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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봄의 도시, 달랏에서 한 달 살기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이자 연중 평균기온이 18℃로 쾌적해 ‘영원한 봄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달랏으로 한 달 살기를 떠난 길정우 이사는 다채로운 풍광을 두 눈에 오롯이 담기 위해 걷기를 택했다. ‘걸으면 보인다’는 그의 달랏 여정을 따라가 봤다.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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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내지 않으려 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첫 방문도 아니고 이번이 세 번째다. 달랏 인근 웬만한 곳은 거의 다 걸어서 둘러보았다. 알려진 관광지는 모두 섭렵했으니 이번에는 별달리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한 달 살기’라는 이름조차 부담이었다.

이번 여정의 주된 목적은 ‘멍때리며 걷기’였다. 블로거들이 소개하는 오토바이를 탈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옛 경험으로 충분히 걸을 만한 도시라는 기억 때문이다.

한국에도 걸을 만한 곳이 많은데 구태여 왜 이곳을 찾았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낯설고, 그래서 조금은 호기심이 동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풍광과 사람 사는 모습이 펼쳐지는 곳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따사로운 햇볕과 편안한 기온, 선선한 바람, 꽃과 과일이 넘쳐나고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이라 이곳을 택했다.

달랏에서는 가벼운 식사와 진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또 신선한 딸기와 아보카도 스무디를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시장이 곁에 있다. 근처에 성당들이 있다는 점도(불자를 위한 절집도 곳곳에 있다) 영신적 휴식을 찾아 나선 나에겐 큰 보너스다. 적어도 세 번째 방문을 위해 마음먹고 시작한 베트남어 공부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극이자 남게 될 보람이다. 길거리의 간판 정도는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안고 떠나온 나들이다. 걸으면서 눈에 담은 아름다운 달랏의 풍광들을 소개하고, 걷기를 즐기는 이들을 위해 싫증 나지 않을 만한 동선을 알려주고자 한다.

오래 머무르면 느껴지는 달랏의 매력

 

따뜻한 봄 날씨가 가장 소중한 자산

달랏은 프랑스인에 의해 탄생했다. 아니, 원래는 베트남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랏족이 살던 지역이고, 달랏이란 ‘랏족이 살던 지역’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국적의 알렉상드르 예르생 박사 일행이 1893년 이곳을 발견하고 당시 프랑스 식민정부에 천거해 휴양지로 본격 개발했다. 이후 라틴어에 근거해 ‘모든 이에게 즐거움과 신선함을 주는’ 도시라는 그럴듯한 이름, 달랏으로 재탄생했다.

베트남 중남부 고원지대에 있는 달랏은 연중 봄 날씨다. 특히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비도 내리지 않는 건조한 기간이다. 이런 날씨 덕에 꽃과 채소와 과일이 풍성하다. 한자로 도시 이름을 다락(多樂)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달랏을 여행하면 다양한 종류의 꽃을 만날 수 있다 ⓒ 길정우
달랏을 여행하면 다양한 종류의 꽃을 만날 수 있다 ⓒ 길정우

애초 프랑스인들의 피서지 겸 휴양지로 조성한 도시인지라 색다른 분위기의 유럽풍 건물이 곳곳에 남아 있다. 베트남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지, 사랑의 도시라는 명성이 무색하지 않다. 인구 40만이 조금 넘는 이 도시는 요즘 한국 단체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하루에도 예닐곱 팀이 도심 가운데 쑤언흐엉 인공호수 주변을 누빈다.

달랏의 가장 큰 매력은 봄 날씨와 함께 어디서든 마주치는 젊은이들이 주는 생동감이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도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학생들의 등하교 시간이 이 도시의 러시아워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상점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도 거의 대부분 앳된 얼굴이다. 달랏의 식당이나 매점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다. 가족 3대가 오순도순 매달려 일한다.

 

아스라한 추억이 떠오르는 곳

베트남은 공산당 1당 체제의 사회주의국가다. 도시 곳곳에 국민의 단합과 정신 무장을 강조하는 구호가 붙어 있다. 배경에는 연꽃이 흔히 등장하는데, 베트남의 나라꽃이다. 꼭 사회주의국가여서가 아니라 한창 발전해 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구호가 먹힌다. 우리도 과거에 그랬다. 이처럼 우리의 지난날을 회상하게 만드는 나라이기 때문에 더욱 끌리는 면도 있다. 우리 기억 속에 아스라한 추억을 만나게 해주는 곳이 지금의 베트남이다. 그래서인지 따사로운 햇볕과 호수 둘레길에서 아침 저녁 마주하는 선선한 바람마저 친근하게 느껴진다.

알렉상드르 예르생 공원의 석상 ⓒ shutterstock
알렉상드르 예르생 공원의 석상 ⓒ shutterstock

무언가 인상적인 볼거리를 기대하고 이곳을 찾는다면 실망할지 모른다. 반면, 한가롭게 산책하고 호숫가에 앉아 머리를 비우거나 글쓰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작정으로 달랏을 찾은 이라면 머물 가치가 충분하다. 단, 이런 경우라면 숙소의 위치 선택이 중요하다.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호수 둘레길 이외에는 인도라 해도 평탄치 않은 곳이 적지 않아 걷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오토바이가 가장 긴요한 교통수단인 만큼 인도의 상당 부분은 공용 주차 공간이다. 그러니 도보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동선에 유념해 숙소를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특별한 음식이나 멋진 식당을 찾아 달랏을 방문한 이들은 크게 놀랄 만한 경험을 하긴 어렵다. 그래도 꽃과 채소와 과일이 풍성하니 아보카도, 딸기, 아티초크, 망고 등을 이용한 음료와 음식은 한껏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베트남의 대표적인 커피 산지라는 명성이 말해 주듯, 어느 카페에서든 풍미 가득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아울러 커피에 다양한 맛을 가미한 음료도 시음해 볼만하다. 갖가지 과일로 만든 주스, 스무디, 아이스크림까지. 이런 맛에 달랏을 찾는다고 생각하면 특별한 음식이 없다고 불평할 일은 아니다.

또 베트남 각 지역의 명물 음식도 이곳에서 모두 맛볼 수 있다. 개인적인 솔직한 제안은 남들의 평가와 제안을 참고는 하되 그저 숙소 인근에서 ‘보물찾기’하듯 지역 주민들이 즐겨 이용하는 로컬 식당을 찾는 것이다. 크지 않은 도시이고, 숙소 근처에 식당이 모여 있어 메뉴를 고르는 데 어려움은 없다. 남들 이야기를 듣고 기대에 못 미친 음식에 실망하느니 자신의 경험치와 선구안을 믿어보라는 말이다. 이곳 현지 음식의 맛과 품질은 별 차이가 없다. 좋게 말하면 음식 품질의 평준화다. 식당의 청결도와 서비스 정도의 차이가 오히려 크다. 그러니 후더분한 로컬 식당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비싼 돈 내고 조금 격조 있는 곳에서 식사를 할 것인지 결정하면 된다. 닭볶음탕과 달팽이 요리가 이곳의 대표 음식이지만, 개인적으로 경험 삼아 맛보라고 할 뿐 ‘강추’하지는 않는다.

연중 봄 날씨인 달랏에는 과일과 채소가 풍성하다. ⓒ 길정우
연중 봄 날씨인 달랏에는 과일과 채소가 풍성하다. ⓒ 길정우

격동의 역사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

흔히 들르는 명소 이외에도 프랑스 통치 시절(1884~1954)의 그럴듯한 건축물이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다만 관리가 소홀해 옛 모습의 아름다움을 기대하면 실망이 앞선다. 그래도 눈을 크게 뜨고 살피면 격동의 역사 속에 살아남은 이들의 삶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도심의 성당 건물이나 달랏을 대표하는 한두 개의 호텔, 기차역,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집무실과 여름 별장, 달랏이라는 도시의 출발을 알린 스위스 출생 프랑스 귀화 세균학자이자 의사인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세운 고등학교(현재는 달랏 교육 대학교) 건물 등이 모두 당시 건축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색다른 풍경을 만나는 묘미

꽃의 도시 달랏에서는 철쭉과 수국, 국화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사루비아, 팬지, 맨드라미와 장미도 한 공원에 피어 있고 꽃 가게에선 꽃을 피운 동백까지 판다. 꽃을 피운 벚나무 묘목을 길가에 늘어놓고 판매하는데, 설날맞이 준비를 하는 광경이라고 한다. 호텔이나 사무실 입구에 벚꽃 피운 묘목을 놓은 뒤 갖가지 신년 장식을 하며 새해를 기다린다. 도심의 가로등엔 신년 축하 메시지가 후원 회사나 식당 이름과 함께 장식되고, 정부와 공산당에서 보내는 단합 메시지도 그 사이에 섞여 이방인의 눈길을 끈다.

날씨 다음으로 달랏이 여행객에게 주는 매력은 역시 저렴한 물가다. 누구는 바가지 경험을 토로하지만 전 세계를 누비는 한국인의 눈치를 누가 피할 수 있으랴. 택시, 식당, 숙소 등 대부분 한국 기준으론 저렴하다. 처음엔 남들처럼 매번 우리 돈으로 환산했지만 이내 부질없는 일임을 알아차렸다. 그저 적절한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달라는 대로 지불하면 된다.

볼거리, 먹을거리를 이 정도 이야기하고 나면 한국 여행사들이 달랏 여행에 이틀 정도만 할애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런데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곳을 일부러 찾아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에겐 맛있는 음식과 좋은 식당에 대한 기억이 남고, 누군가에게는 교회나 사찰의 거룩한 분위기가 추억거리다. 나에겐 봄의 따사로운 햇살과 아침저녁 호숫가에서 느껴보는 선선함이 달랏의 매력 가운데 백미다.

여행의 묘미는 색다른 삶의 풍경을 마주하는 것이다. 거리를 배회하며 로또를 파는(달랏에서 유일하게 걸어 다니는 직종) 할머니의 모습, 가게 일을 도우며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 학교 뒷골목에서 붕어빵을 파는 아주머니 등 우리의 과거, 현재 모습과 중첩되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다니는 여행의 별미를 달랏에서 맛본다.

걸으면 보이는 달랏의 명소

 

성당과 절집

종교를 갖지 않은 이라도 프랑스 통치 시절 건립된 도시 달랏에 있는 가톨릭 성당 두 곳은 가볼 만하다. 도심에 있는 니콜라 바리 대성당은 프랑스 지배 당시 1931년 착공해 12년에 걸쳐 완공했는데, 47m 높이의 뾰족탑을 가진 로만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첨탑 십자가 위에 수탉 조형물이 있어 ‘수탉 성당’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성당 한편 소나무 사이에 파티마의 성모상이 있다. 언제 들러도 예쁜 꽃으로 꾸며져 있고, 주변을 벤치가 둘러싸고 있어 묵상하기 좋은 곳이다. 오전에 가면 새소리가 제법 시끄럽다. 성모마리아상 밑에는 “죄를 회개하고 속죄하며 어머니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쳐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니콜라스 바리 대성당 ⓒ shutterstock
니콜라스 바리 대성당 ⓒ shutterstock

성당 본관을 나오면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예수 석상이 성당을 품고 있는 구도의 거룩한 구역에 도달한다. 이곳은 사람들이 늘 지나치는 삼거리인지라 별달리 주목을 끌지는 않지만, 도시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크레이지 하우스’라고 불리는 ‘항응아빌라’ 가는 길에 지나치게 되어 있어 무심한 관광객이라 해도 놓칠 수 없다.

또 다른 곳은 도멘 드 마리(Domaine de Marie) 성당이다. 1930년에 완공된 성당은 원래 수녀원이었고, 1943년에 재건되었다. 빨간 타일로 덮인 지붕과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건축물에 등장하는 핑크빛 석회 벽면 양식이 이국적인 느낌을준다. 성당 뒤편으로 나지막한 수녀원 건물 세 채와 잘 다듬어진 꽃 정원이 바지런한 사람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이 성당을 찾은 날, 할머니 두 분이 정원에 물도 주고 오는 손님들에게 수녀원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수녀들이 장애 아이들을 건사하고, 이들에게 옷가지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성당 뒤편 상점에서 판매한다. 한국전쟁 직후 제주도에 가톨릭 신부로 부임해 성이시돌목장을 세우고 양을 키워 스웨터를 만들어 팔며 선교 사업을 했던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의 스토리가 문득 떠올랐다.

절집으론 죽림선원을 꼽을 수 있다. 로빈 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이동하기에 색다른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뚜엔람 호숫가에 자리 잡은 스님들의 선방까지 13분 남짓 이동하는데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풍경이 시원하다. 달랏 외곽의 비닐하우스와 소나무 숲이 이곳의 상징이자 명소임을 확인하는 여정이다.

죽림선원의 불상 ⓒ shutterstock
죽림선원의 불상 ⓒ shutterstock

이름 그대로 스님들의 선(禪) 수련 공간이다. 1994년에 완공되었으니 오래된 절집은 아니지만 호찌민의 대통령궁을 설계한 건축가 응어비엣투의 작품이다. 조용하게 경내를 둘러봐야 할 곳인데 단체 여행객의 시끌벅적한 소음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래도 이따금 바람 따라 귀를 스쳐가는 풍경 소리가 영락없는 절집이다.

달랏에서 가장 큰 절인 죽림선원 ⓒ 길정우
달랏에서 가장 큰 절인 죽림선원 ⓒ 길정우

어느 종교 시설이든 일단 그곳에 가면 마음을 가다듬고 경의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향이나 촛불을 밝히고 지갑 속 적은 돈이라도 놓고 나오면 항시 마음이 편안해진다.

경내에는 연못이 있고 가득한 잉어들은 여유롭다. 커다란 사찰, 특이한 모양새의 선원들이 모여 있는데 입장료가 없는 대신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다. 다양한 꽃과 대나무를 포함한 시원스러운 나무들이 마음에 평안을 주는 사찰이다. 다음에 오더라도 이른 아침 7시 30분에 개장하는 첫 케이블카를 타고 조용할 때를 찾아 머물고 싶은 공간이다.

다만 점심 시간대(대략 오전 11시 30분~오후 1시 30분)에는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는다. 거리로는 3km 정도 떨어진 절집을 오가는 이 여정 또한 단체 관광객들은 케이블카 왕복편을 이용할 필요 없이(왕복표가 훨씬 저렴하지만) 절집 앞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다음 방문지로 향한다. 나는 느긋하게 경내에 머물다가 언덕 아래 뚜엔람 호수로 걸어 내려갔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인공 담수호인데 현지인 사이에 호수의 해질 녘 풍광이 아름답다고 알려져 젊은 남녀가 즐겨 찾는 명소라고 한다. 베트남 남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하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자연 속에 그럴듯한 리조트 호텔 한두 곳이 있으니 다음 방문에는 그저 조용하게 이곳에서 며칠 머물 생각이다. 이 호수를 가로질러 점토로 만든 조형물로 조성된 소위 ‘클레이 터널’까지 최단 거리 이동 수단인 나룻배를 운행한다. 선원에서 내려가는 길목에 붙어 있는 선착장 큰 광고판을 놓칠 수 없다. 탑승객 숫자별 가격표까지 친절하게.

 

마지막 황제의 흔적들

달랏에는 베트남 구엔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별장 세개가 있다. 이 중 하나인 제3궁전은 가족을 위한 여름 휴양지로 지었다. 제3궁전 입구 표지판이 보이자 바로 우측으로 부티크 호텔과 점잖은 색으로 벽을 칠한 카페에 먼저 눈길이 간다. 메뉴 소개도 그럴듯한 것이 분명 이 궁전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겨냥하고 있다. 단지 버스로 이동하며 카페를 지나치는 단체 여행객이 아니라 나처럼 걸어서 찾아 나선 외국인들이 대상이다.

제3궁전의 뒤뜰 정원 ⓒ 길정우
제3궁전의 뒤뜰 정원 ⓒ 길정우

궁전은 소박하고 곳곳에 수리해야 할 부분이 보이지만 달랏시나 럼동성 당국자들이 서둘러 개선하려는 것 같지는 않다. 나라 잃은 마지막 황제이자 인민들을 살피기보다는 가족의 호화 생활이 먼저였던 통치자의 흔적을 시시콜콜 부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미뤄 짐작해 본다. 그저 기록용으로 다녀왔다는 정도의 느낌이다. 그에 비하면 제1궁전은 그나마 역사 속 얘깃거리가 있으니 두 궁전을 합쳐 바오다이 황제의 삶과 베트남의 현대사를 짚어보면 될 일이다.

바오다이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13대 황제이자 베트남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다. 1926년에 황제로 등극했으나 1945년 호찌민이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을 선언하자 퇴위한 비운의 황제다.

제3궁전은 1933년부터 5년에 걸쳐 프랑스 건축가 폴 베이세이르(Paul Veysseyre)의 설계도에 근거해 지은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물로, 프랑스식 정원에 오히려 눈길이 간다. 제1궁전이 집무실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이곳 제3궁전은 말 그대로 가족 별장 느낌이 강하다. 아들, 딸들과 함께 온 가족이 시간을 보낸 공간의 흔적이 기억에 남는다.

제1궁전은 건물 자체보다 입구에서 들어가는 길지 않은 숲길과 프랑스풍 건물 및 바오다이가 심었다는 반얀트리가 명물이다. 사진만 찍고 돌아서기 아쉽다면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해도 좋을 공간이다.

 

뜻하지 않은 명소, 자수(刺繡)박물관

도심을 돌아보는 여행객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달랏 교육대학교와 헤리티지 골프장이 갈라지는 오거리에서 북쪽으로 쭈욱 올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반하잉 선원을 만나게 된다. 가꾸지 않아 어수선하지만 대형 황금 불상과 좌불상 등 수많은 불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주로 현지인이 찾는 사찰로, 한쪽에선 대대적인 수리 작업 중이고, 지난날의 사찰 흔적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지나칠 만도 한데 내 눈에 뜨인 보살의 석부조상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같은 길을 타고 2~3km 더 가면 단체 관광객이 들러 가는 TTC 월드가 있다. 그 내부에 놀이공원도 있고 남녀가 기념사진을 찍는 ‘사랑의 계곡’도 있다는데 나에겐 별 매력이 없는 곳이라 입장료 25만 동(약 1만3000원)을 아끼기로 했다. 어두워지면 시작한다는 나이트 라이트 쇼를 선선할 때 데이트 겸 해본다면 오히려 끌릴 것 같았다. 모처럼 5~6km 걷자고 나선 길이니 어딘가 둘러보고 싶었는데 마침 놀이공원 맞은편에 자수박물관 겸 민속관(민속촌이라기엔 규모가 작아)이 있어 들어갔다. 여행의 재미란 이런 것인가. 예상치 않게 흥미로운 전시와 풍경을 만났다.

자수박물관 내부 정원 ⓒ 길정우
자수박물관 내부 정원 ⓒ 길정우

XQ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는 자수공예회사 겸 교육센터를 설립한 호앙레 쑤언(Xuán)과 보반 꾸안(Quán) 부부의 이름 앞 글자를 합친 것이다. 이 부부는 1990~1992년에 자신들의 수공예 작품을 발표해 유명해졌는데 1992년 말 달랏으로 이주해 자수 강좌를 개설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2000여 명의 장인을 배출했다.

베트남 여인들의 섬세한 솜씨로 만든 많은 작품과 전통의상,액세서리는 물론 실크 제품으로 많은 나라와 문화 교류가 일어나는 현장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고풍스러운 정원까지 덤으로 즐기고 나왔다. 어느 나라든 고유의 의상, 특히 예식을 위한 장식은 우아하고 세련미 넘치는 아름다움이 있다. 베트남도 예외가 아니다.

건너편 ‘사랑의 계곡’에서 기념사진을 찍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으나 이곳을 떠나기 전에 자수박물관은 꼭 들러보았으면 한다. 과거엔 무료입장이었다고 하지만 10만 동(해설사와 동행하면 15만 동)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럼동성 박물관에서 베트남 현대사 엿보기

럼동성의 수도 달랏을 찾은 만큼 추가로 이곳의 역사를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는 럼동성 박물관을 권한다. 바오다이 제1궁전 가는 길에 있으니 일부러 둘러 갈 필요도 없다. 늘 한산하고 건물은 낡았지만 베트남의 현대사와 지역 유물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건물 뒤편으론 황제의 비가 한때 머물던 건물과 그에 딸린 정원이 있다.

볼거리를 찾아 일부러 달랏을 방문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날씨와 자연의 혜택을 맛보려는 여행이라면 쑤언흐엉 호수 둘레길을 꼭 걸어서 돌아보길 권한다. 5km 정도인데 단체 관광객은 일부 구간만을 마차나 7~8인승 오픈카를 타고 둘러본다. 중간중간에 쉬어 갈 만한 공원이 있으니 그저 짜임새 있는 일정 가운데 한 시간 정도 한가로움을 맛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적어도 ‘크레이지 하우스’를 들를 시간이면 그 대신에 포함시켜도 될 일정이라고 생각한다.

럼동성박물관 전경 ⓒ 길정우
럼동성박물관 전경 ⓒ 길정우
쑤언흐엉 호수 ⓒ 길정우
쑤언흐엉 호수 ⓒ 길정우
달랏 한달 살기 노하우

▶오전 9시경이나 오후 4시경, 쑤언흐엉 호 수 둘레길 걷기(햇볕 방향을 감안해 걸어야 한다.)

 

▶오전 10시경, 람비엔 광장 오페라하우스 앞 꽃 계 단에 앉아 호수 내려다보며 따사로운 햇볕 쬐기

 

▶오전 7시 30분, 첫 케이블카 타고 죽림선원 나들이하고 대나무 아래 벤치에서 멍때리기

 

▶새로 등장한 2층 무개차 관 광버스 타고 달랏 볼거리 일람하기

 

▶ 알렉상드르 예르생 공원 둘러보며 도시의 탄생 상기하기

 

▶ 광장 내부 ‘GO 마켓’ 안의 슈퍼마켓 들러 베트남인들의 일상생활 들여다보기

 

▶니콜라 바리 대성당 미사에 참석해 주민들의 깊은 성심 확인하기

 

▶라비엣(La Viet) 커피숍에서 워케이션을 즐기는 젊은 외국인들 혹은 선물용 커피를 대량 구매하는 한국인들 마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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