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폭발적 가능성에 대해선 이견이 없으나
발전이 가져올 명암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다.
전문가의 견해를 바탕으로 AI 기술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시작을 논하기엔 지나온 시기가 짧지 않다. 바둑 기사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은 이미 8년 전 일이고, 챗GPT가 세상을 놀라게 한 지도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작년 이 무렵, <Den>에서도 챗GPT의 등장 이후 변화될 세상에 대해 전문가의 고견을 다뤘다. 당시만 해도 전문가들은 AI에 대한 우려보다 안심과 격려를 먼저 건넸다. 현업에서 인간을 위협하기엔 아직 역부족이라는 뜻이었으리라. 1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AI 기술은 그 어떤 예상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다시 한번 전문가에게 고견을 물었다.
가까운 미래, 할리우드는 AI가 장악한다
짧게는 3년, 길어야 5년 내 <미션 임파서블> 수준의 영화를
AI가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AI 관계자들은 단언한다.
2023년 6월, 마블 스튜디오가 드라마 <시크릿 인베이전(Secret Invasion)>을 공개했다. 이 드라마는 공개 직후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작품의 인트로 영상을 AI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할리우드 미국작가조합의 파업이 2개월가량 이어지고 있었다. 제작사인 마블 스튜디오는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다룬 자사 만화를 원작 스토리에 맞추려고 AI 기술을 이용했다”라고 밝혔다. AI는 이미 할리우드에 상륙했다. 관건은 ‘AI가 할리우드를 장악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가’다.
‘소라 AI’ 공개되자 ‘할리우드의 종말’ 논란
지난 2월 15일 챗GPT AI를 운영 중인 ‘오픈AI(OpenAI)’가 동영상 생성 AI ‘소라(Sora)’의 샘플 영상을 공개했다. 소라는 텍스트를 입력하면 실체 촬영한 것 같은 영상을 최대 1분 길이로 만드는 AI 모델이다. 특히 놀라운 건 현실 세계의 물리법칙을 이해한다는 점이다. “공을 하늘로 던져라”라고 입력하면 공이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까지 표현하고, “비 온 뒤 걷고 있다”라고 입력하면 비에 젖은 도로를 표현하는 것이 그 예다. 언론은 ‘할리우드의 종말’이라 호들갑을 떨었고, 온라인상에는 ‘할리우드가 이제 소라우드(Sorawood)가 된다’는 밈(Meme, 풍자 사진)이 돌았다. AI는 정말 영화 <스타워즈>, <미션 임파서블> 같은 블록버스터를 만들 수 있을까.
챗GPT, 인간 감독 못지않은 연출 역량을 보여줘
IT영상업계에서는 2~3년 전부터 AI를 활용해 10분 내외 길이의 단편영화를 실험적으로 제작해 왔다. 단편영화 <세이프 존(Safe Zone)>은 2022년 12월 공개된 6분 길이의 영화로, AI가 작가와 감독(연출)을 도맡아 제작한 작품이다.
AI 사업가 애런 캐머는 수 개월이 걸리는 대본 작업을 챗GPT로 수십 분 내에 끝내고, 50페이지 분량의 연출 노트까지 만들었다. 그는 재미 삼아 시작했다가 이런 챗GPT의 ‘능력’을 보고 배우와 촬영팀을 꾸려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말하며, “AI가 세상을 바꾸고 있고, 누구나 AI로 자신이 원하던 영화의 변형된 버전도 만들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촬영 없이 AI가 완전히 제작, 영상의 묘한 느낌
배우와 카메라 촬영 없이 온전히 AI로만 제작한 영화도 있다. 12분 길이의 단편영화 <더 프로스트 (The Frost)>가 대표적이다. <더 프로스트>는 미국 광고 제작사 ‘웨이마크(Waymark)’가 자사 AI 광고 플랫폼의 역량을 과시하고자 제작한 영화로, 이미지 생성 AI ‘달리(DALL·E)’ 아티스트를 포함해 7명이 한 팀이 되어 3개월 반 만에 완성했다. 이들은 대본부터 인물의 목소리, 입 모양, 음향과 음악 등 거의 모든 요소를 AI로 제작했다.
이 제작 과정은 AI 기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가장 큰 문제는 달리로 생성한 이미지를 다음 장면에서 동일하게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리에 텍스트 명령어로 ‘털모자를 쓰고 구레나룻을 기른 서양인 남자’를 입력해 이미지를 생성한 뒤 다음 장면에서 이 캐릭터의 옆모습을 다시 생성하면 아예 다른 인물로 이미지를 만든다. 장면의 핵심 요소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동일하게 유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작진은 달리에 각 숏별로 아주 구체적인 것까지 정확한 명령어를 입력했다.
‘소라 AI’ 측, 이미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에 제휴 타진
영화 <더 프로스트> 제작에 참여한 스티븐 파커는 미국 온라인 매거진 ‘인버스(Inverse)’와의 인터뷰에서 ‘3년 안에 AI로 블록버스터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빨라 업계에서는 AI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소라 AI를 만든 오픈AI 샘 올트먼 대표는 지난 3월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인 파라마운트, 워너 브라더스, 유니버셜 등의 관계자와 만나 파트너십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AI에 3년 정도만 투자하면 1990년 대 제작된 독립영화 수준 이상의 작품을 보게 될 것이고, 길어야 5년이면 진정한 블록버스터 제작이 가능할 것이다.
- 이레나 크로닌(Irena Cronin, AI 컨설팅 기업 ‘인피니트 레티나’ 대표)
AI로 만든 영화가 인간 감성을 움직일 수 있는가
AI 기술이 할리우드 영상 시장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전에 고려해야 할 이슈가 있다. 첫째, AI 기술로 만든 영화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가’다. 영화의 마술은 관객의 감성을 사로잡을 때 일어나는데, 과연 AI 배우와 AI 배경 영상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재 AI는 인간이 감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학습해 모방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려고 하지만 아직 인간 예술가만큼의 감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둘째, 만약 AI가 감성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해도 ‘대중이 AI가 만든 영화를 원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지난해 나온 네이버 웹툰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은 AI로 후보정을 거쳤을 뿐인데 AI로 제작했다는 구설에 올라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여러 이슈가 존재함에도 영화 제작 측면에서 AI 활용 비중은 점차 늘어날 것이다. 영화제작자는 무엇보다 비용 절감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수준이 보장된다면 비용이 적게 드는 AI 영상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제작자들은 현재 고비용의 특수시각효과(VFX)를 AI로 대체하는 데 관심이 많다고 전해진다. 수천만 원, 수억 원이 들어가는 VFX를 AI 전문가가 며칠 만에 만들어낸다면 어느 제작자가 이를 마다하겠나.
반복되는 작업이나 낮은 수준의 제작부터 AI로 자동화되어 가고, AI가 장점을 가지는 작업들이 우선적으로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AI가 당장 할리우드의 대작 영화를 만든다고 하기보다는 AI 활용을 통한 효율화와 비용 절감이 빠르게 확산되어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예술가의 몫은 AI에 없는 ‘신비’ 창출
AI 시대에 창작자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는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선구자다. 새로운 기술은 그 자체로 새로운 표현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세상에 공개되고 컴퓨팅 파워가 커지자 예술가들이 디지털 아트를 꽃피운 것이 그 예다.
예술가는 AI를 도구로 활용하며 예술 작품을 창출할 것이다.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유덕형 서울예대 명예이사장은 “AI 시대에 예술의 몫은 기계(AI)에는 없는, 기계가 가질 수 없는 창의적 정신세계, 즉 혼이다”라고 말한다. 2016년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이 AI 알파고와의 제4국에서 알파고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78번째 수로 이긴 것처럼, 예술가만의 ‘78번째 수’를 찾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라고 유덕형 이사장은 강조한다. 인류의 창의성을 놓고 예술가가 기계(AI)와 경쟁하게 된 시대다. 영화제작자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예술가는 ‘창의력’에서 더 깊어져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