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상징
그리스 크레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 소설가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인 <그리스인 조르바>는 50여 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돼 그리스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스 남쪽 크레타의 주도인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19세 이후 자신의 신념대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독일에서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최후의 유혹>이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그렸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오르는 등 그리스 정교회와 갈등을 빚는 바람에 결국 이라클리온으로 옮겨졌다. 크레타 섬과 함께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관광 명소가 되었다. 특히 그가 생전에 써놓은 짧은 비문은 많은 이를 감동시키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에 의한, 카잔차키스를 위한 섬
크레타에 있는 국제공항의 이름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주도에서 차로 30여 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르티야 마을에는 ‘카잔차키스 박물관’이 있다. 이 마을은 카잔차키스의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카잔차키스와 박물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도 그럴 것이 200여 가구 600여 명이 살고 있는 이 조그만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1만 명에 이르니, 작가 한 사람이 책 한 권으로 미르티야를 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 최고의 휴양지
크레타는 기원전 3650년경부터 기원전 1170년까지 미노스 문명을 꽃피운 유적지이다. 하지만 유적보다 자연경관을 보러 오는 관광객이 더 많을 정도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제주도의 4.5배 크기인 크레타는 해안 도로가 1000km에 이르고, 해수욕장만 100개가 넘는다. 섬 전체가 휴양지로 여름이면 그리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관광객이 크레타 해변으로 모여든다. 지중해권이라 겨울에도 해수 온도가 10~15℃ 정도로 따뜻해 해수욕이 가능하다.
어떻게 갈까?
그리스 아테네에서 비행기로 50분 소요
무엇을 볼까?
- 크노소스 궁전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 크레타 섬의 유일한 그리스식 건축물로 로마인들의 침공에도 유일하게 보존된 곳이다. 사방 2km까지 뻗은 하나의 거대한 밀집 건물이어서 ‘궁전’이라고 부르지만 8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도시’에 가깝다. 견고한 성벽이나 성문이 없고 큰 방 등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시설이 없는 것이 특징.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다. 선사 시대부터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르는 크레타의 역사를 집대성해놓았다.
- 발로스 해변
크레타 서부에 위치한 발로스는 신비로운 지형과 옥빛 물색으로 유명하다. 다소 험준한 오프로드를 지나 펼쳐지는 넓은 라군은 감탄을 자아낸다.
안식처
스페인 란사로테
조제 사라마구(1922~2010), 소설가
정부와의 갈등으로 추방된 작가
<눈먼 자들의 도시>로 유명한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조제 사라마구. 그는 거침없는 직설과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로 많은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 종교적 논란을 일으킨 작품 <예수복음>으로 인해 포르투갈의 보수 정부와 갈등을 빚다, 1993년 카나리아 제도의 란사로테 섬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98년, 조제 사라마구가 포르투갈어 작가 중에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 모국 포르투갈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유배지가 아니라 낙원!
란사로테는 스페인령이지만 아프리카 모로코에 더 가깝다. 섬 전체가 화산 지대로 화성 같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섬은 조제 사라마구가 30년 연하의 두 번째 아내와 자연을 만끽하며 은둔 생활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도시에 비하면 지나치게 한적했지만, 기이한 화산지형과 쉴 새 없이 부서지는 대서양의 파도, 그리고 잔잔한 옥빛 해변과 소박한 어촌 마을이 빚어내는 다양한 풍경 덕분에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의 상념을 적은 ‘란사로테 일기’를 책으로 내기도 했다.
전 세계 유명인들의 휴가지
한국인에겐 좀 낯설지만 란사로테는 연중 기온이 20℃에서 25℃ 사이로 따뜻하고 일조량이 많아 유럽인이 즐겨 찾는 피한지(避寒地)다. 특히 겨울휴가 기간인 12월 중순부터 1월 초까지가 성수기다. 캐머런 영국 전 총리는 지난해 재직 당시 브렉시트, 테러 등 산적한 문제를 두고 란사로테에서 휴가를 즐기다 관광객들에게 발각돼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어떻게 갈까?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분 소요
무엇을 볼까?
- 티만파야 국립공원
화산 활동으로 생긴 란사로테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곳곳에서 용암이 뜨거운 열기를 방출, 지열로 인해 물줄기가 분출하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선 활화산에서 올라오는 열로 구운 닭 요리를 먹거나 낙타 트레킹을 할 수 있다.
- 하메오스 델 아구아
란사로테는 이 섬이 낳은 위대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세자르 만리케의 손길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덕분에 란사로테 섬의 모든 리조트는 하얀 건물에 초록 문이라는 일관된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고층 건물은 들어서지 못하게 됐다. ‘하메오스 델 아구아’는 뉴욕에서 활동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세자르 만리케가 만든 첫 번째 예술 작품이다. 화산 분출로 생긴 용암동굴의 해수면 아래로 레스토랑과 공연장을 만들고 지상엔 인공 오아시스를 만들었는데, 일본 온천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 그 밖에
엘 골포(화산지형이 만들어낸 초록 호수), 라 게리아(검은색 포도밭), 뮤제오 아틀란티코(유럽 최초의 수중 박물관)도 이색적이다.
회복의 섬
남태평양 사모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 소설가
요양이 필요했던 허약 체질의 작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보물섬>의 저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생의 마지막 6년을 사모아에서 보냈다. 스티븐슨은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한때 토목 기사를 꿈꾸며 에든버러대학 공과에 입학하기도 했지만 어릴 적부터 허약한 체질과 문학을 좋아한 성향 때문에 법과로 전과해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요양을 위해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글을 썼다.
어릴 적부터 바다와 모험, 글쓰기를 좋아한 그가 서른이 넘어 소설가의 꿈을 이룬 것이다. 1888년, 스티븐슨은 사모아에 정착하면서 한때 건강을 회복하기도 했지만 결국 뇌일혈로 숨졌다.
대저택에 살며 농작법 가르쳐
스티븐슨은 수도 아피아에서 4km 떨어진 베일리마 마을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를 존경한 사모아인들은 1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집을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베일리마 산 정상까지 길을 내 그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 길을 따라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사모아인들에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대작가이기보다 카카오와 파인애플 경작법을 알려준 친절한 이야기꾼 아저씨로 전해진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박물관’이자 그와 가족이 살던 집에는 영국에서 가져온 가구와 식기, 장식품, 그의 저서 등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론니 플래닛> 선정 '가장 합리적인 여행지'
이 말인즉 ‘남태평양에서 가장 저렴한 여행지’라는 것이다. 비치 팔레 해변 옆 숙소는 하루에 조식과 석식을 포함해 우리 돈 3만~4만원 선. 갓 잡은 생선을 튀겨 만든 피시&칩스는 3000원 정도다. 연평균 기온은 27℃ 정도이며, 섬 전체가 열대 식물에 뒤덮여 있어 습도가 높은 편이다. 1, 2월은 우기여서 여행하기에는 3월부터 12월 사이가 좋다.
어떻게 갈까?
피지까지 주 3회 대한항공 직항편 운행(9시간 45분), 피지에서 사모아까지 비행기로 1시간 40분 소요
무엇을 볼까?
- 토수아 오션 트렌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로 손꼽히는 토수아 오션 트렌치는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해구로, 남태평양에서 가장 큰 ‘천연 수영장’으로 불린다. 꽃으로 가득한 열대 정원 아래 사다리를 타고 30m 깊이의 해구로 내려가면 수영을 즐길 수 있다. ‘토수아‘는 사모아어로 ‘거대한 구멍’이라는 뜻.
- 랄로마누 해변
<론니 플래닛>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대 해변’ 중 하나. 설탕 같은 하얀 모래와 시원하게 탁 트인 해변 그 자체로 지상 낙원이다.
도피
남태평양 타이티 (프렌치 폴리네시아)
폴 고갱(1848~1903), 화가
원시적 생명력을 찾아 떠나다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린 폴 고갱은 1822년 11월 파리 주식시장이 갑작스럽게 붕괴되자 전업 화가로서의 삶에 몰두했다. 고갱은 생계를 책임질 수 없게 되면서 가족과 멀어졌고, 이후 파나마, 프랑스 아를 등을 떠돌다 창작에 필요한 자유와 고독, 원시적인 생명력을 찾아 1891년 타이티로 떠났다.
타이티는 고갱에게 자신을 괴롭히던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고달픈 삶의 도피처였다. 열세 살인 원주민 소녀와 동거하며 걸작을 그렸지만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1893년 파리로 돌아갔지만 타이티에서 그린 작품은 팔리지 않았고, 그의 처지는 더욱 나빠졌다. 1895년 6월, 골절과 매독, 심장병, 우울증, 알코올 중독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마지막으로 타이티행 배에 올랐다.
원시 자연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마지막 8년
많은 사건과 고통을 겪은 후 타이티로 돌아온 고갱은 비로소 원시 자연의 목소리와 진실에 주목한다. 그는 서양 중심의 회화를 벗어던지고 타이티의 풍요로운 자연과 순수한 여인들을 원색적인 색감으로 캔버스 안에 담아냈다. 그러나 고갱의 몸과 마음의 병은 점점 심각해졌고, 자살을 생각하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을 유서처럼 그리기도 했다. 1903년, 그는 타이티에서 심장마비로 55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고갱 박물관에는 진품이 없다?
타이티 수도 파페에테에서 50km 떨어진 곳에 ‘폴 고갱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고갱이 1891년부터 3년간 머문 작업실이자 살림집을 개조한 곳이다. 폴 고갱의 작품과 생애가 잘 정리되어 있어 그의 발자취를 찾으려는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고 있는데, 전시된 작품 대부분이 복제품이라는 점은 조금 아쉽다.
어떻게 갈까?
한국에서 타이티까지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도쿄 나리타 공항을 경유해 비행기로 약 12시간 소요
주변 섬 돌아보기
타이티의 정확한 국가명은 ‘프렌치 폴리네시아’다. 프랑스령으로 타이티, 모레아, 보라보라를 비롯해 118개의 섬으로 구성돼 있다.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중심이 되는 섬이 타이티인 까닭에 보통 타이티로 통하는 것.
- 모레아
워런 비티와 아네트 베닝이 주연한 영화 <러브 어페어>의 촬영지. 타이티에서 17km 떨어져 배로는 30분, 경비행기로는 7분 정도 걸린다. 해발 1207m의 토히베아산이 섬 중앙에 우뚝 서 있고 좌우로 병풍처럼 산이 길게 이어져 트레킹을 즐기며 동시에 시시각각 빛깔이 변하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 보라보라
타이티에서 약 240㎞ 떨어진 섬으로, 비행기로 45분 거리. 2002년 BBC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50곳’ 중 한 곳으로 선정했다. 섬 주위를 에메랄드빛 라군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데, 상어와 가오리 떼가 노니는 바다에서의 환상적인 스노클링을 경험할 수 있는 라군 투어가 인기 있다.
영감의 원천
스페인 마요르카
호안 미로(1893~1983), 화가
성공그림을 그리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다
호안 미로는 화려하고 명료한 색으로 자연과 인체, 문자를 상징하는 형태를 자유롭게 표현한 20세기 위대한 화가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잡화상 점원으로 취직했다. 자신의 현실을 비관한 그는 몇 년간 요양을 할 정도로 몸이 아팠다. 이후 1912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와서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해 평생 작품 활동을 했다.
가장 뛰어난 작품을 탄생시킨 영감의 장소
1956년 호안 미로는 평소에 꿈꿔온 마요르카의 수도 팔마로 이주했다. 쇼팽이 마요르카에 대해 “터키옥 같은 하늘, 청유리 같은 바다, 에메랄드 같은 산, 천국 같은 공기”라고 했을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이미 화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였지만 꿈에 그리던 곳에 자신의 집을 갖게 되자 그는 세상과 단절하고 작품에만 매달렸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변화무쌍해 미로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 이때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마 교외에 위치한 그의 집과 작업실은 지금 관광 명소가 되었다.
어떻게 갈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비행기로 1시간 소요
무엇을 볼까?
- 발데모사 카르투하 수도원
수도 팔마에서 약 18km 떨어진 발데모사는 작고 아름다운 언덕 마을이다. 1838년 폐병을 앓던 쇼팽이 요양차 연인인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함께 이 수도원에 머물면서 ‘빗방울 전주곡’ 등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현재 수도원에는 그가 사용한 피아노와 손수 적은 악보 등이 전시돼 있다.
-안익태 기념관
안익태(1906~1965)가 1946년 스페인 여인 마리아 탈라베라와 결혼하고 팔마로 이주하면서 사들여 말년을 보낸 곳이다. 안익태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을 창단해 직접 지휘했고 교향시 ‘마요르카’를 직접 작곡하는 등 1950~60년대 마요르카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