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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접어들며 혼자 걷는 여행을 시작한 박대영 SBS 기자

‘여행이란 외로움과 동행하는 여정이자, 내가 나의 유일한 동료가 되는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홀로 걷는 과정을 통해 이 말의 참뜻을 느끼며 스스로 내려놓기 연습을 하는 박대영 씨를 만났다.

 

 

 

Profile 박대영 •1968년생 •SBS 방송기자
Profile 박대영 •1968년생 •SBS 방송기자

 

27년 차 방송기자인 박대영 씨는 마흔 즈음부터 혼자 걷기 시작했다.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느끼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과 추억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을 풀어내고, 스스로를 달래어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선택이었다. 홀로 걷는 건 아주 단순하다. 목적지는 어디라도 좋고, 가는 길이 굳이 지름길일 필요도 없다. 그저 두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별거 아닌 일이 주는 즐거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 크다. 이토록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음을 그는 걸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언제부터 혼자 걷기 시작했나?

10년 전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개장하면서 걷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때가 있었다. 나 역시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길, 매력에 빠지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전국의 여러 둘레길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길의 매력에 푹 빠졌다. 혼자서 길을 걸으면 기분이 정말 좋았다. 왜, 마니아들은 길도 수집한다고 하지 않나? 갈수록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경험한 길의 목록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정말 뿌듯했다. 

 

혼자 걷는 이유가 있나?

혼자 걸으면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고요히 흐르는 바람소리를 깨닫고, 봄날의 여린 이파리에 내려 앉아 아롱대는 빛살을 바라보고, 길가 풀숲 어느 틈에서 수줍은 듯 고개 내민 풀꽃들과 눈을 맞추는 일은 혼자 있을 때라야 더 오롯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행이 있다면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길과 걸음에 집중하기 힘들다. 산을 오르든 길을 걷든 보행 속도가 서로 맞지 않을 때의 불편함 역시 무시 못할 요소다. 또 동행이 있으면 걷는 과정보다 목적지에 더 집중하게 된다. 

 

원래 홀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했나?

어린 시절 문학도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그때부터 시를 써보고 싶어 혼자 다니는 걸 즐겼다. 결혼한 뒤에는 아내의 ‘특별 허락’을 받아서 혼자 여행을 다녔다.(웃음) 무엇보다 천지간에 나 홀로 걷는 즐거움이 컸기 때문에 혼자 걸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나만이 존재하는 듯한 무한한 고독이 주는 막막함도 나름 중독성이 있다. 

 

익숙해지기 전에는 혼자 떠나는 게 막막했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동네 뒷산도 아니고, 멀리 지방까지 가서 홀로 걷는 문제이니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동행을 구해보려 했으나 당시는 지금처럼 동호회가 활성화되지 않아서 그마저도 어려웠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혼자 걷게 됐는데, 다니다 보니 홀로 걷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다른 이들과 함께 가보면 확실히 즐거움의 차이가 느껴진다.

 

얼마나 자주 걷기 여행을 다녔나? 

지난 4~5년 동안 월 3~4회 정도는 어디든 걸었다. 그곳이 어디든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슴 뛰는 일이었다. 

 

걷는 곳을 선택하는 기준이 뭔가?

트레킹 전문가가 아니라 취미로 걷다 보니 오롯이 ‘내가 힐링할 수 있는 길’을 고른다. 계절이 느껴지고, 적절한 난이도와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게 좋다. 몸이 적당히 수고로움을 느낄 만큼의 거리를 선호하다 보니 너무 짧은 길은 피하게 된다. 걷고 싶은 길은 미디어 검색이나 주변 소개를 통해 목록을 만들었다가 그중에서 선택한다. 신기한 건 무작정 간 곳 중에 감탄하며 걸은 길이 여럿이었다는 거다. 

 

혼자 떠나는 여행도 계획이 필요하지 않을까?

전혀. 얼마든지 ‘백(back)’할 수 있고, 계획이 취소될 수도 있다. 걷는데 누군가 “저 길이 더 나을 텐데”라고 조언하면 그리로 방향을 틀 수도 있다. 이런 게 바로 자유 아닐까. 혼자 걷는다는 건 그래서 좋은 거다. 

 

계획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발견한 멋진 길이 있다면?

3년 전 제주도 억새평원을 걸어보려고 무작정 떠났다. 그런데 여러 날을 걸었음에도 빼곡한 억새밭은 만날 수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에 걷던 길 위에서 검색을 했다. 그렇게 발견한 길이 ‘쫄븐 갑마장길’이다. 

당시 비가 내렸지만 억새에 눈이 먼 내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걷고, 그 길 중간에 우뚝 솟은 오름에 올랐다.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는 ‘따라비오름’이었다. 그곳에서 그토록 그리던 억새평원을 만났다. 물안개에 싸여 고요히 웅크리고 있던 따라비오름은 제주 도보 여행의 백미였다. 

 

가장 최근 걸어본 곳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여러 곳을 다니지는 못하고, 가까운 북한산의 의상능선을 걸었다. 의상능선은 난도가 좀 높은 코스지만, 북한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길이다. 혹자는 설악산의 ‘공룡능선’에 비하기도 한다. 실제로 걸어보면 규모는 작지만 바위산이 풍기는 장엄미가 설악산의 그것과 비슷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바위봉우리를 타고 넘는 스릴이나, 문득 멈춰 바라보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은 북한산 등산로 중에서 으뜸이다. 

 

혼자 걷다 보면 사색의 시간도 많을 것 같은데?

사실 걷는 행위 자체가 몸을 움직이는 수고로움을 견디는 과정이기 때문에 생각이 들어올 틈이 별로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불쑥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부분 자기 회한과 연민 같은 거다. 그래서 혼자 걷기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자신과 나누는 대화’라고 생각한다.

 

하루에 얼마나 걷나?

여정은 보통 2박 3일로 잡고, 하루 10km 이상씩 걷는다. 이 정도 거리는 대략 4~5시간 걸린다. 그냥 쭉 걷는 게 아니라 천천히 길을 느끼면서 가다 보니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굳이 빨리 갈 이유가 없지 않나?(웃음) 그렇게 걷다 보면 밤이 된다. 그럼 근처 숙박업소를 찾아 휴식을 취하고 아침에 다시 가고픈 길을 간다.

 

가장 오래 걸어본 경험은?

제주 올레길을 걸을 때 40km를 12시간에 걸쳐 걸었다. 모든 게 혼자라서 가능했다. 여럿이 갔다면 아무래도 상대를 배려해야 하니까 그만큼 못 걸었을 거다. 걷는 동안 길가에 들꽃이 보이면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그렇게 온종일 걷다보니 어느 순간 개운함이 찾아오더라. 마치 한바탕 울고 난 후 마음이 맑아지는 것처럼. 

 

앞만 보고 달렸고,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문득 중년이라는 고갯마루에 멈춰 서서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진 시기가 마흔 즈음이었다. 고달프고 아쉬웠던 삶의 여백을 다르게 채워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게 그 방법은 바로 ‘걷기’였다.

 

 

어떤 때 혼자 걷고 싶나?

마음이 답답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언제나 떠나는 목적은 걷기다. 대체로 떠나보면 해소가 된다. 살면서 엄청 힘든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다. 작은 힘듦이 쌓여 어느 순간 임계점에 도달하는데, 그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나는 경치 좋은 곳에서 좋은 길을 걸을 때 마음이 풀리고 희열을 느낀다.

 

걷기 여행을 시작한 이후 일상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나?

세상과 스스로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사는 게 별것 아니다’라는 다소 건방진 깨달음?(웃음) 느려도 괜찮다는, 조금 덜 가져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어설픈 자신감을 갖게 됐다. 

걸으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 예로 길가의 들꽃 중 내가 아는 꽃은 아무리 작아도 거대해 보이더라. 이는 세상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아지면서 독서량도 늘었다. 

 

나 홀로 여행이 주는 매력은?

홀로 떠나지 못하는 것은 ‘혼자’라는 데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외로울 텐데’, ‘무슨 재미로?’ 등의 생각이 집을 나서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미국 작가 존 뮤어는 “배낭을 메고 집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이 여행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떠나보면 알게 된다. 두 번 세 번 경험이 쌓일수록 고독을 즐기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놀랄지도 모른다.(웃음) 

 

 

걷기 여행을 할 때 꼭 챙기는 준비물은?

운동화가 가장 중요하다. 발목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트레킹화나 등산화를 신으면 좋다. 개인적으로는 수첩과 카메라도 중요한 준비물이다. 나는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사소하게 경험한 이야기를 여행이 끝난 후에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다. 순간순간의 느낌, 꽃 이름, 지명, 만난 사람의 이름 등 시시콜콜 기록해야 그 느낌이 쌓인다. 일종의 ‘감정 채록’이랄까? 느낌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쌓아놔야 나중에 스스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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