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전시 기획자의 이탈리아 미술 여행기, 류동현 “건축과 미술의 향연을 현장에서 고스란히 느끼다”
<월간미술> 기자, 출판사 기획팀장을 거쳐 문화역서울284 전시 큐레이터로 활동한 류동현 편집장. 현재 페도라 프레스를 이끌며 독립 전시 기획자, 대학 강사, 저술가로 바쁘게 살고 있는 그가 이탈리아를 최고 여행지로 꼽는 이유는?
팬데믹 시대에 여행책을 출간하면서,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는 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책으로, 애초 2020년 출간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로 출간이 한차례 미뤄졌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책을 통해 이탈리아로 미술 기행을 다녀오는 간접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고 판단해 2021년 발행했다. 여행에 관한 모든 글쓰기가 그렇겠지만, 책에 실을 사진을 정리하고 글도 수정·보완하면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기분에 푹 빠졌고,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에 ‘미칠 것 같았다’.(웃음)
이탈리아 여행은 얼마나 자주 다녔나?
처음 인연을 맺은 건 대학생 때 떠난 배낭여행이었다. 당시 유럽 전역을 돌았는데, 가는 곳마다 너무 신기했다. 여러 나라 중 이탈리아에 매료된 건 2005년 <월간미술> 기자로 취재차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찾았을 때다. 숙소에서 처음 맞은 아침, 창밖으로 푸른 여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뭔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 물 위에 떠 있는 도시가 너무나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2010년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예 이탈리아 베네치아부터 시칠리아까지 둘러보는 긴 여행을 했다. 그 후로도 기회만 되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는데, 코로나19 이전에는 거의 1년에 한 번씩은 방문한 것 같다.
수많은 해외 여행지 중 유독 이탈리아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시작은 단순했다. 가보니 날씨가 너무 좋았다. 평소 해외에서 산다면 뜨거운 나라에서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탈리아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가 여름이라 이탈리아를 횡단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후였고, 우리나라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지중해 날씨의 장점을 피부로 느꼈다. 무엇보다 내 전공과 잘 맞았다. 로마,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시칠리아 등지에서 본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온 다양한 유물과 유적, 그것들을 단순히 오브제나 박제로 두는 대신 여전히 삶의 일부로 함께한다는 점이 너무 멋있었다. 사람들 성향도 우리와 비슷해 얘기해 보면 인정 넘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중교통과 두 다리에 의지한 이탈리아 여행의 묘미는 무엇인가?
이탈리아뿐 아니라 모든 여행에 해당한다. 우리는 여행 하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두 지점을 잇는 시간이 굉장히 짧아진다. 하지만 걸어가면 시간이 훨씬 늘어난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버스와 기차를 타고 자신의 두 다리에 의지해 ‘천천히’ 그 모든 과정을 겪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탈리아어에 능통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전혀 아니다. 난 외국어에 소질이 없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표정과 제스처를 동원하고, 영어를 섞어 쓰며 여행했다. 신기한 건 이런 방식이 어디든 통한다는 거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 역시 낯선 이방인이다 보니 여행하며 목적지를 잘못 찾아가기도 하고, 찾아가는 동안 헤매기도 한다. 그런데 그 과정 자체가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기질이 궁금하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음식도, 성격도. 한번은 기차역에서 물을 사려고 자판기를 찾았는데 하필이면 50유로 지폐밖에 없었다. 거스름돈도, 물도 나오지 않았다. 자판기를 두드리고, 여기저기 물어봐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기차 출발 시간이 다 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몰려와 서로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자기 일도 아닌데 내 일처럼 안타까워해주는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
미술사에서 이탈리아는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인가?
서양미술사 측면에서 본다면 90% 이상이다.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당시 서양미술의 보고였다. 특히 17~18세기 고전미술 시대에는 로마와 이탈리아에 빚지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다. 르네상스도 14세기 피렌체에서 시작됐다. 그만큼 예술 전반에 걸쳐 뛰어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과거 유럽의 돈 많은 집안 자제라면 모두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랜드 투어’가 바로 그것이다다. 유럽의 예술학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는 자국의 예술 전공 학생을 대상으로 ‘로마 대상’을 시상하는데, 수상자에게 로마에서 공부할 기회를 준다.
이탈리아에 가면 학교에서 배웠던 서양미술의 보물을 곳곳에서 만난다. 예술 전반에 걸쳐 뛰어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이 나라의 문화적 힘에 매료되는 순간이다.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미술 작품을 감상했을 듯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폭풍우 치던 날 찾아간 로마의 빌라 파르네시나가 기억난다. 벽에는 라파엘로가 남긴 ‘갈라테이아의 승리’가 그려져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회화로만 알고 있는데, 그 벽화가 있는 방과 주변 공간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오는 순간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평면으로만 보던 작품이 공간과 어우러져 들어오는 그 경험이 의미 있다. 건축물, 그 안의 벽화, 유적지 등은 그곳에 가야 하는 여행의 동인이 된다.
미술사가가 아닌 대중의 시선으로 볼 때 매력 넘치는 이탈리아의 도시를 꼽는다면?
트렌드에 민감한 편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한 곳만 꼽자면 밀라노다. 스쿠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마저 패션 감각이 출중했다. 밀라노는 지금도 손에 꼽는 패션과 미식의 도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디자인이나 패션을 대하는 방식이나 디테일이 남다른 것 같다. 수천 년을 이어온 미학과 예술의 역사가 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을 것이다.
독자에게 ‘이곳만큼은 꼭 가보라’고 추천하는 여행지가 있나?
당연히 피렌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너무 좋아 당초 계획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탄생지이자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구시가 중심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는 천천히 걸어야 한다. 특히 구도심은 작고 아담해 걷기에 딱 좋다. 화창한 날, 겨울과 여름 언제든 좋다. 한 곳을 더 추가하면 시칠리아 시라쿠사다. 이곳 역시 계획한 일정을 바꿔 더 오래 머물렀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스토리가 전해오는 곳이다. 어릴 적 만화에서 본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장소라니, 흥분됐다. 시라쿠사 역시 모든 것이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피렌체와 시라쿠사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다.
이탈리아 여행 고수로서 초보 여행자가 알아두면 도움이 될 만한 여행 팁을 소개한다면?
기차 여행에서 기억해 두면 편리한 팁이 있다. 2등석 이하의 기차표로 여행할 때는 객차에 오르기 전 플랫폼에 있는 등록 기계를 통해 기차표 사용 등록을 해야 한다. 나중에 차장이 표를 검사하러 다니는데, 이때 날짜가 찍히지 않은 표를 내밀면 벌금을 내야 한다. 그런데 그 벌금 액수가 엄청나다. 탑승 날짜가 없는 기차표는 여러 번 사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게 아닐까 싶다. 팬데믹 이후에는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기차 문화에 익숙지 않아 벌금을 여러 번 물었다.
다시 여행 갈 채비를 하고 있나?
진즉 오는 8월에 떠날 비행기표를 예매해 두었다. 독일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를 둘러볼 예정이다. 물론 이탈리아로도 곧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