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 한국인 VS 일본인
지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피겨스케이터 차준환이 5위에 오르자 일본의 SNS가 들끓었다. “잘생긴 차준환의 군면제를 도와달라”는 외침이었다. 왜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난리인 걸까?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알면 그 답을 유추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결핍을 해소하는 방법
먹방 vs. 야동
먹방은 식욕, 야동은 성욕을 다루는 영상이다. 둘 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구를 자극한다. 최근 한국과 일본은 남성다움을 드러내지 않는 ‘초식남’이 많아지면서 연애보다 취미에 몰입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는 타인과의 교류에서 오는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런 결핍을 일본은 ‘엿보기’ 형태의 야동으로, 한국은 사회적 관계를 상징하는 ‘밥’, 즉 먹방으로 해소하고 있다.
야동이 일방적으로 성행위 장면을 보여준다면, 먹방은 시청자와의 쌍방향 소통이다. 자신과 타인을 명확히 구분하는 걸 좋아하는 일본인은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기보다는 엿보는 정도로 안정감을 느낀다. 반면 한국인은 채팅창을 통해 먹방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한다. 함께 만들고 참여하는 것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교류 방법이기 때문이다.
남녀의 역할에 대한 인식
쎈 언니 vs. 귀여운 소녀
일명 ‘스우파’. 지난해 방영한 Mnet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무대를 휘어잡은 ‘센 언니’들의 활약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런 현상을 본 일본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는 나약하고 여리여리해 보이는 연예인이 인기 있는 데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J-컬처의 핵심도 ‘소녀들’이다.
남녀 역할을 음양의 이치로 이해하고 서로 위치에 맞는 역할을 강조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는 ‘힘의 논리’에 따라 성별을 구분해 왔다. 일본어에 남성어와 여성어가 따로 있는 것도 그 예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인과 이미 있던 것을 바꾸는 데 거부감을 보이는 일본인의 성향 차이도 영향을 미쳤다.
공연을 즐기는 자세
떼창 vs. 감상
오아시스, 메탈리카, 미카, 뮤즈, 퍼렐 윌리엄스 등 기라성 같은 해외 뮤지션이 내한 공연을 할 때마다 입을 모아 “한국 관객이 최고”라고 외친다. 오아시스 리더 노엘 갤러거는 한 캐나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관객에 대해 “투어할 때면 브라스 섹션을 데리고 다니는데, 한국에선 브라스가 필요 없어. 그들이 다 불러주거든” 하고 말한 적도 있다.
한국인에게 공연은 ‘신나게 놀러 가는 것’이고, 일본인에게는 ‘노래를 들으러 가는 것’이다. 한국은 가수와 관객의 경계를 허문 채 그 공간에서 모두 함께 즐기며 에너지를 얻고자 한다. 반면 일본인은 다른 이가 가수의 노래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조용히 감상하는 것이 성숙한 매너라고 여긴다.
콘텐츠로 현실을 보는 방법
막장 vs. 이(異)세계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연 10조원이라는 막강한 매출을 올리는 문화 콘텐츠다. 반면 한국의 대표 콘텐츠는 드라마와 영화다. 양국의 대표 문화 콘텐츠에 나타나는 현실 인식은 양국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일본인이 애니메이션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異)세계를 통해 ‘비유적’으로 현실 문제를 반영한다면, 한국인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현실을 직접 다룬다.
실제로 한국인은 ‘리얼함’이 없으면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도깨비, 외계인이 나와도 월급 걱정하며 인간과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 이는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타인에게 표출하지 않으려는 일본인에게는 익숙지 않은 방식이다. 반면 한국에도 판타지물이 있다. 재벌 3세나 출생의 비밀 등 억지스러운 요소가 가득한 ‘막장 드라마’가 그것. 비현실성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판타지물로 보는 이도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 감정의 배출
욕 vs. 예의
한국에는 욕이 많다. ‘개’가 들어가는 것부터 생식기를 지칭하는 말, 패륜적 의미의 말까지 다양하다. 한국인에게 욕은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분한 마음을 억누르면 화병이 난다고 여길 정도로 나쁜 감정을 배출하고자 한다. 그 수단이 바로 욕이다. 또 어릴 때 친구들과 주고받은 대화 속 욕이나 욕쟁이 할머니의 쌍욕 등은 친근감의 표시다. 즉 한국인에게 욕은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이자 의사소통의 한 방법인 것이다.
반면 일본에는 욕이랄 것이 없다. 기껏해야 ‘바카(바보)’나 ‘아호(멍청이)’ 정도다. 한국에 유독 욕이 많은 건 욕에 다양한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은 욕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참견'의 미덕?
선 넘는 한국인 vs. 선 긋는 일본인
한국은 예로부터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수많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지나가던 선비’들은 자신이 위기에 처할지라도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한국인 대인 관계의 특징인 ‘오지랖’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프로참견러’라는 말로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지만, 한국의 오지랖은 사회적 연대의 시작으로서 IMF 금 모으기, 태안 유조선 사고 등 국난을 극복하는 데 빛을 발하기도 했다.
반면 일본은 참견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참견은 어떤 이에게 은혜가 될 수 있고, 이는 그 사람에게 은혜를 갚아야 하는 부담을 지울 수 있다. 은혜를 거절하는 것도 민폐이기에 애초에 남과 얽히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것이다.
나 홀로 삶
산으로 들어가는 자연인 vs. 방으로 들어가는 히키코모리
사회생활을 거부한 채 집에만 틀어박힌 사람을 ‘히키코모리’라고 한다. 1970년대 일본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에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대부분 대인 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기피증이기에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만큼 그들은 부모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 1990년대 히키코모리는 어느덧 중년(40~64세)이 됐고, 현재 61만 명으로 추산된다.
반면 한국인은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일본인과 다른 방법으로 치유한다. 산으로 들어가 자연인이 되는 것. MBN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이들 대부분은 사업 실패, 배우자 사망, 지인의 배신 등 다양한 상처를 입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산 생활에서 자유를 느낀다. 히키코모리처럼 외톨이 생활이지만, 한국의 자연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삶의 여유를 즐긴다.
귀신의 정체성
한을 품는 한국 귀신 vs. 자리를 지키는 일본 귀신
한국 귀신의 정체성은 ‘한(恨)’이다. 살아서 풀지 못한 원한이 귀신이 되는 조건이다. 계모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해 원님을 찾아가는 ‘장화홍련’이 대표적이다. 한국 귀신은 한을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억울함’만 풀어주면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반면 일본 귀신은 출몰하는 데 이유가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호러물인 <링>(1998)이나 <주온>(2000)을 보면 뚜렷한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을 침범한 이들은 공격의 대상이 된다. 개인의 영역에 민감한 일본인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한국 귀신과 달리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일반적이다. 이는 자신을 중심으로 외부를 향하는 한국인의 기질과 내부로 침잠하는 일본인의 기질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날 넘고 가라' vs. '나만 따라 해라'
일본의 스승과 제자 관계는 ‘이에모토(家元)’ 제도를 배경으로 한다.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요구받는 이에모토는 해석이나 수정도 철저히 금한다.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해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제자가 스스로 자신의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바둑 고수 이창호 9단은 스승 조훈현 9단을 처음 이긴 날 “이제야 스승님의 은혜를 갚았다”라고 말했다. 제자가 스승을 넘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고수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의 전승도 다르다. 일본은 엄격한 전승 체제로 세계에서 전통을 가장 잘 지켜온 나라가 된 반면, 한국은 소위 신구 조화를 중요시한다. 어느 정도 기본이 됐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자기 것으로 만들기 바쁜 만큼 남들이 이제껏 하지 않은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승부를 겨루는 법
삼세판의 씨름 vs. 단판의 스모
씨름은 한국, 스모는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 스포츠다.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것은 같지만, 승부 결정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씨름은 삼판 양승, 스모는 단판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한국인은 한 번의 승부로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다. 적어도 세 판에 두 번은 져야 “이번엔 내가 졌다”는 소리가 나온다. “다음에 두고 보자”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나 일본인은 한 번의 승부로 생사가 갈리는 ‘칼의 문화’여서 그런지 단판 승부로 패배를 받아들인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의 일본에서 패배에 승복하고 승자의 부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고, 무사로서 명예로운 일이었다. 이 같은 문화 심리가 스모의 단판 승부에 반영된 것이다.
끝까지 싸우는 한국인 vs. 쉽게 승복하는 일본인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한국인과 승부에 깨끗이 승복하는 일본인은 실제 전쟁에서도 그 차이를 만들었다. 전쟁에서 패배에 승복하는 데 익숙한 일본인에게 지는 걸 쉽게 인정하지 않는 한국은 고전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임진왜란’ 당시 성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죽여도 조선인들은 항복은커녕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괴롭혔다. 일제강점기에도 나라를 빼앗겼지만 조선인들은 임시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는 등 끝까지 일본에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