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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는 세 명의 이순신이 있었다

최근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방영되면서 고려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와 함께 거란 침략으로부터 고려를 구한 세 영웅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체구가 작은데다 얼굴이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낡아 보통 사람보다 낫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사> ‘열전’의 한 구절이다. 이런 혹독한 ‘얼평’을 받은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누란의 위기에 빠진 고려를 지켜낸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948~1031) 장군이다. 얼마나 볼품없었으면 웬만해선 사람의 용모를 갖고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 사관이 그렇게까지 ‘디스’했을까.

 

그렇다면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최악의 미스 캐스팅은 강감찬 역을 맡은 최수종 배우라는 이야기가 된다. 따지고 보면 고려의 공식 사서인 <고려사>가 ‘강감찬=추남’을 공인한 것이니 어쩌겠는가. 

 

귀주대첩 기록화. ⓒ전쟁기념관<br>
귀주대첩 기록화. ⓒ전쟁기념관

 

■ 고려사 ‘인증 추남’

하지만 외모가 무슨 대수인가. <고려사>의 ‘팩폭’에 연결되는 ‘그러나···’를 보라.

 

“조정 대사의 정책을 결정지을 때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이 되었다. 당시의 태평성대를 두고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이라고 생각했다.”(<고려사> ‘열전·강감찬’)

 

그뿐이 아니다. 고려판 ‘세종대왕’으로 추앙받는 현종(재위 1009~1031)의 ‘강감찬 평’을 보라.

 

“1010년(현종 원년) 오랑캐의 전란(거란의 2차 침공) 때 적들이 한강 변까지 깊숙이 침범해 왔다. 당시 공(강감찬)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고려사> ‘세가·현종)

 

1031년 강감찬의 죽음을 알린 <고려사절요>을 쓴 사관은 ‘강 공은 하늘이 낳은 분’이라 극찬했다.

 

“두텁도다. 하늘이 고려 백성을 사랑함이여. 변란이 일어나면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자(강감찬)를 내려보내는구나···. 거란의 침략 때 강감찬은 조정 안에서는 대책 마련에 참여하고, 밖에서는 재앙과 변란을 평정하고 삼한을 회복시켜···.”

 

■ 72세 노장의 출전

이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요사> 등에 나오는 ‘팩트’만으로 강감찬의 이야기를 구성해 보자. 강감찬은 성종 때 치러진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문관’이었다. 그의 활약상은 1009~1010년 거란의 2차 침공 때 처음 등장한다. 거란 성종(982~1031)이 이끄는 40만 대군이 우여곡절 끝에 서경(평양)으로 진군했을 때 고려 조정의 공론은 ‘항복’이었다. 이때 강감찬이 “절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지금은 중과부적이니 (남쪽으로) 잠시 피란하고 추이를 관망해야 합니다.”

 

만약 강감찬이 피란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고려는 ‘강동6성’을 빼앗기고, 임금(현종) 역시 거란 황제 앞에 끌려가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강감찬의 진가는 1018년 12월 거란의 3차 침입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의 춘추 무려 71세 때였다. 흔히 강감찬 하면 귀주대첩으로만 알려졌지만 한 번의 대첩이 더 있다. ‘소가죽으로 강둑을 막아 거란군을 물리친 흥화진대첩’이다. 소배압(생몰년 미상)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고려를 침입했다.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된 강감찬은 대장군 강민첨(963~1021) 등과 함께 거란군을 막아낼 묘책을 세웠다. 기병 1만2000명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큰 동아줄을 소가죽에 꿰어 흥화진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적을 기다렸다.

 

이윽고, 거란군이 강을 건너려 하자 강감찬은 막아놓았던 물줄기를 텄다. 갑자기 불어난 물살에 거란군이 휩쓸려 가고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고려 복병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고려군은 이 흥화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거란군은 이날의 대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쏜살같이 개경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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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는 강감찬을 고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추앙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현종의 청야술

하지만 강감찬은 거란군이 곱게 돌진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강민첨 장군이 자주(평남 순천)의 내구산까지 쫓아가 거란군의 배후를 쳤다. 시랑 조원(생몰년 미상)은 서경(평양) 인근인 마탄(대동강 여울)에서 거란군 1만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럼에도 거란군은 개경을 목표로 진격했다. 강감찬은 동·서북면 병사 1만3300명을 급파, 개경을 수호하도록 했다.

 

거란군이 개경에서 100리 떨어진 신은현(황해도 신계)까지 접근했다. 현종은 이번에는 피란길에 오르지 않고 개경 사수의 의지를 불태웠다. 현종은 백성과 식량을 성안으로 들이고, 성밖을 깨끗이 비우는 ‘청야작전’을 폈다.

 

시간을 벌면 벌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추위에 떨고,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던 거란군이었다. 거란군은 잔꾀를 썼다. 1019년 1월 3일, 소배압이 ‘철군을 알리는 사신’을 개경에 파견하면서 은밀히 정찰 기병 300여 명을 뒤따르게 한 것이다. 이를 눈치챈 고려군은 금교역(황해도 금천)에 이른 거란 정찰병을 모두 죽였다. 

 

■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

거란군은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후퇴한다. 그러나 강감찬은 그들을 그냥 보내줄 수 없었다.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야말로 끈질기게 괴롭힌다. 고려군은 후퇴를 거듭하던 거란군과 귀주(평북 구성)에서 1019년 2월 마지막 대회전을 벌인다. 좀처럼 승패를 가리지 못한 전투였다.

 

그런데 이때 개경에 파견했던 강감찬 휘하의 병마판관 김종현(생몰년 미상)이 거란군을 뒤쫓아왔다. 거란군은 강감찬과 김종현의 포위망에 사로잡힌 형국이 됐다. <고려사>는 “마침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라고 전했다. 기세가 오른 고려군이 총공세를 취하니 거란군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이 귀주의 앞쪽을 흐르는 석천(황화천)을 지나 반령(팔영진)까지 추격했다.

 

“시체가 들판을 덮었고 사로잡은 포로, 노획한 말과 낙타, 갑옷, 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고려사> ‘열전·강감찬’)

 

거란 성종은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얕잡아보고 적국 깊이 들어가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려느냐”면서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일 것”(<고려사>)이라고 펄펄 뛰었다. 반면 고려에는 천고에 빛날 승전보였다. 개선군을 친히 영접한 현종은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 꽃을 몸소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현종이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서 위로와 감탄의 말을 그치지 않았다. 강감찬이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로써 대규모 도발만 세 차례나 감행했던 거란의 침략 의지는 완전히 꺾였고, 동북아시아는 ‘고려-거란-송’이라는 삼각 구도가 완성되었다. 고려는 이제 거란도, 송도 넘볼 수 없는 대국이 된 것이다. 그러니 강감찬을 두고 ‘고려를 위해 태어난 영웅’으로 대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귀주대첩을 그린 기록화. ⓒ전쟁기념관
귀주대첩을 그린 기록화. ⓒ전쟁기념관

 

■ “남편 덕분에 강토를 지켰다”

세 차례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의 영웅이 어찌 강감찬뿐이겠는가. 993년 1차 전쟁에서 세 치 혀로 강동6성을 확보한 서희(942~998)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서희(1차)와 강감찬(3차)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이 있다. 바로 2차 전쟁의 영웅인 양규(?~1011) 장군이다.

 

현종은 2차 전쟁(1010~1011)이 끝난 뒤 전사한 양규 장군의 부인을 위로하며 남편의 공적을 치하한다.

 

“그대의 남편이 ···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해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를 안정시켰다. ··· 이로써 고려의 강토가 보존될 수 있었다.”(<고려사> ‘열전·양규’)

 

왜 이런 영웅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을까. 아마도 전투 중 전사해 기록이 소략한 탓도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속 양규 장군의 행적은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한 1010년 11월 16일부터 전사한 1011년 1월 28일까지 딱 2개월 10여 일치만 남아 있다. 또 아무래도 1차와 3차에 비해 징검다리인 2차 영웅이어서 다소 저평가된 측면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양규 장군은 절대 박한 대우를 받을 인물이 아니다.

 

■ “왕명을 받았지 강조의 명을 받은 게 아니다”

1010년 11월 거란 성종이 정변을 일으켜 임금(목종·997~1009)을 시해한 강조(?~1010)의 죄를 묻겠다면서 침공한다. 거란의 2차 침입이다. 특히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출전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11월 16일 첫 전투(흥화진)부터 도순검사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발목을 잡혔다. 일주일간의 공격에도 흥화진성이 끄떡없이 버티자 거란 황제는 “강조만 붙잡아 내 앞에 보내면 철군하겠다”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 고려의 종묘사직을 받들 것”이라면서 결사 항전을 외쳤다.

 

“거란 성종은 ‘고려군이 결코 항복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읽고 흥화진성의 포위를 풀었다. 거란 임금은 20만 대군을 흥화진 인근인 인주(의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켰다. 나머지 20만 대군은 통주로 진출했다.”(<고려사> ‘열전·양규’)

 

이 흥화진의 항전은 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거란군의 7일 공세에도 끄떡없이 성을 지켜냄으로써 거란의 40만 대군 중 절반인 20만 명의 발목을 묶어둔 것이다. 무엇보다 양규 장군은 이렇게 지켜낸 흥화진을 기반으로 거란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고 반격 작전을 펼쳐 치명타를 안겼다.

 

흥화진을 건너뛴 거란군은 통주성 앞 삼수채 전투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와해시켰다. 그러나 굳게 닫힌 통주성은 역시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와중에 거란군은 흥화진에 거짓으로 꾸민 강조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때 양규 장군은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다”라는 유명한 한마디를 남긴다.

 

■ 당황한 거란군

12월 6일, 거란군은 흥화진에 이어 통주성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곽주성 공략에 나선다. 곽주성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함락되었다. 거란군은 6000명을 성에 잔류시켰다. 그러나 10일 뒤인 12월 6일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양규 장군이 필살의 반격 작전에 나선다. 밤중에 거란군이 잔류한 곽주성을 공격한 것이다.

 

불의의 기습 작전에 거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양규 장군은 성 안의 백성 7000여 명을 구출해 통주성으로 옮겼다. 이렇게 흥화진과 통주성을 사수하고, 빼앗겼던 곽주성마저 탈환하자 거란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원래 유목민인 거란이 전쟁을 벌일 때는 “출병은 9월을 넘기지 않고, 철군은 12월을 넘기지 않는다”(<요사> ‘병위지’)라 했다. 본래 거란의 기본 전략은 정주민(고려·송)의 수확기에 출병해 군량미를 현지 조달하는 것이었다. 또 음력 12월이 지나면 말들을 다시 초원에 방목해야 했다. 그러니 어찌 되겠는가. 전쟁이 길어질수록 거란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친정한 전쟁이 아닌가. 그런 만큼 고려 현종의 무릎을 완전히 꿇려야 황제의 체면이 살았다. 하지만 고려는 그렇게 녹록한 나라가 아니었다. 거란군은 16일간의 공방전에도 불구하고 서경(평양)조차 함락시키지 못했다.

 

거란군은 고려 현종을 쫓아 무작정 남진했다. 1011년 1월 1일 개경을 점령했지만 현종은 이미 피란한 뒤였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그때 고려가 ‘거란군이 철군하면 고려 국왕이 거란(요)에 입조한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했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양규의 반격지(추정)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양규의 반격지(추정)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7전 7승에 백성 3만 명을 구하다

그러자 거란은 1월 3일 기다렸다는 듯이 철군을 결정한다. 거란 측 자료인 <요사>는 “고려가 ‘요(거란)군이 철군하면 고려 국왕이 요에 입조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전했다. 그러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현종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 입조한다’는 구체적인 약속이 보이지 않는다. 철군의 명분을 찾느라 골몰하던 거란 성종이 고려가 강화를 제의하자 ‘옳다구나’ 싶어 덥석 강화를 받아들인 인상이 짙다. ‘입조했다’고 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철군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양규는 철군한 거란군을 곱게 돌려보낼 뜻이 없었다. 1월 17일 귀주별장 김숙흥(?~1011)이 중랑장 보량(생몰년 미상)과 함께 거란 군사를 쳐서 1만여 수급을 베었고, 1월 18일부터 주인공인 양규 장군이 종횡무진 활약한다.

 

“18일 양규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에서 습격했다. 거란군 수급 2000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000여 명을 구했다.”

“19일 양규가 이수에서 석령까지 추격하며 수급 2500여 급을 베고 백성 1000여명을 빼앗았다.”

“22일 양규가 여리참에서 수급 1000여 급을 베고 남녀 1000여 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28일 양규가 애전에서 거란의 선봉을 공격해 1000여 급을 베었다. 얼마 후 거란 군주가 이끄는 대군을 맞아 양규와 김숙흥이 하루 종일 싸우다 ···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고려사절요>는 “양규는 후원군도 없는 의로운 군사들을 거느리고 한 달 만에 일곱 번 싸워 거란 군사를 다수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백성 3만여 명을 구해냈다”면서 “낙타와 말, 무기 등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라고 정리한다.

 

양규와 김숙흥이 전사한 뒤에도 고려군은 거란군이 그냥 압록강을 건너도록 놔두지 않았다. “29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려 할 때 흥화진사 정성(생몰년 미상)이 공격했다.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양규 장군은 한 달 사이 7전 7승의 신화를 이뤄냈다. 그 휘하인 김숙흥과 정성 등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2차 전쟁 후 송나라 사서 <송사>는 “고려 현종이 기이한 대책을 세우고 공격해 침략한 거란군을 다 죽였다”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거란은 계속해서 ‘친조하라’, ‘강동6성을 내놓으라’며 도발했다. 결국 1018년 3차 대규모 전쟁에 나섰다가 강감찬이 이끄는 군사의 철퇴를 맞고서야 고려 침략의 야욕을 완전히 접은 것이다. 고려는 이후 현종의 후손으로 왕계가 이어지며 130년간 태평성대를 이룬다.

 

■ 고려엔 이순신 장군이 세 분 계셨다

서희, 양규, 강감찬 장군의 활약을 더듬어보면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물론 서희처럼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법이 상책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양규와 강감찬이 그랬듯 적군의 전쟁 의지를 끊어놓는 완전한 승리를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양규 장군의 경우 거란 군대를 공격한 뒤 3만 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해냈다는 것이 심금을 울린다. 거란군에 의해 붙잡혀 고초를 겪고 이역만리 거란 땅으로 끌려갈 운명에 처해 있던 백성들을 구해낸 것이다. 이것이 양규 장군이 퇴각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한 으뜸 이유일 것이다. 천고에 빛날 양규 장군의 공이다.   

 

또 하나, 서희·강감찬·강민첨·김종현·조원 등은 칼을 잡아본 적이 거의 없는 ‘문관’ 출신이었다. 즉 전쟁 지휘관은 총칼만 잘 다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전략 전술이 뛰어나야 한다. 문과 장원급제자 강감찬 장군의 경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기묘한 계략이 많았다”(<고려사절요>)는 평이 있다.

 

강감찬에 못지않은 무공을 세운 강민첨 장군은 어떤가. <고려사> ‘열전’은 “서생 출신으로 장군이 된 강민첨은 활쏘기와 말 타기가 장기는 아니었지만 의지와 기개가 굳고 과단성이 있어서 여러 차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양규를 비롯해 김숙흥, 정성, 보량 같은 무장들의 능력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 결국 무관 출신이든, 문관 출신이든 평생 갈고닦은 무예(무관)와 학문(문관)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바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심금을 울리는 대목이 있다. 아무런 군 경력이 없는 71세의 노장 강감찬이 손자뻘인 임금(현종)의 명을 받잡고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터에 군말 없이 나섰다는 것이다. 역사는 나를 비춰 보는 거울이라 했다. 과연 나였다면 강감찬처럼 할 수 있었을까.   

 

근자에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방영되면서 고려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되짚어보면 고려는 송-요-금-원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 독자 외교를 펼치며 동북아 세력 균형에 일익을 담당했던 왕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조선에 한 명뿐인 이순신 장군이 고려에는 세 명이나 있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코리아’라는 국명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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