었지만, 전업 작가로는 1년 차에 불과하다. 어떠한 낯섦, 약간의 불안함과 그에 따르는 흥분이 즐겁다. 또 젊은 나이에 작가의 삶을 시작하고 오래 활동한 이들과 교류하는 것도 너무 즐겁다. 다시 프레시맨으로 돌아간 셈이다. 과거에는 이런 새로운 기회라는 건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었다. 이젠 누구에게나 이런 기회가 온다. 오래 살기 때문이다.
AI가 등장한 이후로 기존에 알던 시대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진 모양새다
생산 도구가 바뀐 영향이 크다. 기존엔 8시간 매장에서 근무하는 대가로 근무자에게 금액을 지불했다. 지금은 AI와 로봇 등 무인 시스템이 도입하면서 생산 프로세스가 달라졌다. 생산이 바뀌면 분배도 바뀌기 마련이다. 고용을 하지 않으니 보상을 할 대상이 없어진 거다. 소비는 가속화되는 시대에 생산 기여도가 줄어들고 있다. 이런 변화가 급격하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거다.
단순한 보조자가 필요한 일이라면 AI가 할 수 있는 시대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넘어, 스스로 전문성을 쌓아가야 한다.
전문성이라는 건 지식만큼이나 경험도 필요하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얕은 수준의 지식과 경험부터 익힐 텐데, 한편으론 새로운 도전이 어려운 시기인 셈인가?
그렇다. 일단 지식은 암묵지와 명시지로 구분할 수 있다. 암묵지는 개인에게 체화(體化)되어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흔히 '감'이라고 표현하는, 경험으로 얻는 지식이다. 과거엔 전문가의 수습생으로 일하는 도제(徒弟) 시스템이 일반적이었다. 전문가의 일을 도우며 암묵지를 익히고 성장해 나갔다.
최근엔 생성형 AI와 많은 IoT 시스템들이 이런 암묵지 영역의 작업도 어느 정도 수행하기 시작했다. 기술이 많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전문가 입장에선 적은 인원의 도움으로도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전문가 입장에선 기술의 도움으로 더 많은 일을 수행할 수 있기에 호재로 볼 수 있다. 다만, 일을 새로 배우려는 사람에겐 업계로 오를 사다리가 끊기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전문가의 영역에 들어서지 않은 이들에겐 절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예전에 비하면 유입이 늘어 경쟁이 더 치열해진 건 맞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쓸데없는 일이 없어진 거다. 쓸데없이 문서를 만드는 것처럼, 의미없는 노동이 얼마나 많았나. 이젠 기술의 도움으로 의미 없는 일을 줄일 수 있다. 일의 밀도가 올라간 셈이다.
2부에서 계속..
"중년은 다음 스테이지를 위한 출발점이다" <시대예보: 호명사회> 송길영 작가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