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껏 음악을 듣기 위해 집까지 지은 박기범

35년 전 직장 생활과 동시에 시작한 오디오 취미 인생은 정년 퇴임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집을 지어 그간 마련한 오디오는 물론 수집한 음반, 기타 음악 자료를 모두 모아 음악 감상실을 꾸린 것. 이 대담한 계획을 실행한 덴맨 박기범 씨를 만났다.

2021-10-03     이영민 에디터
Profile 박기범

•1961년생 

•前 건국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생활관 관장

 

경기도 광주 퇴촌, 녹음이 우거진 이 고즈넉한 마을에 경량 목조 건물 하나가 새로이 생겼다. 지난 7월 완공된 이 집은 연면적 약 200m2(60평) 규모의 이층집으로, 오직 취미를 위한 공간이다. 주인장 박기범 씨는 유난히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으면서 자연과 벗하며 사는 즐거움 때문에 요즘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다. 

그는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7년 전 땅을 매입한 뒤 작년 9월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은 물론 조경, 토목에 각종 세금까지 총예산은 4억원. 적지 않은 금액이 들었지만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즐길 수 있으니 매일 기분이 들뜬다.

 

공간에 대해 소개해달라

좋아하는 그림도 감상하고 맘껏 음악을 듣는 공간이다. ‘갤러리 뮤즈’라는 이름도 붙였다. 보다시피 음향 기기를 제대로 갖춰놨다. 도시의 흔한 공동주택이라면 이웃에 피해를 주었겠지만 여기는 단독주택이라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다. 지난 8월 정년 퇴임한 뒤 평일에는 주로 여기에 머물고 있다.

 

경기도 퇴촌에 터를 잡은 이유는?

이웃 따라 온 케이스다. 예전에 <Den>과 인터뷰한 건국대 회화과 이종송 교수와 오랜 친분이 있는데, 그의 작업실 바로 옆집으로 온 거다. 이 교수도 나처럼 오디오 취미를 가진 데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고 나는 그림을 좋아하는 컬렉터이니 죽이 잘 맞지 않겠나. 시쳇말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데, 나는 친구 따라 퇴촌에 왔다.(웃음) 

 

공간을 만든 과정이 궁금하다 

건축가에게 천장을 높이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전부다. 천장이 낮으면 소리가 쭉 뻗어 나가지 못하고 공간에 갇혀버린다. 방은 작은데 천장만 높아도 소리가 언밸런스해지기 때문에 방 면적에 맞는 최적의 높이로 설계한 것이다. 지금 음악 감상실은 면적은 10평, 층고는 3m다. 10평에 맞는 천장 높이는 3m가 적당하다. 벽과 천장에 방음벽은 설치하지 않았다. 보통은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방음벽을 설치하지만 음악을 생생하게 느끼려면 소리가 벽이나 천장 같은 장애물에 자연스럽게 닿고 일부는 그 안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 소리가 방음벽에 막혀버리면 죽은 소리나 다름없다. 그 외에도 오디오 액세서리를 벽에 설치해 소리가 앉아 있는 자리로 모이도록 했다. 이 모든 세팅이 끝나야 정돈된 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본가에도 오디오 룸이 있지만

온전히 나만의 공간으로 꾸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늘 나만의 ‘갤러리+음악 감상실’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마침 정년 퇴임을 하면서 아예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2층 전체를 음악 감상실로 꾸민 것인가? 

1층은 주방 시설과 테이블을 두고 카페처럼 꾸몄다. 손님이 오면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다. 2층은 오롯이 갤러리와 음악실로 꾸몄다. 갤러리 20 평, 음악실 10평. 가구를 많이 들여놓을 필요도 없고, 최대한 심플하게 공간을 구성했다. 무엇보다 목조주택이 지닌 나무 본연의 향과 온화함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오디오에 대해 설명해달라 

스피커는 윌슨오디오 ‘맥스2’ 모델이다. 나무로 된 프리앰프는 캐나다산 ‘테너오디오’에서 만든 것이고, 또 미국산 ‘스레솔드’ 파워앰프를 쓰고 있다. CD를 구동하는 장치는 여러 개로 클락, 컨버터, 트랜스포트가 있다. 턴테이블은 일본산 ‘데논’ 제품을 쓰고, 포노앰프는 독일제 ‘ASR’을 쓴다. 

원래 오디오는 세트 개념이 없다. 스피커를 잘 만드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앰프를 잘 만드는 회사가 있다. 각 부품의 조합은 듣는 이가 직접 하는 거다. 오랫동안 오디오를 취미로 삼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사실 어느 등급 이상이 되면 ‘좋다’, ‘나쁘다’의 개념이 아니라 취향 차이일 뿐이다. 

 

특별히 아끼는 오디오가 있나? 

전부 다 아낀다. 그 중 CD 트랜스포트인 ‘에소테릭 P–Os’라는 모델에 애착이 있다. 이 제품은 출시가 중단된 하이엔드 기계다. 저 기계를 보면 믿음직스럽다. 지금까지 쓰면서 픽업을 몇 번 갈았지만 구동계는 워낙 튼튼해서 여전히 쓸 만하다. 10평 규모 방을 구동하는 데는 최적이다. 오디오를 고를 때 딱 두 가지만 보면 된다. ‘연주자들이 얼마만큼 선명하게 보이느냐’, ‘주변은 얼마만큼 적막해 지느냐’다. 그렇지 않으면 ‘윙~’ 하는 기계 소리에 정신이 없다. 

에소테린 P-Os

 

음악에 빠지게 된 계기는? 

고등학생 때 합창단에 있었다. 남성합창은 별도의 장르로 취급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지녔다. 나는 무대 위에서 합창단원으로서 노래할 때도 라이브로 전해지는 웅장한 음악 속에서 감동과 환희에 온몸이 저릿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음악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부모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대학 시절 듀오로 라이브 카페를 전전하며 포크송을 부르는 등 음악을 아예 놓지 않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오디오 취미를 시작했다. 첫 월급을 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작은 오디오를 산 것이다. 퇴직 전까지 35년 직장 생활을 했으니 취미 생활도 그만큼 해온 것이다.

 

이 공간에 대해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사회 초년생 시절 본격적으로 시작한 취미 생활이 정년 퇴임 후 이런 공간으로 이루어졌으니 감회가 새롭다. 가족의 지원과 신뢰가 없었으면 힘든 일이다. 또 취미라는 게 경제적으로 궁핍하면 유지하기 어렵지 않나. 내 경우 지방에 살았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서울에 있었으면 수억, 많게는 수십억을 집값으로 깔고 살아야 하니 가능했을까 싶다. 오디오 이외에 음주나 골프 같은 다른 취미가 없었던 것도 이유다. 

 

얼핏 봐도 LP와 CD 양이 상당해 보인다 

정확히 몇 장인지는 헤아리지 못했고, 대략 1만 장 정도 된다. 30년 넘게 모은 컬렉션이다. LP만으로 한쪽 벽면을 다 채우고도 놓을 데가 없어서 CD와 LP 일부를 바닥에 뒀는데, 이를 인테리어 콘셉트로 보는 사람도 있다.(웃음) 

 

요즘 주로 듣는 장르는?

편식 없이 듣는 편이지만 요즘은 오케스트라, 오페라 등 대편성 음악을 주로 듣는다. 현재 갖고 있는 오디오가 큰 편이어서 대편성 음악을 듣기에 좋다. 대편성이 주는 무시무시하고 짜릿한 쾌감은 정말 각별하다. 반면 오디오 취미 초반에는 스피커가 작고 방도 좁았기에 밴드가 적은 것들, 예를 들어 소나타나 현악 앙상블 같은 걸 주로 들었다. 시스템 규모에 따라 듣는 장르도 달라지는 것 같다. 

 

구하고 싶은 음반이 있나?

195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독일 바이에른 바이로이트에서 매년 7~8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공연하는 음악 축제)에서 푸르트뱅글러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담은 음반을 갖고 싶다. 20년 전에 한 후배가 들려준 적이 있는데 너무도 아름다워 잊히지 않는다. 근데 중고 시장에서도 판을 구할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초반도 구하고 싶었지만 결국 못 샀다. 

 

음악을 더 재미있게, 오래 즐기는 방법이 있을까?

같이 듣는 게 가장 좋다. 배우자든 친구든, 누구라도 상관없다. 같이 듣는 사람이 있으면 즐거움이 배가한다. 뭐, 그게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좋지?” 하면 “어”라고 대답해주는 그 순간이 좋은 거다. 취미라는 게 대단한 활동 같은 건 아니니까 그냥 좋고 마는 거지.(웃음)

 

명반 추천

이안 보스트리지. <시인의 사랑(슈만)>

하이네의 시에 슈만의 곡을 붙인 가곡집. 개인적으로 슈만의 곡을 다시 듣게 해준 음반이다.

 

터틀 크릭 코랄. <POSTCARDS>(티모시 셀링 지휘)

성서 시편 74장의 내용을 담은 러시아 성가. 남성합창의 진수를 보여준다.

 

바르톨리. <독일 작곡가의 이탈리아 노래>(언드라시 시프 피아노)

이탈리아 메조소프라노 바르톨리의 노래. 꽉 차고 빈틈없는 연주는 감상자를 꼼짝달싹 못 하게 한다.

 

하리트 크레이흐(Harriet Krijgh). <비발디 첼로협주곡>

훌륭한 녹음과 연주자의 새로운 해석이 바로크음악의 고정관념을 바꿔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