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를 쫓는 프로파일러의 심리 추적을 실감 나게 그린 SBS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 화제다. 2018년 출간된 동명의 책이 원작. 저자 고나무는 14년간 한겨레신문 기자로 일하다 현재 실화를 이야기로 만드는 기획사 대표를 맡고 있다. 자기만의 콘텐츠로 세상에 없던 시장을 만들어낸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나무
-1976년생
-팩트스토리 대표
이 책은 주인공의 전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고 관철시킨 그들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팩트스토리 고나무 대표는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서두에 이렇게 썼다. 이 책은 연쇄 살인범을 쫓는 프로파일러의 추적기인 동시에, 한국 경찰 시스템 안에 새로운 팀을 만들어 돈과 인력을 투입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일갈이다. 고나무 대표의 행보도 어딘가 이와 비슷해 보인다. 그는 15년간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범죄 전문 르포 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향해 기꺼이 방향을 틀어 황무지나 다름없던 콘텐츠 시장을 개척한 것. 그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웹소설, 웹툰으로 만드는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그가 발굴한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 판권으로도 팔렸는데, 현재 SBS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회사 설립 5년 만에 M스토리허브로부터 10억원의 투자 유치를 받아 성공을 증명했다. 기존에 없던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얘기는 언제나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든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교수와 의기투합해 쓴 책이라고 들었다. 그 과정이 궁금하다
2016년 출판사의 제안으로 처음 만났다. 당시 난 한겨레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세 권의 르포 논픽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했다. 권일용 교수는 워낙 명성이 드높았던지라 일간지 사회부 기자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이미 그전부터 여러 차례 출간 제의를 받았지만 다 거절하셨다고 하더라. 다행히 나와는 얘기가 잘 통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마음이 잘 맞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권 교수님이 책에 담고자 하는 내용, 목적 의식, 방향성이, 르포 작가로서 내 고민과 비슷했다. 프로파일러 권일용 개인의 영웅담이 아닌, 동료들의 얘기를 함께 담는 동시에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의 진면목을 그린다, 피해자분들을 배려하는 등 주제 의식이 서로 맞아떨어진 거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중요하다. 연쇄 살인범의 얘기를 다루면 어쩔 수 없이 잔혹하고 엽기적인 살인 방식을 묘사해야 하는데, 흥행을 위해 이런 부분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작품도 많다. 하지만 권 교수님은 그분들이 처한 고통이 어떤지 옆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에 범죄를 묘사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기로 했다. 나 역시 범죄 전문 기사를 쓰면서 피해자 트라우마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권일용 교수는 고 대표와의 첫 만남에서 ‘돌아이’ 기질이 통했다고 회상했다는데
유튜브에서 그런 말을 하신 것 같다. 장난스럽게 표현하신 거지, 어디 가서 싸우고 다닌다는 뜻은 아니다.(웃음) 나나 권 교수님이나 조직에는 잘 적응했지만 일할 땐 고집스럽고 분명한 스타일이다. 그런 면에서 권 교수님과 처음부터 잘 통했고, 지금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선배이자 형이 되었다.
미국의 르포 논픽션 저서 <마인드 헌터>와 <머니볼>이 중요한 레퍼런스였다고 들었다
권 교수님과 윤외출 경무관님 두 분 모두 이 책을 읽었다. 두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내가 좋아하던 책이기도 하고. 이런 우연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동질감을 느꼈고, 더 끈끈해질 수 있었다.
책을 쓰면서 두 가지 면을 참고했다. <마인드 헌터>는 저술의 레퍼런스이자 계약의 레퍼런스다. 초고를 쓴 르포 작가와 전문가 취재원이 공저자 관계로 협업한 이유는 <마인드 헌터>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순수 창작 소설가가 화가라면 르포 작가는 등산가다. 오를 수 있는 큰 산이 없다면 등산가는 아무것도 아니다. <머니볼>은 과거 존재하지 않았던 작업 방식을 밀어붙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책이라 레퍼런스로 삼았다. 한국 경찰 조직에 없던 프로파일링 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팩트스토리가 영상화 계약을 한 첫 드라마가 성공적이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책을 쓰는 것과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책은 혼자 혹은 둘이서 쓸 수 있지만 드라마는 수십, 수백 명이 모여 만드는 엄청난 작업이다.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한 드라마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다.
특히 프로파일링 팀을 대중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없던 팀을 만들기까지의 어려움을 잘 묘사하는 등 우리가 책을 쓸 때 가졌던 문제의식과 지향점이 드라마에 잘 표현되어 감회가 새롭더라. 권 교수님은 1화를 보고 우셨다고 한다. 또 드라마에서 직접적인 잔혹 범죄 묘사를 크게 줄인 것도 의미가 컸다. 사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드라마 감독님과 작가님이 우리의 고민을 많이 이해해 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책을 쓴 저자의 의견은 어떤 식으로 드라마 팀과 공유되는가?
판권 계약을 할 때 ‘제3자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이후 드라마 각본 회의를 할 때 여러 차례 참석했다. 권일용 교수님은 나보다 훨씬 많이 회의에 참석하신 걸로 안다. 프로파일링 직업에 대한 묘사, 범죄 피해자에 대한 견해와 의견 개진, 전문 직업인으로 장면 묘사 등에 자문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
자문한 것 중 특히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면?
과거 동료들이 드라마에 등장한 서울지방경찰청 기자실이 최근 드라마에서 본 기자실 중 가장 리얼했다고 말하더라. 서울시경 기자실은 다른 기자실과 사뭇 다르다. 각 언론사의 시경 캡틴들만 들어가는 곳이라 후배 기자는 들어갈 수 없는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곳이다. 그만큼 한국 언론의 취재 시스템과 관행을 모르면 제대로 묘사하기 힘든데, 내가 드라마 제작진에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기자실 사진을 찾아 드렸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가 방영된 후 동료 기자들에게 카톡을 많이 받았다.
비록 온 땅이 가린다고 할지라도, 사악한 행동은 자꾸 일어나
사람의 눈에 띄고 말지니….
- 윌리엄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성공으로 회사 인지도가 높아졌을 것 같다. 사업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이쪽에서는 원천 스토리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드라마 공개 후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과 같은 전문직이나 실화 스토리를 많이 갖고 있을 것 같은데 혹시 협업할 수 있느냐는 제안을 많이 받고 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예술이나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관적 평가가 가능하지만 사업은 명확히 숫자로 얘기해야 한다. 모든 사업의 평가는 돈이니까 드라마로 인한 긍정적 평가가 사업성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현재까지 15개의 웹소설과 르포를 만들었고, 5건의 영상 판권을 계약, 6건의 실화 영화 취재 컨설팅을 진행했다. 웹 콘텐츠, 특히 웹툰 시장은 계속 확대되고 있으니 기회는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글은 안 쓰고 사업가로만 살고 있다. 수익이 많이 나서 회사 시스템이 안정되면 다시 책을 쓰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기자라는 안정적 직업을 버리고 회사를 만들 때 두렵지는 않았나?
2013년 지존파에 납치됐다 생존한 여성의 이야기를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적이 있다. 당시 기존의 기사 방식을 벗어나 미국 논픽션 기법으로 드라마틱하게 썼는데, 영화사 네 군데에서 전화를 받았다. 사실 기사를 쓰기 전에 ‘영화나 드라마 제작사에서 전화가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 거다. 이 일이 내게 굉장히 큰 내적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 후 2~3년간 주말과 퇴근 후에 실화 모티브 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했다. 미국과 일본의 실화 르포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화된 실제 케이스를 꼼꼼히 조사하고 파악해 나가는 등 준비를 했고, 2017년 내 사업 아이디어를 회사에 제출했다. 이사회에서 통과되면서 자회사 팩트스토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경영자로서 가장 어려운 점은?
마블 편집자 작가였던 스탠 리는 훗날 경영 담당 임원이 된 뒤 달라진 자신의 업무에 대해 “창의적인 일을 하기보다 창의성에 대해 대화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지금 내 업무는 창의성 자체가 아니라 창의성이 시장에서 수익을 내어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을 판단할 때 시장성은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범죄 실화 모티브 웹툰을 기획할 때, 카카오나 네이버 웹툰의 최근 2년치 작품을 전수조사해서 범죄 실화물이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 살핀다. 시장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다. 영화나 드라마화가 가능할지 타진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스토리가 얼마나 참신한지도 고려해야 한다.
대표로서 업무와 관련해 판단을 내릴 때, 그저 막걸리 마시다가 ‘좋으니까 한다’ 같은 식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분명하고도 명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돈이 안 될 것 같아도 이유가 있으면 할 때도 있다. 철저한 분석과 타당성이 있으면 가는 거다.
일하면서 신이 날 때는 언제인가?
머릿속에서 구상한 실화 스토리 시장을 키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큰 의미고 재미다. 처음 이 시장에 뛰어들 때는 한국에 르포 시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만약 그 시절에 300억원 정도의 시장이 존재했다면 안 했을 거다. 글 쓰는 건 자신 있었고 제법 잘해냈으니 그냥 르포 작가로만 살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블루오션이라고 판단했기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사업을 해오고 있다. 처음엔 탈모도 오고,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울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투자도 받고 드라마도 성공하면서 절반은 인정받은 기분이랄까. 이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끝으로, 팩트스토리에서 기대를 걸고 있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마지막 노래를 들어줘>. 듀스 김성재를 다룬 이야기로, 이미 책으로는 출간되었고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밀수 추적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웹소설 <오늘 밀수범 잡으러 간다>는 실화 모티브에 판타지 요소를 결합한 작품인데, 이 또한 큰 기대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