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이 밝힌 이 시대 중년 남자의 화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치열하게 달려온 인생의 중반, 어느 순간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이 ‘과연 옳은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삶이 허무하고 혼란스러워진다. 한때 시대의 주인공이던 대한민국 중년 남자의 오늘을 직시해보자. 무엇이 잘못되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금부터라도 인생을 찾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최진석 교수와 함께 그 답을 찾아본다.
•1959년생, 전남 신안 출생
•새말새몸짓기본학교 이사장
•前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인간이 그리는 무늬>,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저자
‘헌말헌몸짓’ 시대에서 ‘새말새몸짓’ 시대로
철학계의 이단아, 행동하는 철학자 최진석. 그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하나같이 불손하다. 스무 살에 이미 “앞으로 20년간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천명한 후 실제로 20년간 ‘폐관 수련’한 끝에 철학 교수로 강단에 섰다. 그러고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50대 중반에 교직을 박차고 나와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른바 ‘헌말헌몸짓’에 사로잡힌 시대를 넘어 ‘새말새몸짓’으로 무장한 미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4년을 건명원 원장으로 지낸 그가 이번에는 고향인 전남 함평에 ‘새말새몸짓기본학교’를 세우고 창의 전사를 양성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행보에 대해 그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이라고 담백하게 말한다. 누구나 꿈꾸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는 삶의 궤적을 걸어온 최진석.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한 그라면 <Den>이 던지는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줄 것 같았다.
나는 누구인가?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된 동기는?
청소년기 나의 화두는 ‘인생이 짧다’는 사실이었다. 학창 시절 어느 날, 초가집 마당에 덕석을 깔고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백숙을 만들고 계셨다. 초저녁이었는데, 별똥별이 떨어지더라. 수없이 보던 풍경인데도 그날 별똥별은 내 영혼을 파고들었다. ‘별도 저렇게 지는구나. 나도 저렇게 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백숙을 들고 나오는 어머니가 딴 세상 사람 같아 보였고, 그날 백숙은 한 입도 못 먹었다. 이후 나는 그 생각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청소년기를 고통스럽게 보냈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붙들고 씨름할 공부를 찾다 보니 철학밖에 없었다.
왜 장자를 택했나?
≪장자≫에는 ‘감동’이 있었다. 다른 철학을 공부할 때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머물러 감동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감동을 경험한다는 건, 그것과 나 사이에 전인격적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뜻이다. 세상 만물 무엇이든 나를 감동시켜야 가장 좋은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해서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물건이 나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에 사지 않나? 사상도, 철학도, 문학작품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나에게 수준 높은 감동을 준다면 내 친구가 될 수 있는 거다. 나에게 장자는 그런 의미였다.
예를 들어, 장자의 <제물론> 중 첫 편인 ‘소요유’의 첫 구절은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대붕(大鵬)이 되는 이야기다. 날개를 펴면 우주에 그림자가 지고, 날갯짓 한 번으로 6개월을 날아가는 거대한 새로 변하는데, 질적 전환을 이렇게 거대하게 펼쳐내는 스케일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철학이라기보다 판타지 소설처럼 들린다
인간은 판타지를 안고 사는 동물이다.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까? ‘나’라는 존재의 시선과 해석을 거쳐 받아들인 가공의 세계다. 나 자신의 판타지인 것이다. 이 ‘판타지’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데, 인간은 사실을 사는 동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판타지를 꿈꾸고 현실로 구현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철학자의 눈으로 보는 ‘판타지’란?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건너간다는 것은 있지 않은 곳으로 간다는 의미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간다는 것. 그것이 판타지적 삶이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가는 걸 모험, 불안이라 부른다. 그런데 판타지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안정만을 추구하게 된다. 얼마 전 출간한 <나 홀로 읽는 도덕경>에서 ‘홀로’를 강조한 것도 나 자신이 우뚝 서야 한다는 뜻이고, 자기만의 ‘판타지’를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판타지를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판타지를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경전을 읽어도 경전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한다. 여기서 소비한다는 것은 나를 키우는, 나의 판타지성을 키우는 연료로 소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기만의 판타지가 없는 사람은 경전을 읽으면 그것을 숭배하게 되고, 경전이 자신을 지배하게 만든다. 주변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키우는 연료가 되어야 한다. 자기를 키운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를 완성하는 연료로 사용하고 기획하는 전략을 판타지라고 한다. 즉 자기만의 판타지가 있어야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교수직을 그만둔 이유도 거기 있나?
18년간 교수 생활을 하면서, 그 시간을 내 판타지를 키우는 데 이용했다. 그런데 어느 단계에 이르자 여기 계속 있다가는 나만의 ‘비린내’, 나의 고유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만의 판타지는 우리 사회를 철학적 수준으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건명원’을 만들고, 초대 원장이 되었나?
건명원은 시대의 반역자를 키우기 위해 만들었다. 합리적으로 안정된 사람을 불안하게 흔들어놓는 곳. 인간은 흔들릴 때 스스로가 보인다. 반역할 때 자기 자신이 분명해진다. 나는 이것을 ‘창의 전사’로 표현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지식 수입국에 머물렀는데, 이제는 지식 생산국으로 나아가는 도전을 해야 한다. 이것이 ‘창의’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재가 건설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날 수 있게 우리가 인재를 길러내고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내 능력에 맞는 조건을 만들어 그런 인재를 기르고자 건명원을 세웠다. 미래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시대의 반역자’라고 표현한 건, 기존 것을 반역해야 미래가 열리니까.
그다음 행보가 지금의 ‘새말새몸짓기본학교’인 것인가?
건명원의 이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건명원과 새말새몸짓기본학교에서 깨달은 것은 ‘어떤 인간이든 기본만 잘돼 있으면 탁월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탁월해지지 못하는 건 기본이 단단하지 못하기 때이다. 그러면 그 기본은 뭐냐? 결국 자기 자신에게 분명해지는 거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난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죽기 전까지 완수해야 할 소명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내면을 갖추는 것, 이것이 기본이다.
미래 인재에 주목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결과에 너무 집중한다. 결과에 집중하면 새로운 방법론이나 판타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건명원을 만들 때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물어본 말이 “성공할까요?”였다. 그런데 성공이 예상되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과적 성공을 예단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판타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1%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나폴레옹 정도의 영웅이 되려면 그만 한 배짱은 있어야 하는 거다. 배짱이 없는 사람은 계속 성공 여부만 따진다. 미래 인재는 1%의 가능성이다. 역사는 언제나 주변이 중심을 전복하고, 그 주변이 다시 중심이 된 후, 새로 등장한 주변에 의해 전복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미래 인재는 바로 주변이다.
‘행동하는 철학자’라는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만족한다. 나는 완성을 꿈꾸는 사람이고, 한 인간의 완성은 이론과 실천이 겸비되어야 한다. 흔히 철학을 관념적이고 실제와 동떨어진 학문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틀린 해석이다. 철학이 관념 활동을 하는 것은 맞지만, 관념 세계에서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현실 세계를 사는 데 관념이라는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더 구체적이 아닌 관념, 사유라는 장치를 사용할까? 이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 삶에 더 넓고 깊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는 없다. 더 잘 살고, 더 높게 살고, 더 넓게 그리고 더 깊이 살려면 시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이 시선을 점점 높이다 보면 결국 관념화하게 된다. 철학은 개념 활동, 관념 활동, 사유 활동이다. 이를 통해 관념과 개념, 사유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념 활동, 관념 활동, 사유 활동 수준으로 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적 여정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행동하는 철학자’라는 표현은 썩 맘에 든다.
기본만 갖추면 어떤 인간이든 탁월해질 수 있다.
스스로에게 존재의 본질을 묻고, 거기서 분명한 답이 나와야 자기만의 판타지와 고유한 스토리를 쓸 수 있다.
새말새몸짓기본학교의 목적은 이 기본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독립된 주체로 살려면
인문학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고 표현한 의미는?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인간의 동선이다. 인간은 패턴을 그리며 움직인다. 그 동선이 어디로 갈까 조금 앞서 예측하는 거다.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고 창의성이다.
단순히 문학과 철학의 이야기가 아니라 높이로 구분해야 한다. 인간의 동선을 수사적 기법을 사용해 감동을 생산한 다음 그것을 통해 충격을 주고 알게 하는 활동이 문학이다. 문학의 궁극적 주제는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다. 인간 사이의 문제가 문학의 핵심 주제이고, 인간의 동선을 알게 해주는 것이 문학이다. 구체적 사건을 시간적 계기로 연결해 인간이 어떤 동선을 그리는지 알게 해주는 것이 역사학이고, 이 세계를 개념으로 포착해 개념의 유기적 연관을 통해 인간의 동선을 알게 해주면 그것이 철학이다. 인문학은 바로 이런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연관된 학문이다.
인문학적 사고를 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인간 동선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인간 동선을 파악하는 수준이 없으면 상상력과 창의성이 나오기 어렵다. 인문학이 유행하는 건 우리 사회에 인문학적 높이의 시선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인문학적 높이의 시선은 선진국의 높이, 전략 국가의 높이, 선도 국가의 높이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럼 그 전 단계는 뭘까? 전술 국가, 추격 국가, 중진국의 높이다. 그런 면에서 인문학이 유행하는 것은 법학적·정치학적·경제학적 높이로는 우리가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가 더 자유로운 세계, 더 창의적인 세계, 더 독립적인 세계를 꿈꾼다는 뜻이 기도 하고.
인문학적 사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질문해야 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새로운 것, 높은 것, 위대한 것은 모두 질문의 결과다.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먹었다가 누군가 요구할 때 뱉어내는 것이다. 대답에만 빠지면 멈추게 된다. 과거를 어루만지게 된다. 질문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않고 튀어나오는 것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항상 개방적이다. 앞으로 열려 있다. 그래서 질문만이 인간을 미래로 이끌 수 있다.
주체적 자아로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된다. ‘나는 어떻게 살다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거다. 그러면 굉장히 단순하게 본질로 돌아온다. 그 질문에 대답만 분명히 제기되면, 그것이 바로 독립된 주체다.
인간은 질문할 때만 자기 자신, 주체적 자아가 된다. 대답은 남의 이야기를 담았다가 뱉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대답하는 존재는 우리 중 하나로 존재하고, 질문하는 존재는 고유한 나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기로 살고 싶은 사람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궁금증과 호기심이 살아 있어야 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살아 있으면 인간은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게 된다. 스토리를 쓰게 된다. 여기서 판타지가 만들어진다. 이 세계에 궁금한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이 어떤 판타지를 쓰겠는가?
질문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올까?
독서를 하면 질문할 수 있는 내면이 형성된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라고 표현했다. 독서를 하면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듯, 어딘가 더 높은 수준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는 거다.
건너가려면 일정한 방향과 높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결정해주는 것이 지식이다. 또, 건너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내공이다. 그런데 인간은 지식만 있어도 건너가지 못하고, 내공만 있어도 건너가지 못한다. 내공만 있고 지식이 없으면 경거망동하게 된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지식과 내공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독서는 이를 동시에 갖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니 독서는 어떤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수련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뜻은 있는데, 독서는 하기 싫다? 그 사람은 절대로 건너갈 수 없다.
독서가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독서는 수련이다. 어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다. 대개 하기 싫은 것이다. 그걸 하는 게 수련이다. 고통스럽고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게 수련의 본질이다. 읽으려고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얼마나 많으며, 끝까지 못 읽은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는 책 읽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작가가 이끄는 그 길을 계속 추적하며 놓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독서 그 자체로 수련인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질문하는 힘이 생기고, 주체적 자아를 만들게 된다.
<나 홀로 읽는 도덕경>도 그런 의미인가?
‘홀로’는 주체를 뜻한다. 독립적 주체의 특징은 고독을 자초할 수 있다는 거다.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외로움은 자기가 타인에게 기대거나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타인에게 환대받지 못할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다. 고독은 다르다. 고독은 독립적 존재가 다른 모든 것과 배타적 관계를 형성하며 홀로 우뚝 서는 것을 말한다. 모든 창의적 활동이나 자유는 고독의 터널을 지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독립적 주체로 서지 않으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대답은 멈추는 것이고, 질문은 건너가는 것이다. 인간은 판타지를 산다고 했는데, 이 판타지는 모두 질문 형태를 띤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인격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살아 있는 인격이다. 모든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건너간다는 것은 다음을 꿈꾼다는 의미다. 멈추면 낙오되는 것이며 다음을 꿈꾸고 건너가는 인간은 지배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중년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중년’이란 무엇일까?
청년은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덤비는 사람, 중년은 판타지가 줄어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Den>에서 중년을 표현할 때 ‘앞만 보고 내달렸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그렇게 중년에 접어들면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리고 혼란을 겪게 된다. 이는 내가 중년에게 느끼는 공통적 이미지다. 오랜 세월 구체적 현실을 다루면서 그 안에서 돈을 벌고 생활하는 데 익숙해지면 자기만의 판타지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판타지가 사라지면 삶이 따분해진다.
사춘기와 비슷한 건가?
사춘기가 뭔가?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서 어린이가 어른이 될 때 느끼는 혼란이다. 생각과 몸은 어린이인데, 행동은 어른스럽게 해야 하는 경계선에서 겪는 혼란이 사춘기다. 중년의 방황도 이와 비슷하다. 앞만 보며 내달리다 보니 지치고 길을 잃었다. 그래서 ‘힐링’이라는 표현을 빌려 취미 생활에 빠진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실제로 지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중년은 앞만 보고 달린 결과 뭔가를 이룬 세대다. 자기 일을 통해,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세대다. 그런데 길을 잃은 이유는 다음 단계로 도약하지 못해서다. 뚝심 있게 한길을 걸어오는 동안 축적한 역량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제자리에 머물러 ‘아, 나는 지쳤나 보다’ 하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착각을 하는 이유가 뭘까?
판타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이끄는 판타지가 있으면 중년의 위기 앞에서 ‘내 판타지의 한 단계를 이루었구나’, ‘여기서 한 단계 도약해야겠구나’라는 판단이 서는데, 판타지가 사라진 사람은 도약을 꿈꾸거나 도약할 때라는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하고 지쳤다고 착각한다. 그러고는 ‘이제 내려놓자. 비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이는 인간적인 면에서 약해지고 작아진 모습일 뿐 판타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아니다.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휴식, 내려놓기, 지쳤다는 건 노년을 의미한다. 그 의식이라는 것은 ‘나는 다 살았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중년의 방황은 판타지가 사라진 것과 일맥상통한다.
판타지를 계속 써 내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질문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런데 청년기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자문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들 죽어라 뛰기만 하지, 질문이 빠졌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잊어버린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 활동은 매우 수고스럽고 힘들다. 힘드니까 누군가 대답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누군가 대답을 해주면 거기에 휩쓸린다. 그래서는 자기 존재 이유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오래 할 수도 없을뿐더러 효과도 떨어진다.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죽음은 실제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일 필요가 없다. 죽음을 인식해야 한다.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것도 금방 죽는다.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시시각각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살지?’라는 호기심이 생긴다.
요즘 들어 정년퇴직한 친구들이 종종 내게 묻는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러면 내가 되묻는다. “네가 지금까지 살고 나에게 어떻게 살지 묻는다면, 너는 한 번도 제대로 산 적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는 거다. 그렇기에 정년퇴직 이후 그다음 스텝을 어떻게 밟아야 할지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린 거다. 그런 것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일만 열심히 했다? 이건 훈장이 아니라 패배를 선언하는 셈이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60대가 훌쩍 넘어 자기 삶의 방향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는 지경이 됐다? 이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는 뜻이다. 자기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거다. 정말 서글픈 일 아닌가.
중년 이후 삶의 변화가 있었나?
삶의 방향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단계의 변화는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하든 안 하든 나는 ‘지속 상승’을 꿈꿨다. 헤르만 헤세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구절을 매우 좋아한다. 더 나아지려는 욕망이 죽기 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를 찾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맞이하는 중년은 너무도 ‘황량’하다.
<Den> 독자에게 현명하게 중년을 살아가기 위한 조언을 한다면?
<Den>의 모토가 ‘Fun&Joy’다. 그런데 즐거움 중에서도 심리적 즐거움에 빠지면 인간은 자잘해진다. ‘존재적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예능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 중년이면 지적으로 어느 정도 준비되어야 한다. 또 심리적으로 즐거운 것과 참된 즐거움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긴장하며 살지 않으면 인간은 쉽게 자잘해진다. 자잘해진 인간에게 잘 나타나는 특징이 쉽게 지친다는 거다. 한 번 사는 인생 크고 굵게 살다 가야 하지 않겠나? 또 하나, 중년 정도 나이를 먹으면 남 보기 부끄럽게 여기저기 위로를 구하러 다니면 안 된다. 자기가 자기를 성장시켜 남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중년이 일만 하다 어느 순간 고갈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로 등장할 수 없다. 그래서 두 질문은 사실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