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키는 파수꾼,
백종우 교수 [Den이 만난 명의]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사회, 백종우 교수가 정신건강 인식과 제도 개선에 앞장서는 이유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2001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의학석사, 2007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미국 듀크대학교에서 방문교수를 지냈으며, 2007년부터 현재까지 경희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트라우마 분야의 다학제 전문 학회인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3대 회장, 보건복지부 중앙자살예방센터장과 중앙심리부검센터장을 역임했다. 현재 국회자살예방포럼 자문위원장, 2024년부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신경정신의학 정책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 사망률 1위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매년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남겨진 가족과 친구는 또 다른 고통 속에 살아간다. 특히 지난해에는 40대 사망 원인 중 자살이 처음으로 암을 제치고 1위에 오르며 사회 전반의 경각심을 다시금 일깨웠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여전히 많은 이의 발걸음을 진료실 문 앞에 멈춰 세운다. 그러나 편견에 가로막혀 제때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면,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쳐 버리고 만다. 환자가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백종우 교수는 경희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신경정신의학 정책연구소장으로, 정신과 진료에 대한 심리적 허들을 허물고 누구나 마음의 문제를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 왔다. 특히 2012년 고(故) 임세원 교수, 서울대학교 김재원 교수와 함께 약 700만 명이 수료한 한국자살예방협회의 한국형 표준 자살 예방 교육 프로그램 ‘보고 듣고 말하기’ 개발간사로 참여해 생명을 지키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다.
우울증과 트라우마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임상에서 만나면서 진료실 안에만 머물러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은 후에는 사회정신의학자로서 사회에 목소리를 내왔다. 중증 정신질환자와 가족, 사회적 재난 피해자, 천안함 생존 장병, 자살 유가족을 만나 관련 연구와 정책개발에 참여했고, 자살 고위험군에 관한 사례 관리 임상 연구, 코로나19 등 감염 재난 정신건강 솔루션 개발, 인공지능을 통한 자살·자해 예방 등 국책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핵가족화가 정착되고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시대, 백종우 교수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계기로 정신과 의사의 길을 걷게 됐나?
학부 시절부터 정신과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는 ‘정신과’ 하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프로이트 전집을 찾아 읽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나와는 잘 맞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다. 인간 내면의 욕망을 분석적으로 파고들기보다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공감하는 일이 내게 더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실습과 인턴 과정을 거치며 원서를 제출하기 며칠 전까지도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정신과 전공의 중 교육 치프를 맡고 계시던 함병주 교수님이 전공을 정했냐고 물으시길래 아직 고민 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럼 정신과 해야겠네” 하시더라. 이유를 여쭤보니 “정신과는 고민하는 과다. 아직까지 고민하고 있다면 정신과로 와야 한다”라고 하셨다.(웃음)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일도 적성에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신과를 선택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신과를 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정신과는 심리적 허들이 높은 분과다. 처음 내원한 환자를 대할 때 특히 신경 쓰는 점이 있다면?
지금은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존재한다. 실제로 처음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 중에는 방문 자체를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대개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볼까’, ‘정신과에 간다고 비난하지 않을까’,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같은 걱정을 안고 병원을 찾는다. 그래서 첫 진료에서 이런 불안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첫 진료를 시작할 때 “오늘 잘 오셨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높은 문턱을 넘어 한 걸음 내딛은 것 자체가 용기 있는 결정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다.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를 집필한 이유도 그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였나?
그렇다. 정신건강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때 용기를 내 문제를 드러내고 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편견에 가로막혀 제때 도움을 받지 못하면 안타까운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기에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가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의 역할과 책임이 더욱 중요하다. 그 첫걸음 앞에 서는 책임감을 담아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를 집필했다.
책 제목에서부터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전공의 1년 차 때, 10일간 당직을 선 적이 있다. 당시 2년 차 전공의였던 임세원 교수를 따라다니다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처음으로 혼자 응급실에 가서 한 환자를 보게 되었다. 그 환자는 굉장히 혼란한 상태였다. 극도로 불안해 보였고,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배우자조차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결국 내용을 충분히 채우지 못한 채 보고를 했더니, 임세원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이 환자에게 너는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시 그 환자는 입원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며칠째 응급실에 머물고 있었다. 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환자 곁을 지키며 계속 설득했고, 약을 복용하도록 도왔다. 3일째 되던 날 환자는 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 퇴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고 1년 후, 그 환자가 다시 병원을 찾아왔다. 당시 극심한 혼란 속에서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응급실에서 보낸 3일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이후 정신과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고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이때의 경험은 정신과를 찾아온 환자에게 처음 만나는 의사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주었다. 환자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볼 때 의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환자의 회복을 지켜보는 일이 가장 큰 보람이라면, 반대로 환자를 잃는 순간은 의사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경험일 것 같다
정신과 의사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환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다. 이는 정신과 의사라면 피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나도 지금까지 약 14명의 환자를 자살로 잃었다. 27년간의 진료 경력을 돌아보면 평균 2년에 한 번꼴로 슬픈 소식을 접한 셈이다. 물론 전체 환자 수에 비하면 적은 비율이지만, 그 경험이 주는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이후 다른 환자를 대할 때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경험이 ‘보고 듣고 말하기’라는 한국형 표준 자살 예방 교육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진 것인가?
그렇다. 사실 자살에는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우울증이 극심할 때는 죽을 의욕조차 없지만, 오히려 상태가 호전되는 과정에서 그 위험이 높아진다. 그래서 치료 도중이 아니라 퇴원 후나 외래 치료가 중단된 후 뒤늦게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살로 환자를 잃으며 정신과 의사인 나조차 자살의 경고 신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환자가 보낸 마지막 신호를 놓쳤다는 죄책감은 깊은 슬픔으로 남았다. 이 아픈 경험을 계기로 2011년부터 2년에 걸쳐 ‘보고 듣고 말하기’라는 한국형 자살 예방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오강섭 성균관대학교 교수님이 개발위원장을 맡고, 임세원 교수, 김재원 서울대학교 교수, 그리고 내가 개발간사로 참여해 여러 위원과 함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보고 듣고 말하기’는 어떤 프로그램인가?
자살 위험 대상자를 조기에 발견해 전문가에게 연계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1단계(보기)는 자살을 암시하는 언어·행동·상황 신호를 파악하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자살의 경고 신호가 대체로 ‘죽고 싶다’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 징후를 포착하는 단계가 특히 중요하다. 평소와 다른 공격적 행동을 보이거나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태도도 포함된다.
이 같은 자살 징후를 확인했다면 이후에는 그들의 생각을 들어주는 2단계(듣기)가 큰 도움이 된다. 이때 비난, 충고 및 섣부른 해결책 제시는 오히려 역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진짜 힘들었겠다”, “힘든데 잘 버텼다” 등 공감대를 형성하는 표현을 많이 하면 자살 시도자의 불안과 초조함을 환기하는 데 효과적이다.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면서, 필요할 경우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묻는 것도 도움이 된다.
보고 들은 후엔 마지막 3단계(말하기)를 실천한다. 자살 징후자의 자살 위기 위험성을 점검한 후 안전을 확보하고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가족·지인과 경찰·소방서, 자살예방센터, 정신건강복지센터, 의료기관 등에 도움을 요청하고 인계한다.
자살 충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지는 않나?
많은 사람이 괜히 자살 이야기를 꺼냈다가 상대가 오히려 더 나쁜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혹시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대부분 환자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털어놓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정신과 진료실에서 가장 자주 쓰는 물건이 티슈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자살 위기에 처한 당사자가 아니라 주변인을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자살을 비롯한 정신건강의 위기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다른 질환을 겪는 이들과 다른 점은 바로 절망감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암과 같은 신체 질환의 경우 조기에 발견하면 예후가 좋고 환자 스스로 치료를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심한 우울 상태에 빠지면, 절망감과 의욕 상실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도움을 받아봤자 달라질 게 없으리라는 생각, 혹은 문제를 털어놓아도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으며 인지 왜곡 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이때 죽고 싶은 마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고 싶다는 마음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살고 싶다는 마음도 동시에 존재한다. 두 가지 감정이 충돌하는 양가감정 상태에 놓인다. 물론 본인이 먼저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가장 좋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먼저 자살의 경고 신호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약 700만 명의 국민이 ‘보고 듣고 말하기’를 수료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보고 듣고 말하기’가 ‘게이트키퍼(Gatekeeper)’ 양성 교육이라는 점에서 이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안전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상징적 성과다. 영어로 문지기를 뜻하는 게이트키퍼는 누군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가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나라 자살 예방법에서는 ‘생명지킴이’로 소개된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교육을 수료하고 생명지킴이가 될 수 있다.
가족의 힘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환자와 함께하는
의사로 남고 싶다.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40대 사망 원인 중 자살이 처음으로 암을 앞질러 1위에 올랐다
정말 충격적인 현실이다. 세계적으로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국가는 손에 꼽는다. 대부분 사고사가 1위다. 물론 젊은 세대는 다른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낮기 때문에 자살이 2위나 3위에 오르는 곳은 꽤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10대부터 30대까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로 집계돼 왔다.
문제는 이제 40대에서도 자살이 사망 원인 1위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또 50세 이하 사망자의 절반 이상 역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암과 같은 다른 질환의 조기 발견과 치료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그러나 4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황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자살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40~50대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나타난다. 이 연령대는 대부분 가정을 책임지는 주체이기에 그 부담이 더욱 크게 작용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자영업자의 경영난과 경제적 불안이 자살률 증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며, 이에 대한 정밀한 통계 분석이 필요하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2023년 12월에 발생한 고(故) 이선균 배우의 사망 사건이다. 유명인의 자살은 ‘베르테르 효과’를 불러오며, 특히 비슷한 연령대에서 약 석 달간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2024년 1~3월에 40대, 특히 남성의 자살률이 급증했다. 여기에는 사건 자체뿐 아니라 언론과 SNS가 사건을 다루는 방식도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언론의 자살 예방 보도 준칙을 다시 한번 환기할 필요가 있으며, SNS에서 자살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방식 또한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자살 생각을 가진 주요 우울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병원 기반 집중 사례 관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연구였나?
최근 스스로 정신과를 찾아오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률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스스로 병원을 찾지 못하는 이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만 진료해서는 실질적 자살률을 낮추기 어렵다. 퇴원한 이후에도 치료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의료진이 직접 찾아가야 한다.
현행 시스템의 한계를 보완하고 지속 가능한 모델을 구축하는 것은 오랜 숙원이었다. 마침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이와 관련한 공익적 임상시험사업 공모를 하길래 곧바로 지원했다. 운좋게 선정되어 5년간 병원 기반 집중 사례 관리의 효과에 대한 무작위 대조군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연구 결과는 긍정적이었고, 현재는 이를 임상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체계로 발전시키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자살 예방뿐 아니라 트라우마 치료와 재난 정신건강 지원체계 구축에도 힘써 왔다고
기분장애 펠로우 과정을 거쳤고, 자살 예방 분야에 집중해 왔다. 그런데 연수를 다녀온 직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직접 그 현장에 가본 후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창립회장이신 채정호 교수님을 도와, 다학제 전문가와 협력해 재난 발생 시 재난 정신건강 서비스가 체계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힘썼다. 그 과정에서 국책과제가 생겼고, 이를 통해 재난민의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재난 정신건강 지원 가이드라인’을 발간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재난 직후 심리적 응급처치가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추세다. 다만 중·장기적으로 생존자와 유가족을 지원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재난에 따라 편차가 크다. 그래서 재난 발생 이후의 시기를 응급기-초기-중기-장기로 구분해 단계별 지침을 마련했다. 특히 재난 직후 책임을 맡은 실무자의 자살이 적지 않다는 점을 반영해, 이에 대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점도 명시했다. 그러나 비슷한 사례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어 앞으로 지속적인 보완과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트라우마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나 외상후울분장애(PTED)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트라우마 환자를 대할 때 특히 신경 쓰는 점이 있다면?
트라우마 치료의 핵심은 두려운 기억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데 있다. 이를 흔히 ‘노출치료(Exposure Therapy)’라고 부른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고 이야기하는 과정 자체가 환자에게 큰 고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첫 진료 시 ‘이야기하고 싶을 때까지만 이야기하고, 그만두고 싶을 때는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규칙을 안내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아플 수 있다는 점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고, 환자의 동의를 구하며 진료를 시작한다. 이를 통해 환자가 느끼는 두려움을 줄이려 하며, 이는 이후 치료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돕는 핵심 단계다.
그래도 이 힘든 과정을 혼자 감당하기는 어렵다. 손을 잡아주고 함께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사람은 치료자일 수도, 가족이나 동료일 수도, 혹 더 넓게는 사회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 환자로부터 배운 가장 큰 교훈은 결국 사람이 있어야 살아진다는 사실이다.
진료를 넘어 정책 수립과 제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 왔다. 진료실 밖에서도 꾸준히 목소리를 낸 이유가 궁금하다
진료를 하며 자살 위기에 놓인 많은 사람을 만났다. 자살의 원인이 되는 우울증은 치료가 가능한 질환이지만, 현실의 다양한 고통과 사회적 편견이 겹치면서 환자들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지곤 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해외의 여러 정신건강 제도를 살펴보며 깨달은 점이 있다.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지켜보는 목격자이자 증언자라는 사실이다. 의료인이 환자의 고통을 사회에 증언하고 환자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할 때, 비로소 국민의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가 시작된다. 환자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정신과 전문의로서 중요한 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제도적 측면에서 가장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정신 응급 대응과 급성기 치료 시스템의 개선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한다. 위기 상황에서 즉각적인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례 관리와 재활 프로그램 등 지역사회 기반의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일도 중요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뒤에도 환자가 사회로 돌아가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가 필요하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길 바라나?
가족의 힘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던 시기는 지났다. 핵가족화가 정착되고, 1인 가구가 1000만 명이 넘는 시대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마음이 아플 때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우울증이 있다고 말해도 편견이나 차별의 시선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료 상담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근 언론, 법조계, 연예계 등 사회 각계에서 이런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2023년 여름부터는 배우 신애라, 가수 백지영, 방송인 이성미·송은이·김기리 등이 함께 연예인 게이트키퍼 모임을 결성해 정신건강 관련 세미나와 토론을 이어오며 동료들을 만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쌓여 결국 우리 사회를 더 따뜻하고 안전하게 바꿔나가리라 믿는다.
환자에게 어떤 의사로 기억되고 싶나?
‘내가 저런 상황에 놓인다면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환자를 종종 만난다. 그런 절망의 순간을 견뎌내고 회복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환자와 함께하는 의사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