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되면 인생 2막을 걱정하게 된다. 김기준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몸만 건강하다고 해서 중년 이후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건강’을 방치하면 남은 인생이 보장될 수 없다. 그는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시 쓰기를 택했다.
처음에는 수술실에서 겪은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시로 썼다. 그다음에는 환자, 가족, 동료 의사를 위해 썼고, 일반인을 위한 시도 썼다. 몰입하다 보니 어느덧 등단해 시집을 두 권이나 낸 시인이 되었다. “남은 인생은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앞으로 남은 삶을 시처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이 김 교수의 꿈이다.
언제부터 시를 썼는지 궁금하다
본격적으로 쓴 건 5년 전부터다. 당시 산부인과 마취를 담당했는데, 수술을 앞둔 산모가 너무 두려워했다. 산모에게는 진정제를 쓰지 못하기 때문에 환자는 스스로 불안감을 이겨내야 한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손을 잡아줬다. 다행히 산모의 마음이 진정되었고,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났을까? 그 산모가 찾아와 비누 두 장을 건넸다. 초유로 만든 비누였다. 알고 보니 수술 날 잡은 내 손의 피부 알레르기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산모가 돌아간 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받은 그 고마운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싶었고, 2시간 만에 ‘비누 두 장’이라는 시를 썼다. 그때부터 의사로서 느끼는 감정을 시에 담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눈물의 의미가 뭐였을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눈물이 났다. 나를 생각해준 산모의 아름다운 마음이 그동안 의사로 살아온 내 삶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그때 받은 비누는 내 보물 1호다. 두 장 중 한 장은 무심코 써버렸지만, 나머지 한 장은 고이 싸서 잘 보관 중이다. 앞으로도 쭉 간직할 계획이다.
시집을 두 권이나 낸 어엿한 시인이다
2016년 <월간 시>를 통해 등단했고, 첫 시집 <착하고 아름다운>과 두 번째 시집 <사람과 사물에 대한 예의>를 냈다. 운 좋게도 2018년 두 번째 시집으로 <월간 시>가 제정하는 ‘올해의 시인상’ 대상을 수상했다. 시집을 출간하고 상까지 받은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시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는 데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이름을 건 시집을 낸 소감이 생각보다 담담하게 들리는데?
실제로 첫 시집이 나왔을 때 의외로 담담했다. 논문을 많이 쓰다 보니 큰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시인이니까 말이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시인으로서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도 고민스러웠다. ‘시인이 화를 내?’, ‘시인이 반말해?’, ‘시인이 욕을 해?’ 같은 고민이 생긴 거다. 원래 제자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인이 되고 나서는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간호사들도 내가 뭐만 하면 “아니, 시인께서…”라며 웃는다.
시를 쓴 뒤 주변 반응이 어떻게 달라졌나?
그렇다. 우선 건전한 대화거리가 생겼다. 교수, 간호사 할 것 없이 “좋아하는 시 있어요?”, “낭송해볼래요?”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간다. 심지어 회식을 할 때 다들 좋은 시를 가져와 읽기도 한다. 술 한잔하며 시 낭송하는 조직 분위기는 흔히 볼 수 없을 거다.
바쁘게 돌아가는 의사의 일상에도 시가 도움이 되는지?
의사 생활에 스트레스가 많다 보니 시를 낭송하거나 시집을 펼칠 여유가 생기면 도움이 된다. 나는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과 명상, 시 낭송을 한다. 30분 넘게 시를 읽을 때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리듬을 타며 읽는다. 그러다 보면 내가 시를 읽는 소리가 귀에 들리면서 머리가 맑아진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환자를 보는 태도도 긍정적으로 변한다.
주로 어떤 시를 쓰나?
수술, 마취 환자 등 소재는 다양하다. 이는 시의 새로운 영역이자 신선한 소재다. 의사로서 일반적인 시인과 다른 경험을 하다 보니 시의 소재도 독창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통 사람도 이해하기 쉽도록 ‘잘 읽히는 시’를 쓰고 싶다.
본인의 시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쉽고 솔직하다고 한다. 실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써왔는데, 그런 마음이 잘 전달된 것 같다. 내게 철칙이 하나 있다면, 직접 느끼지 못하는 건 절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억지로 멋진 표현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철학적인 표현이나 내용도 마찬가지다. 철학이 녹아 있는 건 좋지만 굳이 철학적으로 어렵게 표현할 필요는 없다. 쉽고 가슴으로 쓴 시,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가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생각한다.
시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킨 적도 있나?
병원 교수부터 의과대 학생들까지 동료를 대상으로 강의하는 보직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뻔한 교육보다는 모두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보여주고 싶어 환자에 관한 시 네 편을 시 낭송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줬다. 그랬더니 강당에 모인 이들이 하나둘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더라. 시의 힘이란 이런 거다. 그 후 병원, 학교 할 것 없이 강연하는 자리에서 언제나 시를 보여준다. 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린다면 시인으로서 그만한 영광도 없지 않은가.
창작의 고통은 어떻게 극복하나?
그게 내 취미인걸(웃음). 창작의 고통은 즐거운 일이다. 시로 밥벌이하려는 게 아니니 부담도 적고, 시 낭송 등 평소에 시를 즐기기 때문에 고통은 더더욱 없다. 시를 읽고, 거기서 배우는 것을 실천하며 사는 건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시를 잘 쓰기 위한 나만의 비결은?
순간순간 해둔 메모가 모여 자연스레 작품이 된다. 환자와 이야기하고, 의료진과 대화하다 보면 문득 영감이 떠오른다. 메모지를 늘 갖고 다니기 때문에 뭔가 떠오를 때마다 놓치지 않고 적어둘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일상의 모든 것이 시가 된다.
지금까지 쓴 시는 몇 편이나 되나?
700편 정도 된다. 모두 메모를 통해 나온 시다. 메모한 것만 해도 책상 위에 한가득인데, 합치면 1000장도 넘는다. 메모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지금 생각과 며칠 후의 생각을 결부할 수 있고, 마취와 바닷속 생물처럼 전혀 다른 분야끼리 연결해 시를 창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메모부터 한다. 심지어 운전하다가도 뭔가 떠올라 급한 마음에 바지에 적은 적도 있다.
1000장이 넘는 메모를 하나도 버리지 않은 건가?
그렇다. 계속 다른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모마다 영감을 준 시와 함께 정리해둔 만큼 어디에 어떤 메모를 해뒀는지 찾기도 쉽다. ‘그때 왜 이런 생각을 했지?’ 싶으면 해당 시를 쓴 시기의 메모를 뒤져본다. 그렇게 예전에 기록해둔 메모를 찾아 읽다 보면 당시 느낌과 지금 느낌이 뒤섞이며 새로운 아이디어로 발전하고, 그게 또 다른 메모와 연결되며 시가 된다.
본인의 삶에 ‘시’는 어떤 의미인가?
사무사(思無邪). 공자는 ‘시는 무엇이냐’는 물음에 ‘사무사’라고 답했다. ‘마음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인데,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 담긴 시를 읽음으로써 바른 본성을 찾게 하고 생각에 못된 마음이 없게 한다는 의미다. 퇴계 이황도 사무사를 ‘나쁜 생각이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해석했는데, “시를 씀으로써 마음속 사특함을 없애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에 공감한다.
현실에서 ‘사무사’를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노력 중이다. 말도 더 부드럽게 하고, 남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려면 세상에서 조금은 벗어나야 한다. 직장을 예로 들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보직은 내려놓고, 다른 이와의 갈등을 참고, 굳이 이기려고 애쓰지 않으면 된다.
그런 모습이 남들 눈에는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태백 같은 분이 능력이 없어 신선처럼 산 건 아니지 않나. 그가 욕심을 내려놓고 시의 세계에 빠져들려고 한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변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려다 보니 어떤 때는 내가 신선이 된 것 같다.(웃음)
시를 쓸 때 가능한 한 솔직하고 싶고, 시에 쓴 대로 살고 싶다. 한마디로 인생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시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시가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나?
내 시를 읽고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느꼈으면 좋겠다. 제일 중요한 건 읽는 이가 감동을 받는 것이다. 감동이란 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연습이 필요하다. 그럴 때 가장 좋은 연습이 ‘시 읽기’다. 마음을 부드럽고 여리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연습에 나의 시가 긍정적 영향을 주길 바란다.
스쿠버다이빙 마니아이기도 하다. 시와 스쿠버다이빙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수중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다. 갈라파고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한 적이 있는데, 망치상어가 내 앞을 지나가고, 혹등고래가 새끼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했다. ‘이 우주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같은 물음도 생겼고. 수중 환경과 바다, 바다 생물에 관한 시도 쓰고 있다. 시와 수중 세계와 마취, 마취와 잠수의학은 내게 취미를 넘어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특기이자 무기가 되었다.
스쿠버다이빙을 하게 된 계기는?
20년 전 쥐에 질소 마취를 하는 실험을 본 적이 있다. 압력이 높으면 마취가 된다는 이론이었는데, 심해에서 질소 마취 효과를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얘기에 흥미를 느껴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잠수 강사 자격증도 취득했고, 해군의 해난구조대(SSU)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대학에서는 잠수 및 고압의학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중년 남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중년’이라는 나이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려면 살아온 인생을 돌아봐야 한다. 시나 잠수처럼 혼자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통해 자기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세상에 눈뜨면 내가 참 보잘것없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의사들이 항상 논문 쓰고 연구만 하니까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중년의 어느 순간에는 허탈해진다. 하지만 남은 인생만큼은 한 편의 시처럼 돼야 한다.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사랑이 충만한 시 같은 인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욕심을 내려놓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앞으로 쓰고 싶은 시가 있다면?
지금과 같은 기조를 유지하려 한다. 선천적으로 꾸미는 걸 잘 못한다. 기교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읽는 이가 첫눈에 이해하기 쉬운 시를 쓰고 싶다. 또 희망과 위로를 줘 ‘착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특히 수술실에는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런 소재는 나 아니면 쓸 수 있는 시인이 별로 없으니 사명감을 갖고 환자에 대한 마음을 계속 시로 써볼까 한다.
➊ 혼자만의 시간 많이 갖기. 혼자 명상, 사색하며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➋ 열심히 메모하기. 일상은 최고의 소재이니 놓치지 말 것.
➌ 메모를 과거의 경험과 결부해보기. 메모와 경험이 결합되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➍ 짧은 문장이라도 수시로 적어보기. 짧은 문장이 쌓여 문학이 된다.
➎ 시 자주 읽기. 많이 경험해야 그만큼 내 것이 된다.
➏ 시 분석하려 하지 말기. 시는 노래다. 감동을 느끼면 그걸로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