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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그들은 누구인가?

지난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포함한 아프간 전역을 장악했다. 1996~2001년 집권 당시 중세 시대 율법을 들이밀며 온갖 탄압과 만행을 저지른 탈레반이었기에 이들의 재집권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아프간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과거와 달리 여성 취업은 허용하겠지만 이 또한 샤리아의 틀 안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는 탈레반이 어떻게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 입력 2021.10.03 10:10
  • 수정 2022.05.25 16:00
  • 2021년 10월호
  • 김구용 에디터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어떤 곳?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지리·문화·역사적 특징을 먼저 알아야 한다.

 

1. 다민족 국가

아프가니스탄은 고대로부터 실크로드의 교차점이었다. 수많은 민족이 오가며 상업 활동을 했고, 이 지역에 터를 잡았다. 현재 주류는 파슈툰족(약 45%)이며 타지크인, 하자라인, 우즈베크인, 누리스탄인 등 10여 개가 넘는 민족이 얽혀 살고 있다. 탈레반의 뿌리는 파슈툰족이다. 이들은 이슬람을 믿지만 율법 이전에 ‘파슈툰왈리’라고 하는 민족 전통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기본적으로는 정의를 수호하고 약자를 보호하라는 내용이지만 탈레반은 이를 제멋대로 해석해 여성 인권을 무시하고 테러리즘을 명예로 치장하고 있다.

 

탈레반의 탄생

탈레반은 아프간 최대 언어인 파슈토어의 ‘학생’이란 단어에서 유래한 말로, 1994년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를 추종하는 신학자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가 남부 컨다하르에서 창설했다. 오마르는 1989년 옛 소련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후 군벌끼리 내전을 벌이자 전통 교육기관 소속 신학생 2만5000명을 동원해 지도자로 나섰다. 1919년 대영제국에서 독립한 후 정치적 불안과 경제난, 소련 침공, 군벌 간 대립에 신음하던 아프간인들은 이슬람 사상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탈레반을 반겼으며, 처음에는 미국도 소련 잔존 세력을 제거한다며 탈레반을 지원했다.

 

2. 고립된 지형

아프가니스탄 국토 대부분은 해발고도 7000m가 넘는 고봉이 즐비한 힌두쿠시산맥에 걸쳐 있다. 탱크, 장갑차 등의 진입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헬리콥터도 고산지대에서는 조종이 불가능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쟁은 게릴라전 양상을 띠고 몽골, 영국, 소련, 미국 등 역대 패권국조차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가 없다.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을 ‘제국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이는 내정에도 영향을 미쳐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낳았다.

 

3. 무능한 정부

아프가니스탄은 역대로 험악한 지형과 열악한 교통망 때문에 수도 카불 이외의 지역까지는 정부의 정치력이 미치지 못했고, 실질적으로 지방 제후들이 국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졌다. 이 때문에 1973년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정치 상황이 불안했던 아프가니스탄은 실질적으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고, 지방 토호들이 수시로 반란을 꿈꿨다. 

이후 소련,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후 괴뢰 정부를 세워도 정권이 워낙 무능한 탓에 번번이 지방 세력에게 수도를 위협당했다. 탈레반도 이슬람 신자를 탄압하는 공산 정부에 반기를 든 세력이었다.

 

4. 이상한 국경

제국주의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을 당시, 이미 점령 중이던 인도와의 국경을 구분하는 ‘듀랜드 라인’을 그었다. 이후 파키스탄이 독립할 때 듀랜드 라인은 그대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국경이 되었다. 문제는 듀랜드 라인이 아프가니스탄 인구 구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슈툰족의 영역을 반으로 갈랐다는 것. 파슈툰족은 졸지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으로 갈라져 가족끼리 생이별을 하게 됐고, 끝없는 국경 분쟁이 시작됐다. 설상가상으로 파슈툰족에서 발흥한 탈레반은 괴멸적 타격을 입을 때마다 부족민들의 지원을 받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오가며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201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2개월 만에 점령했을 때도 탈레반이 살아남은 이유다.


 

20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탈레반 집권

 

1839~1919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제국의 무덤

1839년 제국주의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을 침공, 4개월 만에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괴뢰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왕국 세력과 100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결국 영국은 1919년에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철수했지만, 당시에 영국이 제멋대로 규정한 듀랜드 라인(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선)은 이후 아프가니스칸 국내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화약고가 된다.

 

1926~1973

아프가니스탄 왕국

10년 사이 쿠데타만 두 번

1926년 ‘아프가니스탄 왕국’으로 국명을 바꾼 아프가니스탄은 20세기 중반 황금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1973년 대기근으로 국가 경제가 나락으로 빠졌고, 국왕의 해외 순방 도중 총리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세운다. 다우드 칸은 공산주의자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공산주의 정당이 197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칸 일가를 대통령 관저에서 사살하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1978~1992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무자헤딘 등장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종교를 탄압했다. 그러자 전 국민이 이슬람 신자였던 아프가니스탄 곳곳에서 공화국에 반기를 든 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을 ‘무자헤딘(Mujahideen)’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 집결한 세력 외에도 ‘성전’을 외치며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입한 해외 세력 등 수많은 점조직으로 이뤄졌다. 탈레반 역시 시작은 무자헤딘이었다. 무자헤딘과 공화국의 격렬한 충돌로 아프가니스탄은 내전과 다름없는 상태에 빠져들었다.

 

1979~1989

소련 - 아프가니스탄 전쟁

알 카에다의 탄생과 소련 붕괴

내전이 시작되자 소련이 공산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개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이 무자헤딘을 지원하고 나섰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무자헤딘 중 오사마 빈 라덴이 지도부로 있던 ‘무슬림 형제단’이 바로 ‘알 카에다’의 시초다. 

한편 소련 역시 지방 세력의 반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되는 천문학적 규모의 군비는 소련의 재정을 파탄에 빠뜨렸다. 결국 1989년 소련군이 전면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내전에 빠졌다. 소련은 이 때의 재정위기가 발단이 되어 1991년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해체되고 냉전은 종식을 맞이한다.

 

알 카에다는 왜 반미를 택했나?
오사마 빈 라덴
오사마 빈 라덴

소련 철수 이후 해외에서 들어온 무자헤딘은 갈 곳을 잃었고,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 폭탄이 됐다. 그런데 때마침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며 걸프전이 일어났고, 미국이 이를 빌미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한다. 당시 알 카에다를 이끌던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사우디아라비아)에 외세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며 미국을 목표로 테러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1996~2001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탈레반 집권

긴 내전 끝에 무자헤딘 연합이 아프가니스탄민주공화국에 승리를 거뒀으나, 이번에는 무자헤딘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이때 정권을 잡은 것이 바로 탈레반으로 이들은 1996년에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수립한다. 초기에는 내전을 종식하고 신시대를 연 영웅으로 환영받은 탈레반은 오래지 않아 샤리아(이슬람의 종교 율법)를 내세운 독재정치로 본색을 드러냈고, 여성인권 탄압과 문화재 파괴 등 공포 통치를 자행했다.

 

판지시르의 사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
탈레반 깃발 문양
탈레반 깃발 문양

탈레반이 정권을 잡았지만, 국토의 4분의 1은 여전히 무정부 상태였다. 탈레반의 공포정치에 반기를 든 무자헤딘 세력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중심으로 ‘북부동맹’을 결성, 그의 고향인 아프가니스탄 북부 판지시르를 거점으로 탈레반과 내전을 시작한다.

 

2001

마수드 암살

9.11 테러의 전조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아흐마드 샤 마수드

내전이 길어지자 탈레반은 북부동맹 지도자 마수드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탈레반은 협력 관계였던 알 카에다에 도움을 청했고, 빈 라덴은 벨기에 기자단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를 마수드에게 보내 자폭 테러로 마수드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2001~2021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

9·11 테러

탈레반은 마수드 암살 성공에 대한 대가로 미국에 쫓기던 빈 라덴을 아프가니스탄에 숨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가 9·11 테러를 일으키며 세계 정세가 급변했다. 분노한 미국은 국제 관계의 암묵적 룰도 무시한 채 파키스탄의 영공을 침범해 빈 라덴의 뒤를 쫓았고, 탈레반에는 신병 양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탈레반은 이를 거절했고, 미국은 가차없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군의 도움을 받은 북부동맹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했다. 탈레반은 괴멸 직전까지 몰렸지만 파키스탄 국경에 걸쳐 살고 있는 파슈툰족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2003

이라크전쟁

베트남전쟁의 재림

금세 정리될 것 같던 아프가니스탄 상황은 미국이 대량 살상 무기를 구실로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또다시 변한다. 병력이 분산된 미군은 탈레반을 완전히 끝장내지 못했고, 이 틈을 타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암묵적 비호와 파키스탄 내 파슈툰족의 지원을 받아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2011

오사마 빈 라덴 사살

미군 철수 시작

2008년 오바마 대통령 당선 후 미국은 이라크 전선의 병력을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렸지만, 전황은 그대로였다. 그러던 2011년, ‘넵튠 스피어 작전’의 성공으로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미국은 전쟁의 원인이었던 빈 라덴을 사살한 것을 구실로 단계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2021

탈레반 재집권

혼돈의 시작

2020년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공식화했다. 2021년 6월 미군의 최종 철수가 결정되자 탈레반은 전면 공세로 전환,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차례차례 점령해 나갔고, 8월 15일에 마침내 카불까지 점령하면서 20년간 이어진 전쟁의 종전을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탈레반의 공포정치 체제로 들어섰으며,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의 잔존 세력은 다시 판지시르로 집결, 탈레반 정권에 끝까지 대항해 싸울 것을 천명했다.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국제 정세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녹아내리던 재정과 자원을 내수경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이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더욱 집중하리라는 것이 국제 관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중국은 중국대로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탈레반과 결탁해 테러리스트로 변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탈레반 정부와 적극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겠다고 나선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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