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부터 스릴러까지,
‘어맨다 사이프리드’라는 서사

2025-05-26     윤여수(맥스무비 기자)

커다란 눈망울이 순수한 ‘소피’, 포르노 배우 ‘린다’, 강렬한 눈빛의 오페라 감독 ‘제닌’까지. 아름다운 외모 뒤에 감춰진 어맨다 사이프리드의 진정한 매력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유연함’이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 안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해 왔다.

ⓒalamy

<맘마미아!>에서 청아한 음색을 통해 알린 존재감

“내겐 꿈이 있어요 / 부를 노래도 있죠 /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줄 / 동화 같은 기적을 믿는다면 / 당신에겐 미래가 있어요 / 당신이 실패하더라도 / 난 천사를 믿어요.” 

‘I Have a Dream’은 세계적 인기를 모은 아바의 1970년대 마지막 히트곡이다. 아바가 자신들의 한 시대를 마감하며 내놓은 이 노래가, 어느 배우에게는 자신의 진정한 연기 인생을 시작하게 된 곡으로 남아 있다. 

무대는 2008년 필리다 로이드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맘마미아!>다. 1999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이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공연물로 자리 잡은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뮤지컬은 그룹 아바가 선보인 21곡의 노래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여전히 수많은 관객을 끌어 모은다.

<맘마미아!>는 메릴 스트립과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스텔란 스카스가드, 도미닉 쿠퍼, 줄리 월터스 등 쟁쟁한 베테랑 연기자가 그리스의 작은 섬 칼로카이리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로맨틱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한 젊은 배우가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큰 눈망울을 안고 간절한 희망의 노래를 했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다. 소피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연기한 그는 아바의 노래를 통해 로맨스의 감성을 한껏 발산하며 관객의 시선과 귀를 간질인다. 

<맘마미아!> 스틸컷 ⓒalamy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맘마미아!>를 통해 진정한 배우로 발돋움했다. ⓒalamy

특히 이제 스무 살의 아름다운 숙녀로 자란 소피가 약혼자와 함께 사랑을 속삭이며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헤쳐 나가려는 모습은 많은 관객의 추억에 각인됐다. 이때 부른 노래가 바로 ‘I Have a Dream’이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이 노래를 <맘마미아!>의 오디션에서 불렀다. 또 엄마 역 메릴 스트립과 함께 입을 맞춰 ‘Slipping Through My Fingers’를 부르며 애틋한 모녀지간의 정을 나누는 장면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노래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맑고 순수한 목소리뿐 아니라 극 중 캐릭터인 소피에 완전히 동화된 모습으로 때론 따스하고 맑은 목소리로, 때론 폭발적으로 자신의 희망을 표출할 줄 아는 청춘의 강렬한 음성으로 관객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이는 어쩌면 열한 살 때인 1996년 모델로 데뷔해 활동한 ‘끼’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딸이 연기 오디션을 볼 때마다 직접 상대역이 되어 대본 연습을 이끌어주기도 했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그런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족과 함께 뉴욕 브로드웨이의 극장을 찾아 뮤지컬을 관람했고, 2000년대 초반에는 브로드웨이 출신 뮤지컬 감독에게 노래를 배우기도 했다. 이 같은 과정이 없었다면 <맘마미아!> 속 소피는 그의 몫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준비된’ 배우였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맘마미아!>에 앞서 2004년 린지 로언과 레이철 매캐덤스가 주연한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으로 데뷔하며 관객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동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케이디’(린지 로언)'가 한 고등학교에 전학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통해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당대의 톱스타 린지 로언을 뛰어넘는 인기를 얻으며 일약 차세대 할리우드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영화의 장르적 속성상 어맨다 사이프리드가 지닌 잠재적 역량을 내다보는 시선은 많지 않았다. 되레 ‘새로운 청춘스타의 발견’ 정도에 그칠 수 있었던 셈이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 스틸컷 ⓒalamy

그때 찾아온 무대가 바로 영화 <맘마미아!>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자신의 재능을 모두 토해 내듯 아바의 노래를 청아한 음색으로 재해석하며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도전으로 필모그래피를 탄탄하게 쌓아 올리다

이듬해 선보인 애텀 이고이언 감독의 영화 <클로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어맨다 사이프리드가 배우로서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극 중 단란한 일상이 언젠가부터 자꾸만 무너져가는 것을 느끼는 ‘캐서린’(줄리앤 무어)에게 그의 교수 남편을 시험 삼아 유혹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 ‘클로이’를 연기했다. 영화는 그 과정에서 캐서린과 클로이가 쌓아가는 미묘한 관계의 단층을 그려간다. 클로이는 치명적인 미모와 매력을 무기 삼아 캐서린과 그의 남편 데이비드(리엄 니슨)에게 다가가는데, 이를 표현하는 어맨다 사이프리드의 눈빛에서 어딘가 섬찟하면서도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한껏 엿보였다. 평단의 호평이 쏟아졌고,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자신이 펼쳐 보일 연기 스펙트럼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2012년 또 다른 뮤지컬 영화를 만난다.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레미제라블>이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휴 잭맨)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 운명적으로 만난 여인 ‘판틴’(앤 해서웨이)의 딸 ‘코제트’가 그가 선택한 새로운 캐릭터였다. 

<레미제라블> 스틸컷 ⓒalamy

극 중 장발장의 보호 속에 착한 아가씨로 자란 코제트는 우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든 청년 ‘마리우스’를 만나 사랑을 싹틔운다. <맘마미아!>에서 드러낸 맑고 깨끗한 목소리와 청순한 표정은 그를 마치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로 보이게 했다. 자신의 사랑 마리우스를 향한 애절하고도 순수한 눈빛은 맑고 깊은 아름다운 음성으로 표출됐고. 적지 않은 관객이 <맘마미아!> 1편과 2편보다 더욱 청아하고 깊어진 어맨다 사이프리드의 감성에 박수를 보냈다. 여전했던 노래 실력은 촬영과 함께 진행된 뮤지컬 넘버의 동시녹음 환경에서도 빛을 발하며 또 한번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2013년에는 ‘파격’을 선택했다. 영화 <러브레이스>다. 영화 <목구멍 깊숙이>로 잘 알려진 미국 포르노 스타 러브 레이스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파격적인 캐릭터는 물론 과감히 노출 신까지 소화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러브레이스> 포스터 ⓒalamy

그는 2016년 세계적인 패션지 <보그> 인터뷰를 통해 <러브레이스>를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자랑스러운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이미 <클로이>를 통해 과시한 강렬함으로 <러브레이스>가 안겨줄 수 있었던 편견과 선입견을 이겨내고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바탕이 되어준 덕분이다.

 

연기에 진심인 배우

<레미제라블> 속 코제트가 마주하는 장발장처럼, 어맨다 사이프리드에게 운명의 무대가 찾아 들었다. 2020년 할리우드의 명장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맹크>다. 세계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고전영화 <시민 케인>의 각본을 쓴 작가 허먼 J. 맹키위츠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에서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극 중 20세기 초 미국 신문업계를 뒤흔들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여인이자 배우 매리언 데이비스를 연기했다.

“사람들은 잡지 표지만 보고 날 안다고 생각한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맹크>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모델로 활동하며 일찌감치 연기자가 된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에 담긴 편견과 선입견을 이처럼 꼬집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는 이미 다양한 작품을 거치며 다채로운 매력을 과시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맹크> 속 그의 대사는 배우로서 여전히 꿈과 야망을 품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 아닐까. 실제 자신처럼 극 중 배우인 캐릭터를 통해 온 세상에 자신이 나아갈 길이 여전히 넓다는 사실을 공표한 것일 수 있겠다.

이를 보여주듯,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맹크> 속 매리언 데이비스 역을 통해 2021년 미국 아카데미상을 겨냥했다. 결국 그는 제93회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맹크> 스틸컷 ⓒalamy

그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는 영화 <미나리>의 한국 배우 윤여정 역시 노미네이트되어 국내에서 큰 화제였다. 알다시피 트로피의 주인공은 윤여정이었다. 하지만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실망하지 않았고, 윤여정에게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맹크> 기용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고 고백했다. 세계적인 명감독과 작업할 수 있다고, 전작에서보다 더욱 깊은 감성과 강렬함을 표현할 무대를 만날 수 있게 된 상황을 맞닥뜨린 배우가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배우로서 자신의 온당하고 자연스러운 욕망에 충실할 줄 알았다.

 

완숙한 배우로 발돋움하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수상이라는 큰 성과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듬해 열린 전 세계 최고 권위의 방송상인 에미상과 골든글로브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훌루의 오리지널 시리즈 <드롭아웃>의 주연으로서 그는 에미상과 골든글로브의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드롭아웃>은 미국 최첨단 기술력이 총집결하는 실리콘밸리 사상 가장 큰 추문으로 불리는, 의료 기술 표방 기업 테라노스의 CEO 엘리자베스 홈스의 야망과 몰락을 그린 드라마다. 테라노스는 2003년 극소량의 혈액으로 250여 개 질병을 검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거짓 논란에 휩싸이며 미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드롭아웃> 스틸컷 ⓒalamy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성공을 향한 욕망으로 들끓는 내면 속 인간적 면모와 고뇌를 연기하며 섬세한 연기력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강렬한 야망을 그려가듯 채도 높은 빨간 립스틱은 극 중 어맨다 사이프러스가 표출하는 엘리자베스 홈스의 야망과 불안한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를 통해 이제 완숙한 배우로서 힘을 갖췄다는 사실을 선포한 셈이었다. 

그런 그의 진면목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무대는 또 있다. 지난 5월 14일부터 국내 관객을 만나고 있는 영화 <세븐 베일즈>다. 자기의 연기 스펙트럼이 예사롭지 않음을 과시한 주연작 <클로이>의 애텀 이고이언 감독과 다시 한번 의기투합한 작품이기도 하다.

<세븐 베일즈> 포스터 ⓒalamy

<세븐 베일즈>는 오페라 감독 ‘제닌’이 스승의 유언을 따라 그의 대표작 ‘살로메’를 새로 연출하면서 과거의 트라우마와 비밀을 마주하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다. ‘살로메’ 출연진과 제작진이 제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채, 그는 자신을 짓눌러 온 과거와 대면하게 된다.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이전과 또 다른 카리스마와 강렬한 눈빛을 뿜어낸다. 14년 전 <클로이>에서처럼 그는 연출자 애텀 이고이언 감독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쓴 각본에 충실한 연기로 힘을 발휘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배우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그만큼 새로운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배우라는 사실을 입증해 왔다. 로맨스부터 뮤지컬, 스릴러 등 다채로운 장르와 이야기를 관객과 나누는 데 주저 없이 나아갈 줄 알았다.

그는 평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처럼 거침없는 태도를 드러내 왔다. 다소 지나친 면도 없지 않아 작은 구설에 오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 같은 모습이야말로 자기 스스로 강한 개성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괴짜’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런 면모 역시 그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에 결코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여전히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곧 제작에 들어갈 주연 영화 <더 하우스메이드>가 새로이 기대를 모으는 까닭이기도 하다. 영화 <맘마미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노래 ‘I Have a Dream’을 그가 부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