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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한 역사적 순간

사진을 ‘찰나의 미학’이라고 한다. 흘러가는 시간의 한순간을 포착한 사진 속 이미지는 시공을 넘어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역사에 남을 사건의 기록도 그중 하나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티브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 실험 1900년

 

 

에디슨과 ‘전기 전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니콜라 테슬라의 업적은 우리가 쓰고 있는 전기 기술과 IT 산업의 토대를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당시 테슬라는 각종 기행으로도 유명해 유수의 미디어에서는 종종 그를 ‘미치광이 과학자’로 소개하곤 했다. 공진동 기계를 실험하다가 건물 전체가 흔들려 사람들이 대피하기도 했고, 콜로라도의 개인 실험실에서는 밤늦게까지 스파크가 튀고 인근 지역의 땅 위에서도 전기 불꽃이 튀는 바람에 주민들이 공포에 떨기도 했다.

이 사진은 테슬라가 콜로라도 개인 실험실에서 인공 번개 방출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로 인해 콜로라도 지역 발전소의 발전기가 타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노다지’란 바로 이런 것

투탕카멘 무덤 발굴 1922년

 

 

1922년 11월 26일,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5년 만에 찾은 투탕카멘 왕릉의봉인을 열었다. 이 사진이 바로 당시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수천 년이 지나는 동안 몽땅 도굴당한 다른 파라오의 무덤과 달리 투탕카멘 왕릉에서는 보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이 보물들만으로 이집트 박물관의 한 층을 모두 채웠을 정도였고,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지금까지도 이집트를 상징하는 보물이됐다.

더 놀라운 사실은 투탕카멘은 9년밖에 재위하지 않은 병약하고 힘없는 파라오였다는 것. 이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파라오의 무덤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이 있었을지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다.

 

Info. 투탕카멘의 저주는 가짜 뉴스


발굴에 참여한 관계자가 줄줄이 의문사했다는 ‘투탕카멘의 저주’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발굴 자금을 댄 영국

귀족 카나본 경이 발굴 직후 죽은 데다, 부장품에 새겨진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에

닿으리라’라는 문구를 본 기자들이 만들어낸 가십이었던 것. 정작 봉인을 연 카터는 66세까지 살았다.

 

 

 

To be or not to be?

CEO가 직접 한 방탄조끼 실험 1923년

 

 

사진 속 방탄조끼를 입고 있는 남자는 뉴욕의 사업가 W. H. 머피다. 그는 1923년 9월 13일 자신이 만든 5kg짜리 경량 방탄조끼를 경찰에 납품하기 위해 워싱턴 경찰서를 찾아 성능 시연을 펼쳐 보였다. 머피의 조수가 2m 거리에서 발포한 것. 머피는 웃으며 총알을 받아냈고, 납작해진 총탄을 들어 보였다. 이후 워싱턴 경찰 소속의 경찰관이 한번 더 시연했고, 머피는 총탄을 그에게 기념품으로 선물했다. 당시 총탄은 납으로 만들어 현대의 총탄보다는 관통력과 살상력이 약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가능했다.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별들의 기념사진

제5차 솔베이 회의 1927년

 

 

인터넷상에서 ‘이과생들을 괴롭게 만든 주인공들’,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정모’, ‘지상 최 강의 정모’ 등 다양한 별칭으로 돌아다니는 이 사진은 1927년 10월에 개최된 제5차 솔베이 회의 참석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의 면면이 아인슈타인과 퀴리부인을 비롯해 ‘슈뢰딩거 방정식’의 에르빈 슈뢰딩거, 플랑크 상수를 발견한 막스 플랑크, ‘불확정성 원리’를 정립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 총 29명 중 17명이 노벨상 수상자일 정도. 오늘날 이과생이 배워야 할 이론 대부분이 이 회의 참석자들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nfo. 솔베이 회의란?

1911년부터 벨기에의 기업가이자 솔베이의 창립자인 에르네스트 솔베이가 개최한 국제물리 학·화학학회. 3년마다 개최되며, 3년을 주기로 첫해에는 물리학 학회를 열고 두 번째 해는 건너뛰고 세 번째 해에 화학학회가 열린다.

 

 

 

이념을 초월한 사랑

나치에 항거한 독일 병사 1936년

 

 

1936년 6월 13일 군함 SSS 호르스트 베셀호 진수식 당시에 찍은 이 사진은 나치 치하의 독일을 충격에 빠뜨렸다. 모두가 경례를 할 때 홀로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이 사내는 아우구스트 란트메서로 추정한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으로, 나치의 인종 청소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온몸으로 나치에 항거했다. 아내를 버리라는 나치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던 란트메서는 결국 2년 6개월 형을 받았으며, 그의 아내는 수용소로 보내져 명을 달리했다. 1941년 석방된 란트메서는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돼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부부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딸 이레네가 1996년 수기로 엮어 출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유럽의 운명이 결정된 순간

테헤란회담 1943년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모여 회담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전략 회의를 위해 모인 것. 당시 처칠은 지중해 연안에서 상륙작전을 펼쳐 나치의 배후를 치자고 주장한 반면, 스탈린은 프랑스 북부에서 상륙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노르망디상륙작전’이 펼쳐졌고, 작전 성공으로 나치 독일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사진 속 뾰로통한 처칠의 얼굴과 의기양양한 스탈린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당대 최고 월드 스타의 특별한 위문 공연

한국을 방문한 마릴린 먼로 1954년

 

 

1954년 2월 16일, 전설적인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 결혼한 마릴린 먼로는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한 미군 장성이 그녀에게 주한 미군을 위해 잠시 들러줄 수 있겠냐고 요청했고, 섹시 스타로서 자신의 역할과 대중의 기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첫날밤도 치르지 않은 채 우리나라로 기수를 돌렸다.

혹한의 추위에도 전선을 오가며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군인들을 위해 공연한 그녀의 행보는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되며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디마지오만은 불같이 화를 냈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 생활 내내 불화를 겪었다.

 

 

 

금녀의 벽을 허물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캐서린 스위처 1969년

 

 

보수적이었던 1960년대 미국 사회는 여자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걸 불허했으나, 이에 반발한 캐서린 스위처는 1969년 4월 19일 몰래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발선에 섰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경기가 시작된 후에야 이 사실을 알았고, 대회 감독관 조크 샘플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참가 번호표를 강제로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스위처는 악전고투 끝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사진은 다음 날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여론이 들끓었다. 사람들은 “여성에게 달릴 자유를 허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4년 후 1971년 제2회 뉴욕 마라톤 대회부터 여성의 참가가 허용됐으며, 1984년 LA 올림픽에는 여자 마라톤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이 사진은 미국 <라이프(Life)>지가 ‘세상을 바꾼 100장의 사진’ 중 하나로 선정했다.

 

 

 

실수가 낳은 역대급 결과

베를린 장벽 붕괴 1989년

 

 

동독은 계속되는 자유화 요구 시위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서 1989년 11월 10일을 기점으로 ‘여행 자유화’를 허락할 예정이었다. 이에 앞서 11월 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언제부터 국경을 개방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휴가에서 갓 복귀해 일정을 숙지하지 못한 당시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총서기 귄터 샤보프스키는 “지금 즉시”라고 대답했다.

독일어가 서툴렀던 이탈리아 기자 리카르도 에르만은 이를 ‘장벽 붕괴’로 해석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세계사에 남을 오보를 냈다. 보도가 나가자 흥분한 동베를린 주민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고, 몰락해가던 동독 정부는 이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결국 장벽 해체 이후 동독과 서독 정부는 점진적으로 통일 작업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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