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지금도 ‘얼간이’를 가리켜 ‘감자 대가리(Potato-head)’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 4세기 동안 서구 사회는 감자를 두려워했고, 불신했으며, 천대해왔다. 이는 스페인 사람들이 1570년 페루에서 감자를 처음 들여왔을 때의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18세기 말 무렵, 감자는 여러 가지 삶의 곤란을 해결하면서 주식으로 대두했다. 즉 감자는 시간, 공간, 노동, 땅, 연료를 절약해주는 음식으로 인식된 것이다.
- <악마가 준 선물 감자 이야기> 중
페루에서 유럽으로(1550~1650)
비천한 음식이 된 안데스의 보물
감자의 발원지는 유전자 분석을 통해 밝혀졌다. 2005년 미국 위스 콘신-매디슨 대학교 과학자들은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야생종을 비롯해 총 359종의 감자 DNA를 분석해 공개했다. 그 결과, 감자는 7000년 전 페루 남부 안덱스산맥 고산지대에서 처음 기르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악마의 선물’이라 불린 이유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에 전파된 감자. 하지만 스페인은 1570년경에야 감자를 자국민에게 소개했다. 그때만 해도 감자가 유럽의 운명을 바꿔놓으리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페루를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에게 감자는 원주민들이 빵 대신 먹는 ‘빈민의 음식’일 뿐이었다. 유럽에 감자가 도입되고 100년이 지나는 동안 ‘재배할 가치가 없는’ 작물이라는 인식은 계속됐다.
아일랜드 인구를 급증시킨 주역
감자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나라는 아일랜드다. 척박한 토양에서도 엄청난 수확량을 자랑하는 생명력, 별다른 농사 기술이 없어도 누구나 캘 수 있는 손쉬운 생산성은 당시 실직·빈곤·인구 과잉·토지 부족 등의 문제가 심각한 아일랜드에 꼭 필요한 작물이었던 것. 17세기, 아일랜드는 유럽 어느 나라보다 빨리 감자를 주요 작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점차 주식으로 받아들였다. 수확한 곡식 대부분을 영국인 지주에게 빼앗긴 아일랜드 사람들의 배고픔을 감자가 해결해줬기 때문이다. 1754년 320만 명이던 아일랜드 인구는 감자 덕분에 1845년 820만 명으로 늘어났다.
유럽에서 미국으로(1650~1800)
영국 산업혁명의 숨은 공신
비록 천대받았으나 감자는 18세기 영국인의 생활 속으로 서서히 파고들었다. 감자를 끈질기게 거부했지만,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빠르게 변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대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인구 증가와 도시의 팽창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상점에서 식료품을 샀으나 도시 집중 현상으로 농사짓는 사람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상 황에서 감자는 최적의 식량이었다. 감자는 아무데서나 자라는 만큼 도시 인근에서 경작할 수 있어 굳이 먼 거리까지 수송할 필요가 없었다. 또 당시 주식 재료인 밀처럼 제분할 필요도 없고, 빵과 달리 오븐이나 연료 없이도 조리할 수 있기 때문에 생산 비용도 줄일 수 있었다. 실제로 감자는 똑같은 양의 물을 공급할 때 밀보다 2.4배, 쌀보다 2.8배의 에너지를 더 생산한다고 한다.
감자로 식량 문제 해결
지배계급을 빼고는 늘 굶주림에 시달리던 대부분의 유럽 인은 감자로 허기를 채웠고, 덕분에 인구도 크게 늘었다. 감자가 주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보리나 귀리를 가축 사료로 썼기 때문에 가축 생산량도 급증했다. 그전에는 겨울이 되면 가축을 먹일 사료가 없어 늦가을이면 돼지를 모두 도축해 고기를 염장해두었다. 역사학자들은 감자로 식량을 해결할 수 있었기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감자의 아버지’ 파르망티에
감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프랑스인 앙투안 파르망티에 덕분에 달라졌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벌어진 ‘7년전쟁’에 참전했다 포로가 된 파르망티에에게 독일은 1년 넘게 감자만 제공했다. 당시 독일의 왕 프리드리히 2세가 재배와 보관이 쉬운 감자를 전투식량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감자만 먹은 파르망티에는 감자의 맛에 빠졌고, 파리로 돌아와 감자 보급에 나섰다.
우선 그는 루이 16세가 감자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했다. 1785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루이 16세의 생일 축하 파티에서 파르망티에는 왕에게 연보랏빛 감자 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바쳤다. 루이 16세는 이 꽃다발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이에 감격한 파르망티에는 “폐하, 이제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외쳤다. 이를 계기로 귀족들이 너나없이 감자꽃을 찾으면서 감자에 대한 상류층의 인식이 바뀌었다.
Infomation
미국이 감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까닭
식민지 개척에 나선 유럽인을 따라 감자는 다시 북미로 전해졌다. 유럽에서 감자는 비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 푸대접받았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1800년대 미국의 인구는 80만 평당 6.1명에 불과했다. 유럽보다 노는 땅이 많았던 데다 상인도 많지 않아 작물을 거래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필요한 건 스스로 구하는 자급자족 재배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노동력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감자가 환영받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의 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67년 자신의 땅에 감자를 심었고,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1794년 농업 전문지에 감자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미국 전역에서 감자 재배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아일랜드 포테이토, 돼지감자 등 종류도 체계적으로 분류되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레시피도 개발되었다.
포테이토칩의 탄생
1800년대 미국은 빠른 도시화로 인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몰려온 사람과 집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하숙 집이나 호텔에 묵었다. 이들 숙소에는 싸고 푸짐하고 쉽게 요리할 수 있는 감자, 비트, 양배추 등이 항상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더 많은 사람이 감자를 먹게 되었다. 포테이토칩은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1850년대 초 캘리포니아 새러토거에 있는 한 호텔에 조지 크럼이라는 주방장이 근무했는데, 한번은 손님이 감자 튀김이 너무 두껍다고 불평을 했다. 크럼은 그를 골려줄 심산으로 감자를 최대한 얇게 썰어 기름에 튀긴 후 소금을 듬뿍 쳤다. 그런데 손님은 이 요리를 너무도 맛있게 먹어치웠고, 이후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값싼 식용유의 등장과 함께 포테이토칩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됐고, 1930년 대 밀봉 기술이 등장하면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중국에서 조선으로(1800~1894)
백성의 애환과 함께한 감자
감자가 안데스산맥에서 우리나라까지 오게 된 경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1824년경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이 책에는 김씨 성을 가진 북쪽 사람이 종자를 들여왔다는 기록과 청나라 사람이 몰래 인삼을 캐러 왔다가 인삼밭에 감자를 심어놓고 갔다는 기록이 동시에 나온다.
그런가 하면 1862년 김창한이 쓴 <원저보>에는 1832년 영국 상선 로드 엠허스트호가 태안반도에 약 1개 월간 정박했는데, 이 배에 동승한 네덜란드인 선교사 찰스 구츨라프가 우리 농민에게 감자 종자를 나눠주고 재배법을 가르쳐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서 ‘허니버터칩’, ‘포카칩’ 등 포테이토칩을 만들 때 쓴다. 수분과 당분이 적어 기름에 닿아도 검게 변하지 않는다.
수미 감자 시장의 75%를 점유하는 품종으로, 우리가 익히 아는 차진 식감이 특징. 감자채, 감자탕 등 각종 요리에 안성맞춤이다.
자영 껍질과 속이 붉은 감자. 암세포 활동을 억제하는 안토시안 성분이 풍부해 건강에 도움을 준다.
한식에 빠질 수 없는 식재료가 되다
유럽 식탁에 감자가 자리 잡기까지 거의 200년이 걸린 데 비해 우리 조상들은 감자를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시 조정은 쌀을 세금으로 받았던 터라 감자 재배를 그다지 장려하지 않았음에도 1879년 강원도와 한성부에 널리 퍼질 정도였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이미 칡뿌리, 토란, 마, 도라지, 연근, 우엉, 인삼 등 뿌리 식재료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자는 이들 식재료보다 재배와 저장이 쉬워 척박한 산간 지방이나 추운 북부 지역에서 곡물을 대체하는 작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민란 중 주식으로 자리 잡은 감자
감자가 들어온 19세기 초는 매관매직이 성행해 양반의 수가 점점 늘어나던 시기였다. 즉 농사 등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농민들의 노동 강도가 높아진 것이다. 결국 1808년 함경도 북청 민란, 1811년 평 안도 농민전쟁, 1814년과 1833년 한양에서 일어난 폭동 등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잇달았다. 이와 함께 기근과 흉년도 계속됐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민들은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아무 곳에서나 자라는 감자는 순식간에 이들의 주식이 되었다.
지구에서 우주로 (1980~ 현재)
NASA가 선택한 우주 식량
`SF 영화 <마션>(2015)에서는 화성에 홀로 남은 식물학자가 구조대를 기다리는 동안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자를 재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제로 가능할지 모른다. 2015년 미국 항공 우주국(NASA)과 국제감자센터(International Potato Center) 과학자들은 화성과 유사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감자를 개발하기 위해 합동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이 우주 식량으로 감자를 선택한 이유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랄 뿐 아니라 현재 세계의 주요 식량 자원이기 때문이다.
합동 연구팀은 페루의 팜파스 데 라 요야(Pampas de La Joya) 사막에서 화성의 토양과 가장 비슷한 흙을 구해 큐브샛(CubeSat)이라는 작은 격리 상자에 담고 감자 1000종을 재배하고 있다. 40종은 페루 안데스산맥에서 자라는 자연산이고, 나머지는 극한 환경에 잘 견디도록 유전자를 변형한 종이다.
LED를 이용해 화성의 약하지만 방사선량이 많은 태양 빛을 대신하고 지구와 크게 다른 화성의 대기 조건을 흉내 낸 가스를 주입해 감자의 생육 여부를 테스트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이산화탄소가 대부분이고 기압이 낮은 대기 조건과 약한 빛, 낮은 기온에서도 감자가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NASA는 지구 밖에서 감자를 재배하는 최적의 방식은 수경재배법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감자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걸 싫어하므로 영양 성분을 담은 얇은 수막 필름을 이용하는 것이 더 적합한 재배 방법이라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 화성의 높은 방사선 환경에서 식물을 키우려면 완벽한 방호 기지가 필요하다. 여기에 물과 영양분 같은 자원을 재활용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