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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이 없는 삶?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오드리 헵번을 그려보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캔버스 밖으로 꺼내고 싶어 조각을 하고, 직업을 체험해 보고 싶어 배우를 하고, 느껴보고 싶어 유럽 여행을 떠났던 임정도 대표. 오드리 헵번 없는 그의 인생은 상상하기 힘들다.

 

임정도. 1982년생, 카페 1953 with 오드리 대표
임정도. 1982년생, 카페 1953 with 오드리 대표
임정도 대표는 어릴 때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그림을 좋아했지만 마음대로 그릴 수 없었고, 사춘기 때 서울로 이사 와서는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외롭고, 힘들고, 꿈도 없고, 어떻게 살지 몰라 방황하던 그 시절에 오드리 헵번을 만났다. 영화 <로마의 휴일> 속 그녀는 비현실적으로 예뻤다. 그 모습에 반한 후 찐팬으로 진심을 다해 그녀를 애호해 왔다. 오드리 헵번은 임정도 대표가 41세가 된 지금까지도 그의 삶에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는 “방송에 한 번 나간 것을 계기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라고 회상했다. 오드리 헵번의 열혈 팬으로 TV에 출연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인연이 이어지고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결국 오드리 헵번 뮤지엄 카페를 열 수 있었다. 취미로 시작한 ‘덕질’이 직업으로까지 연결되었으니 ‘덕업일치’의 산증인인 셈이다.

 

 

오드리 헵번에게 매료된 첫 순간을 떠올린다면?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그림을 무척 좋아했는데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해 숨어서 몰래 그리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왔는데, 친구가 하나도 없어 정말 외롭고 힘든 사춘기를 보냈다. 그때 우연히 TV에서 해주는 <로마의 휴일>을 봤는데, 영화를 보는 2시간 내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로를 받았다. 내 마음속 상처를 보듬어주고 다독여주는 느낌이랄까? 그때부터 오드리 헵번을 좋아했다.

 

오드리 헵번으로 인해 인생 항로가 결정된 것처럼 보인다

오드리 헵번을 잘 그려보고 싶어서 그림을 전공했고, 그녀를 밖으로 꺼내보고 싶어 다시 조소를 공부했다. 배우라는 그녀의 직업이 궁금해 10년간 배우로도 활동했고, 그녀가 살던 곳에 가보고 싶어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오드리 헵번을 테마로 한 뮤지엄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오드리 헵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카페에 오드리 헵번 피겨가 정말 많다

직접 만든 것이다. 조소를 전공했기에 가능했다. 긴 스토리가 숨어 있는데, 이 피겨는 절대 팔지 않는다. 대신 지금까지 딱 2명에게 피겨를 선물했다. 오드리 헵번의 두 아들 루카 도티와 션 페레다. 이들은 아버지가 서로 다르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어머니의 이미지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두 사람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도 경계했다. 하지만 내가 만든 피겨를 선물 받은 뒤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오드리 헵번의 아들과 친한가?

둘째 아들인 루카 도티와는 지금도 연락한다. 그가 ‘오드리헵번재단’ 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비서 역할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 이상한 경험을 했다. 루카를 처음 만나는 날 꿈을 꿨는데, 오드리 헵번이 나왔다. 지금까지 30여 년간 오드리 헵번을 좋아했는데, 그전이나 그 후로도 오드리 헵번이 꿈에 나온 적이 없다. 딱 한 번, 그때뿐이었다. 꿈속에서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마지막에 그녀가 “루카를 잘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꿈인데도 그녀의 주름, 웃음, 표정 하나하나가 너무 선명하고 생생했다. 꿈에서 깨고 2시간 후에 루카를 만났는데, 소름이 돋았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드리 헵번의 아들이 피겨 전시회도 열어주었다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 루카가 “왜 피겨 전시회를 하지 않냐?”라고 물어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내가 전시회를 열어줘도 되겠냐?”라고 하더라. 루카 덕분에 2016년 천안 예술의전당에서 오드리 헵번 피겨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찐팬이 본 그녀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오드리 헵번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달리 무척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으며, 자신감이 없었다. 특히 외모 콤플렉스가 심했는데,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육감적인 여성이 당시 미의 기준이다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자신은 말라깽이에 가슴도 빈약하고, 금발도 아니고, 턱은 각이 졌으며, 발은 크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피부도 안 좋다고 생각했다. 볼품없는 자신을 좋아해줘 감사하다는 말을 늘 했으니까. 나는 그런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고, 동질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위로받은 것 같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도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했구나, 하고.

 

연약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오드리 헵번은 어디에서 위로받으며 살았을까?

패션 디자이너 지방시가 아니었을까? 공식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약혼까지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지방시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친구로 남을 수밖에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소울 메이트로 지냈다. 지방시는 오드리 헵번이 죽자 관을 직접 운구했다. 두 사람은 비슷한 것에 상처받고, 예민하고, 반응하는 등 누구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그녀 역시 정신적으로 지방시에게 많이 의지했고, 누구보다 그의 옷을 사랑했다. 오드리 헵번은 영화를 찍을 때 ‘지방시가 만든 옷 이외에는 일체 다른 옷을 입고 촬영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꼭 넣었다. 그녀는 지방시의 옷을 입을 때 가장 자신감이 넘친다고 말했다.

 

우리가 잘 모르는 헵번의 진짜 모습 하나만 공개한다면?

이런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사실 그녀는 골초였다. 그 시절에는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녀 역시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았다. 술도 즐겼다. 결혼생활이 불행했던 것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두 번 결혼해 모두 실패했다. 술과 담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게 아닐까 추측한다.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오드리 헵번의 유품을 낙찰받았다. 어떤 물건인가?

2017년 오드리 헵번의 유품 200~300여 점이 경매에 나왔다. 그녀의 두 아들이 20년 넘게 유품을 두고 법정 싸움을 벌였는데, 스위스 법원의 최종 판결 끝에 경매 시장에 등장한 것이다. 당시 나는 카페 오픈을 준비 중이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후 가진 돈을 다 털었고, 심지어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서까지 경매에 참여했다. 유니세프 활동 당시 입던 옷, 영화에 입고 나온 의상, 허리띠, 그녀가 사랑한 토슈즈 등을 낙찰받았다. 이 물건들을 카페에 전시해 언제든 감상할 수 있게 했다. 평소에도 그녀의 유품이 나오는지 확인하며 경매에 응찰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총 16점을 낙찰받아 소장하고 있다.

 

임정도 대표가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받은 오드리 헵번의 유품의 일부
임정도 대표가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받은 오드리 헵번의 유품의 일부

 

유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발레리나 출신이고, 발레를 무척 사랑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발레를 했는데, 이는 그녀의 루틴이자 몸매 관리법이었다. 평생 탄탄하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발레 덕이었다. 집안에 색색깔의 토슈즈를 구비해놓고 늘 신고 다녔다고 한다. 나는 그녀가 가장 아름답고 예뻤던 시절에 신었던 보라색 발레 슈즈를 갖고 있는데, 그게 가장 마음에 든다. 이 발레 슈즈는 현재 전시하지 않고 있다.

 

조소를 전공한 임 대표는 오드리 헵번의 피겨를 직접 만들었다.
조소를 전공한 임 대표는 오드리 헵번의 피겨를 직접 만들었다.

 

오드리 헵번이 좋아한 케이크를 그녀의 레시피 대로 똑같이 만들어서 판매한다고?

그녀는 몸매 관리를 위해 평소 단것을 멀리했지만 초콜릿만큼은 사랑했다. 그녀는 밀가루를 넣지 않은 ‘글루텐프리 초코 케이크’를 좋아했는데, 그녀의 레시피 그대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그 레시피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배우 생활을 할 때 약 2년 동안 오드리헵번재단에서 운영하는 카페의 홍보 담당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오드리 헵번 아들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가 “어머니가 만들었던 케이크를 카페에서 판매해 보자”고 제안했는데, 이런저런 사연으로 불발됐다. 시간이 흐른 지금, 루카가 준 레시피를 이곳에서 재현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다.

 

카페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어린아이부터 머리 희끗한 중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온다. 유치원생들이 신기해하며 즐겁게 구경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정말 좋다. 처음 카페를 오픈했을 때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터졌고, 매출이 5분의 1로 급감하면서 존폐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당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쾌적하고 즐거운 공간을 제공할지, 오드리 헵번을 느끼며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을지 무척 고심했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이 다행히 고객에게도 통했고, 지금은 안정권에 접어들게 되었다. 아이들이 커서 언젠가 이 카페의 오드리 헵번을 기억해 준다면 뿌듯하겠다.

 

돌이켜보면, 당신의 삶에 오드리 헵번은 운명인 것 같다

배우 한 명 좋아한다고 해서 이렇게 많은 혜택과 관심을 받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세상에 오드리 헵번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그런데 내가 뭐라고 그녀의 아들을 만나고, 언론 인터뷰를 하고, 그녀와 관련된 일을 하나 싶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고, 세상에서 잊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카페도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계획은?

다음 목표는 제주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자연과 함께하는 오드리 헵번 뮤지엄 카페를 열고 싶다. 오드리 헵번은 생전에 꽃을 키우고 정원을 손질하는 것을 즐겼다. 아들 루카도 “어머니는 흙과 풀과 자연을 사랑했다”라고 하는데, 그녀에게 종교가 있었다면 그건 자연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제주에서 오드리 헵번과 함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만들 테니 그때 꼭 방문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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