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20세기 초현실주의 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르네 마그리트(1898~1967, 벨기에). 그 스스로 정답을 규정하지 않았기에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사람들은 끝없이 의문을 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초현실주의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20여 년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초현실주의는 이성과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당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자 한 예술운동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 즉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주로 다루었는데,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등이 초현실주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이들은 이성에 구애하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것끼리 묶거나, 형태를 왜곡하거나, 아무 관련 없는 사진을 뒤죽박죽 결합하는 등의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을 가리고 있다. 우리는 항상 보이는 것 뒤에 가려진 것을 보기를 원한다. 나에게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실제로 나는 테이블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그린다.
- 르네 마그리트
제 위치를 벗어난 일상의 사물
초현실주의는 우리가 보는 현실과는 다른 이면의 세계를 추구한다. 그렇기에 많은 작가가 ‘꿈의 세계’를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르네 마그리트는 예컨대 차가 벽난로에서 나오거나 물컵이 우산 위에 올려져 있는 그림 등으로 ‘현실’이라는 축대 위에 낯선 세상을 쌓으려 했다. 기차, 파이프, 중절모 등 평범한 사물은 모두 제 위치에서 벗어나는 순간 ‘낯선 것’이 된다. 마그리트는 이처럼 상식을 깨는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개척했다.
현대 대중문화에 영감을 주다
친숙한 사물 간 예기치 않은 결합. 마그리트는 이를 통해 상식을 깨고 사고의 일탈을 유도했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 부르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현대 대중문화의 ‘자양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은 비틀즈 등 유명 뮤지션의 앨범 재킷에, 또한 영화 <매트릭스>(1999)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에 영감을 줬다. 그 외에도 건축, 광고 등 대중문화 전반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조르조 데 키리코에게 영감받다
마그리트는 1898년 벨기에 레신에서 태어났다. 양복 재단사였던 아버지와 모자 상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부터 요람 가까이에 거대한 나무 상자가 이상하게 서 있었다든지 사람들이 타고 있는 열기구가 그의 집에 불시착했다든지 하는 별난 기억을 소유했다.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림에 소질을 보이던 그는 1916년 벨기에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920년 중반까지 미래주의와 입체주의 성향의 작품을 그리다가 1922년 우연한 기회에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 도판을 보고는 초현실주의로 완전히 전향했다.
‘이미지의 배반’이 주는 신비로움을 깨닫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 <사랑의 노래>는 고대 그리스 동상의 머리, 고무장갑, 녹색 공을 한데 그린 작품이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물들의 조합은 이질적인 느낌을 주며 낯선 분위기를 풍긴다. 마그리트는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사물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신비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 화가의 길을 걷는다. 말 그대로 기존에 알고 있던 이미지에 ‘배반’당한 것이 전향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이 어머니?
1920년대 후반, 사람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마그리트의 작품을 해석하는 걸 즐겼다. <연인>도 그의 인생과 연관 지어 해석했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그가 열세 살 때 강에 투신했는데, 시신을 건져 올리는 장면을 지켜본 것이다. 당시 흰 잠옷이 위로 젖혀져 어머니의 얼굴을 덮고 있었고, 그 모습이 <연인>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해석이 작품의 배경으로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내 그림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마그리트는 자기 그림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오히려 관람객이 자기 그림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데 실패하면 매우 흡족해했다. 그는 일생 동안 ‘신비’를 강조했다. 사람들이 신비함을 그 자체로 받아들여 낯선 감정에 사로잡히길 원했다. 그래서 마그리트는 자신의 기법이나 의도에 관한 설명 또는 해석을 남기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그림을 본다면 ‘이게 무슨 의미지?’라고 물을 것이다. 내 그림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미스터리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에서 쏟아진 미스터리한 작품들
초현실주의자들은 삶도 예술의 연장선으로 여기며 기행을 일삼았다. 반면 마그리트는 조용한 삶을 택했다. 3년간 파리에서 활동한 마그리트는 아내와 함께 1930년 벨기에로 돌아가 그림 작업에 몰두했다. 평범한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특유의 미스터리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하나의 사물을 보는 여러 가지 시각, 잘못된 거울
1930년대 마그리트는 거울의 특성에 매료되어 <잘못된 거울>을 연작으로 다뤘다. 그가 왜 눈을 그렸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인간의 신체 중 눈이 거울과 같이 사물을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작품 제목에 ‘잘못된’을 붙인 것은 같은 사물을 본다고 모두가 동일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와 마그리트의 교류가 영감을 줬다는 설도 있다. 둘이 교류하던 때 만 레이의 작업실에 거대한 눈 사진이 있었다는 것. 또한 <유리 눈물>(1933)을 발표할 당시 만 레이는 <잘못된 거울>(1928)을 소장하고 있었다.
단순함과 순수함에 더해진 유머 감각
1950년대 이후 마그리트는 이전까지 해온 작품과 다른 성향의 작품을 제작했다. 각각의 요소를 결합해 이질적 구도를 만들던 초기와 달리 그의 후기작은 보다 단순한 요소만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단순함과 순수함이 더욱 강한 시각적 매력을 갖게 한 것. 그럼에도 이미지를 뒤집거나 장난기를 발휘한 일종의 ‘유머’는 변치 않았다. 생뚱맞게 이미지를 전복해 상상력을 자극하는 등 현실에 기반한 초현실주의로 보는 이들을 유쾌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