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수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인석 씨는 마릴린 먼로의 광팬이다. 1980년대부터 조금씩 그녀와 관련한 소품을 사 모으던 것이 수십 년째 계속되면서 어느덧 5000점이 넘었다. 수집품은 자신의 ‘보물 창고’에 모아두었는데, 한 공간에 두기에는 역부족인 양이라 이곳 저곳에 분산해 보관하고 있다. 도난 우려 때문에 장소는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먼로에 관해서는 국내에 그만 한 컬렉터가 없기에 그동안 전시회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려온 터라 미루고 미뤄왔는데 얼마 전 마음을 바꿨다. 2022년 먼로 사망 60주년을 맞아 지난해 11월부터 올 2월까지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전시회 제목은 <‘MM 2022: 메모리즈 오브 마릴린>. 당연히 전시품은 모두 그의 수집품으로 채웠다. 그런 만큼 이인석 씨와 <Den>의 만남은 특별하다. 마릴린 먼로가 뮤즈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 소장품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계기가 있다면?
지난해까지 다니던 회사의 문화사업부와 문화재단 CEO로 일했다. 그래서 전시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관련 분야의 지인도 많다. 한번은 전시 콘텐츠를 기획하는 오랜 지인이 도움을 청해왔다. 코로나19로 계획한 전시가 취소되었고, 급하게 다른 전시로 대체해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지인의 부탁이기도 하고, 2022년 마릴린 먼로 사망 60주년도 기념할 겸 수집품 2000여 점을 전시했다.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전시회를 열어야 해서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요즘 세대에게 먼로를 알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전시였다.
수집품이 얼마나 많은지 궁금하다
수집품이 총 몇 점인지는 세어보지 않아 모른다.(웃음) 오리지널 프린트 사진이 1000장 정도 있고 잡지 등 언론 미디어 콘텐츠가 1000종 이상, 그 외 실제 먼로가 착용한 의상과 핸드백, 먼로 오마주 제품 등을 합하면 5000점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로의 팬이 된 계기가 궁금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먼로, 잉그리드 버그먼 등에 관심이 생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중 먼로의 극적인 스토리에 매료되어 그녀에게 더 집중했다. 특히 먼로를 오브제로 한 성냥갑을 좋아했다. 촌스럽지만 왠지 모르게 정감 기는 디자인이 마음을 끌었다. 먼로는 1940~1950년대 수많은 성냥갑에 모델로 등장했는데, 그것들이 눈에 띄면 닥치는대로 수집할 만큼 열정적으로 모았다.
마릴린 먼로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을 것 같다
공부할 때는 극단적으로 빠져드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고시생처럼 전투적으로 공부했다. 어떤 주제에 통찰력을 지닐 만큼 고수가 되려면 그만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먼로에게 빠지면서 그녀와 관련된 기사와 서적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행여 놓친 건 없는지 끊임없이 자료를 찾아보며 크로스 체크도 했다. 아마 지금까지 나와 있는 거의 모든 기사를 읽었을 거다. 그렇게 내공이 쌓이다 보니 지금은 먼로의 자료가 보이면 컬렉터로서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공부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즐거움이다.
먼로는 어떤 사람인가?
파고들다 보니 먼로라는 사람의 진정성을 보게 됐다. 그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요즘 말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진정성 있는 배우였다. 일례로 1954년 2월에는 돌발적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조 디마지오와의 신혼여행차 일본 교토로 가던 도중 미군군속의 간곡한 부탁으로 기꺼이 한국에 온 것이다. 전후 폐허가 된 후진국에, 세계적 대스타가 자발적으로 방문한다는 건 엄청난 프로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게다가 당시는 겨울이었음에도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더 놀라운 건 4일간 10회 공연을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가며 여러 곳의 군 병원을 방문했다는 점이다. 먼로의 태도는 연예인이 일반인을 위문하는 차원을 넘어섰다. 그는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병사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대화하며 진정한 위로를 전했다.
대중이 오해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미디어에 먼로는 백치미 섹스 심벌 정도로 비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시각이다. 사실 그녀는 집, 촬영장 할 것 없이 어디에서든 책을 읽었고, 새로운 결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지적이었다. 오죽하면 1999년 10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430권의 먼로 책 리스트가 나왔을까. 예술, 희곡, 자서전, 시집, 정치, 역사, 신학,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기에 먼로는 어디서도 주눅들지 않았다.
백치미는 만들어진 이미지인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먼로의 시대에도 ‘천의 얼굴’을 지닌 이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백치미는 먼로가 의도적으로 만든 매력 중 한 요소일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재미를 위해 각 출연자의 콘셉트를 미리 정해놓고 그 콘셉트에 들어맞게 연출을 하지 않나. 먼로의 백치미나 섹스 심벌 이미지도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억울했을 것 같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훌륭한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지적인 수준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먼로는 본인이 소비되는 방식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생존해야 하는 시기였으니 1940~1950년대까지는 침묵했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고, 여배우가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았다. 물론 그로 인해 본인도 내적 갈등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주저하는 사이에 대가 없이 먼로의 명성만 이용하는 이가 많아졌고, 그러는 사이 라이벌 격이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출연료가 10배 차이로 벌어졌다. 테일러는 천문학적 출연료를 매일 갱신하고 있었지만, 먼로는 “돈 때문에 배우 하는 거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먼로는 1960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수상 이후 이런 부당한 처사를 개선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러나 결국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죽음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
‘먼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책이 정말 많고, 다 읽어봤지만 함부로 결론 내리기 어렵다. 다만 정황상 자살이 아닐 확률이 조금 더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먼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사람은 어렵고 힘들 때 반대 기제를 찾게 되는데, 먼로에게는 그게 남자였던 것 같다. 3명의 남편, 그 외 많은 남자와 사귄 건 아픔을 잊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술도 어려움을 극복하는 하나의 도구였다. 특히 삼페인 ‘돔 페리뇽’과 ‘파이퍼하이직’을 즐겼다. 지금은 “먼로가 하루라도 파이퍼하이직을 마시지 않은 날이 없다”는 말이 유명해졌지만, 실제로는 돔 페리뇽을 더 지주 마셨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실제로 욕조에 샴페인 250병을 채워 목욕을 했다.
대중의 사랑을 받은 뮤즈는 많다. 그 가운데 먼로가 독보적 오라를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수집 세계에서 먼로의 사진은 최근 10년 새 가격이 10배 이상 올랐다. 5년 주기로 두 배 오르는 게 일반적이라면 먼로의 가치는 확실히 지금도 급등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인생이 너무도 극적이었던 데다 그 삶이 재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먼로는 섹스 심벌로만 여겨졌는데 다시 보니 여성의 권리를 위해 개인의 성장을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라는 것이 특히 부각됐다.
물론 빼어난 외모도 한몫 했다. 먼로의 얼굴은 지금 어느 미인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아마 100년 2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새로운 시대의 뮤즈일 것이고, 세기의 아이콘으로서 건재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를 ‘전설’이라 부른다. 먼로는 미국에 한정되지 않는 ‘전 세계의 전설’이다. 이런 공통 인식이 있기에 그 명성이 더 오래 가고 가치는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먼로 애호가로서 계획이 있다면?
사람들이 수시로 방문할 수 있는 먼로 상설 전시관을 만들고 싶다. 방대한 규모로 전체 스토리를 풀어내기보다는 적당한 크기의 공간에 짜임새 있는 형태로 전시해 더 많은 이가 부담 없이 먼로를 보도록 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메타버스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지금도 메타버스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준비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