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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존재, 데보라 스미스
번역가 ① [인터뷰]

언어 사이를 메워 작품의 지평을 넓힌다. 더 넓은 세계로 걸어가도록. 한강 책의 여정에 데보라 스미스가 있었던 것처럼.

<strong>데보라 스미스는</strong><br>영국의 한국문학 번역가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과 배수아 작가의 [에세이스트의 책상], [서울의 낮은 언덕들]을 비롯해 다양한 한국문학 작품을 영어로 옮겼다. 2015년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비영리 출판사 ‘틸티드 악시스(Tilted Axis Press)’를 설립, 소외되거나 저평가된 작품과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다.&nbsp; ⓒ데보라 스미스,&nbsp;shutterstock
ⓒ데보라 스미스, shutterstock

데보라 스미스는

영국의 한국문학 번역가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과 배수아 작가의 [에세이스트의 책상], [서울의 낮은 언덕들]을 비롯해 다양한 한국문학 작품을 영어로 옮겼다. 2015년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비영리 출판사 ‘틸티드 악시스(Tilted Axis Press)’를 설립, 소외되거나 저평가된 작품과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다. 

올해 노벨 문학상의 영예는 헝가리 작가 라슬로 크러스너호르커이에게 돌아갔다. 지난해 한강 작가에 이어 올해 역시 비영어권 작가가 수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면서 함께 조명된 것이 바로 번역의 중요성이다. 만약 이들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면, 과연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전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

데보라 스미스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 등 한강 작가의 주요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다. 소외되거나 저평가된 것에 주목하겠다는 신념 아래, 세계 출판 시장에서 한국문학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부터 한강을 비롯해 배수아, 황정은 등 여러 한국 작가들에게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 왔다.

사실 번역가는 보이지 않는 존재다. 드러나지 않을수록 오히려 더 완벽하다고 평가받는다. 작가의 의도와 원문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마치 모국어로 쓴 글처럼 이질감 없이 다가가는 일, 이것이야말로 번역가의 역할이자 번역을 일종의 예술이라 부르는 이유다. 역설적인 부재의 미학 속에서 데보라 스미스는 번역이 지니는 힘과 그 파급력을 누구보다 생생히 증명해 보였다.

AI가 단순 작업을 빠르게 대체하는 시대, 번역가는 흔히 대체되기 가장 쉬운 직업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번역가는 단순히 기술적 숙련도만으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다. 번역가의 일은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 이상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을 선별하고, 에이전트로서 작가, 출판사, 평론가, 독자 등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과 관계를 구축한다. 번역가를 통해 책은 국경을 건너 더 많은 사람에게 닿고 새로운 가능성과 마주한다. “책이 사람에 의해 쓰이는 한 사람이 번역해야 한다”라고, 데보라 스미스는 말한다.

 

2016년 데보라 스미스 번역가와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했다. ⓒalamy
2016년 데보라 스미스 번역가와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했다. ⓒalamy

 

지금으로부터 1년 전,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세계에 알린 번역가로서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내가 처음 영어로 번역해 출간한 한국문학이다. 이 작품으로 2016년에는 한강 작가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현 부커 인터내셔널상)을 공동 수상했다. 하지만 그 경험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당시 일부에서 번역에 초점을 맞추며 한강 작가의 성취를 폄하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커상은 그동안 번역을 무시하거나 단순한 기계적 행위로 여겨온 현실을 상쇄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하지만 번역에 주목하는 일이 작가의 공을 빼앗는 일로 비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작년 노벨 문학상이 한강 작가와 그의 작품 자체에 주어진 상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기뻤다. 또 이를 계기로 한강 작가의 작품을 번역한 50명 이상의 번역가에게 관심이 쏠리며, 그들의 작업을 조명하는 기사가 쏟아진 점도 무척 반가웠다.

 

[채식주의자]는 어떤 계기로 번역하게 되었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교류하던 런던의 출판사 ‘앤 아더 스토리즈(And Other Stories)’에서 연락이 왔다. 한강 작가의 출판 저작권 에이전시로부터 책을 받았는데 서평을 써줄 수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채식주의자]를 처음 접했다. 작품을 읽는 동안 주인공 ‘영혜’에게 자연스럽게 공감했다. 사회적 관습이 폭력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불필요한 요소나 과장된 표현 없이 놀라울 만큼 절제된 문체로 쓰여 있었다. 그래서 열 쪽가량을 샘플 번역해 보냈는데, 당시 번역 실력이 부족해 아쉽게도 출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2013년에 열린 런던 도서전에 연사로 초청되어 패널 토론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당시 경험이 많지 않은 신진 번역가였지만, 영국에서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도서전 현장에서 여러 출판사의 편집자가 내게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이듬해 런던 도서전의 주빈국이 한국으로 결정되면서 많은 출판사가 출간할 만한 한국 도서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그란타 포르토벨로(Granta Portobello)’의 편집자를 만났고, [채식주의자]가 그들의 출간 목록에 완벽히 어울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행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전의 번역을 전면적으로 다듬어 편집자에게 보냈다. 그러고 다음 날 아침 바로 답장이 왔다. 번역이 마음에 든다며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출간까지의 과정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출판사와의 접촉부터 번역 작업 그리고 홍보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참여했다. 표지 디자인과 소개문 작성에도 관여했다. 사실 이는 많은 번역가가 흔히 겪는 일이다. 특히 소수 언어를 다루거나, 어떤 작가의 작품을 영어권에 처음 소개할 때는 더욱 그렇다. [채식주의자]를 작업할 당시엔 젊고 에너지가 넘쳤기에 무보수로 많은 일을 감당해도 개의치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아마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일을 넘어, 작가와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행위인 셈이다. 번역할 작품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나?

번역은 작품이 세계로 퍼져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번역가는 작품과 어떤 식으로든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작품을 스스로 옹호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작품을 번역하는 일이 내 역량 안에서 충분히 소화 가능한지 역시 중요하게 고려한다. 예컨대 대화문이 지나치게 많거나 20세기 초반 작품처럼 익숙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품은 피하는 편이다. 아울러 영어권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 기존 작품과 분명히 차별화되는 작품일 때 번역에 나선다.

 

서울의 한 북 카페에서 배수아 작가의 [훌]을 읽고 있는 데보라 스미스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br>
서울의 한 북 카페에서 배수아 작가의 [훌]을 읽고 있는 데보라 스미스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

 

좋아하는 한국 작가를 소개해 달라

한강 작가 외에도 애정을 품은 한국 작가가 많다. 첫 번역 출간작은 [채식주의자]지만, 실제로 처음 번역한 작품은 배수아 작가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 배수아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는데, 독일 문학을 번역한 경험의 영향으로 형식과 문체 모두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점이 인상 깊었다. 한 연구자는 그가 한국어를 사용하면서도 때로는 한국인조차 낯선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한국어에 폭력을 가하는 작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배수아 작가의 작품은 단순한 지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깊고 강렬한 감정의 울림을 전한다.

또 평소 정치적·계급적 의식이 뚜렷한 작품에 관심이 많아 이런 작품을 높이 평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정은 작가는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번역 중인 김혜자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다.

 

한국문학 번역을 시작한 초기, 영국에서 한국의 위상은 어땠나?

한국문학을 번역하기 시작한 건 2010년이다. 그때 이미 ‘한류’라는 흐름이 존재했지만, 영국에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 문화가 지금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지도에서 찾아봐야 했다.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았는데도 한국을 주목한 이유가 무엇인가?

영국 출판 시장에서 한국문학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목격하고,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작품의 질이 낮아서가 아니라 단지 주목받지 못해 그렇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틸티드 악시스 출판사 설립 초기에 출간된 책들.&nbsp;ⓒ데보라 스미스<br>
틸티드 악시스 출판사 설립 초기에 출간된 책들. ⓒ데보라 스미스

 

역설적으로 그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목한 셈이다

그렇다. 10년 전 ‘틸티드 악시스(Tilted Axis Press)’라는 비영리 출판사를 설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틸티드 악시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현대문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출판사로, ‘문학의 중심축(Axis)을 비유럽권 언어로 쓰인 작품 쪽으로 기울이겠다(Tilt)’는 포부를 담았다. 출판사를 설립한 덕분에 백인 번역가 중심의 구조나 ‘원어민 영어’라는 사실상 무의미한 범주 등 출판계에 존재하는 여러 불평등 문제에 대응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한국 작가 중에서는 박서련, 박상영, 한유주 작가의 작품을 번역 출간했다.

 

왜 문학이었고, 그중에서도 소설이었나?

특정 국가의 모든 문학이 전 세계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그런 힘을 지닌 작품과 작가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프랑스나 일본, 아르헨티나 문학이 그렇듯, 한국문학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논픽션에는 번역 지원금이 없다. 게다가 영국 출판 시장에서 반응이 가장 좋은 장르는 소설이기에 출판사들은 미지의 작가인 경우 소설 작품이어야만 관심을 보였다.

 

데보라 스미스가 말하는 번역 철학 ②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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