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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 예술가의 뮤즈

예술가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의 존재는 너무나 소중하다. 사랑과 이별, 우정과 배신 속에서 탄생한 작품은 시대의 역작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뮤즈를 살펴본다.

  • 입력 2022.01.04 14:19
  • 수정 2022.04.26 11:57
  • 2022년 1월호
  • 진주영 에디터

피카소의 유일한 여자 ‘친구’

거트루드 스타인 Gertrude Stein

1874~1946, 미국, 미술 컬렉터

파블로 피카소는 여자 관계가 복잡하기로 둘째가 라면 서럽다. 공식적으로 교제한 여성만 7명이고,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게 공공연한 사실. 여성 편력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여자는 두 종류로 여신이거나 현관 매트이거나”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도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이 있었다. 바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피카소의 연인이 아니면서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친 유일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 미술계가 주목하는 수집가였던 스타인과 피카소는 작품 거래로 안면을 텄다. 스타인은 일찍이 피카소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물적, 심리적 지원을 했다. 피카소 역시 자신을 지지해준 스타인의 초상을 그리면서 한 단계 발전하고자 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육체적 사랑을 나눈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피카소의 예술적 영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위대한 프랑스 화가들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녀는 피카소를 믿었고, 피카소는 그녀를 그렸다.

- 러시아 작가 파벨 첼리셰프

EPISODE. 닮지 않은 초상화

피카소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을 완성하기까지 스타인은 80번이나 모델로 서야 했다. 엄청난 공을 들인 작품이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혀 안 닮았는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피카소는 “언젠가 그녀가 그림을 닮게 될 것”이라며 당당하게 응수했다.

 

슈만을 거장으로 만든 천재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1819~1896, 독일, 피아니스트

소송까지 가서 얻은 결혼 승낙

1840년, 서른 살 로베르트 슈만과 스물한 살 클라라 슈만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반대하는 클라라의 아버지를 상대로 혼인 허가 소송까지 진행한 끝에 어렵사리 쟁취한 결과였다. 당시만 해도 클라라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한 상태였고, 슈만은 신예 작곡가에 불과했다. 결혼 이후 클라라의 내조를 받은 슈만은 가곡집 <시인의 사랑>을 포함해 수많은 곡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1856년 정신병이 깊어진 슈만은 요양원에서 명을 달리한다. 그때 슈만과 클라라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평생 스승의 아내를 사랑한 브람스

1853년 스무 살 청년이던 브람스는 스승인 슈만의 집에 머물며 수업을 받는 동안 클라라에게 연정을 품게 됐다. 그러나 브람스가 사랑을 고백할 때마다 클라라는 딱 부러지게 거절하곤 했다. 슈만이 죽은 후에도 둘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1895년 클라라의 병세가 악화됐을 때 브람스는 그녀를 위해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했다. 인생무상과 죽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곡이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건강 악화로 생을 마감했다.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

- 클라라의 죽음을 애도하는 브람스

에드바르 뭉크의 마돈나

당뉘 유엘 Dagny Juel

1867~1901, 노르웨이, 작가

평생 독신으로 지낸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에게도 잊지 못할 세 여인이 있다. 스물두 살에 불같이 사랑한 밀리 탈로, 그의 뮤즈가 된 두 번째 여인 당뉘 유엘, 마지막 연인 툴라 라르센이 그들. 이 중 유엘은 뭉크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인이다. 뭉크는 1893년 독일 베를린에서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중 유엘을 만났다. 당시 유엘은 신비한 매력으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던 인물. 뭉크가 그린 ‘손들’이란 작품을 보면 자신 있게 포즈를 취한 유엘에게 닿으려는 수많은 손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유엘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유엘은 뭉크의 대표작 ‘마돈나’의 모델이기도 하다. 뭉크와 유엘이 연인 관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건 폴란드 작가와 결혼한 유엘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자, 뭉크가 “당뉘 유엘은 예술가에게 영감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는 존재”였다며 진심으로 추도했단 사실이다.

그의 그림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벌거벗은 영혼을 보여준다.

- 당뉘 유엘의 남편 스타니슬라프 프시비세프스키

EPISODE. 비극으로 끝난 마지막 사랑

유엘이 죽은 후 뭉크는 툴라 라르센과 다시 불같은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뭉크는 자신에게 집착하는 라르센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에 절망한 라르센이 권총 자살을 하겠다며 소동을 피웠다. 이 과정에서 실수로 발사된 탄환이 뭉크의 왼손 중지를 날려버렸고, 두 사람은 파경을 맞았다.

구스타프 말러가 바친 사랑의 노래

알마 쉰들러 Alma Schindler

1879~1964,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녕, 나의 리라.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을 위해 죽는다. 알마.

- 구스타프 말러의 작곡 노트 중에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는 마흔한 살이던 1902년 자신보다 열아홉 살 어린 알마에게 청혼한다. ‘제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헌정한 말러의 정성에 알마도 감격했는지 결혼을 승낙한다. 이후 선보인 말러의 교향곡 곳곳에서 알마를 향한 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다만 말러가 음악 작업에 집중하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탓에 알마는 네살 연하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교제를 시작한다. 알마의 외도에 상심한 말러는 심리학자에게 상담을 받을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1910년 심장병으로 죽기 직전, 말러는 ‘교향곡 제10번’을 작곡하며 슬픔을 달래려 했다. 이 곡은 그가 죽으며 미완성으로 남았고 말러와 알마, 그로피우스의 삼각 관계도 끝이 났다. 이후 그로피우스와 결혼한 알마는 열 살 연하의 프란스 베르펠과 또다시 바람을 피워 파경을 맞는다.

채플린의 마지막 여인

우나 오닐 Oona O’Neill

1925~1991, 영국, 배우

20세기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은 쉰 살이 되기 전에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복잡한 연애사를 남겼다. 세 번의 결혼 기간을 합쳐봐야 겨우 10년쯤 될까. 이런 그가 쉰네 살에 열여덟 살 신부를 맞이한다. 바로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이다. 그녀는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와 살면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리워했다. 자신보다 서른여섯 살이나 많은 채플린를 통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웠을지도 모른다. 결혼한 지 9년 만에 공산주의자로 몰린 채플린이 미국에서 추방당하자 우나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의 곁을 지킨다. 스위스로 거처를 옮긴 두 사람은 여생을 함께하며 평생의 동반자로 남았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딜런의 노랫말이 된 여인

수지 로톨로 Suzie Rotolo

1943~2011, 미국, 아티스트

 

아니,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내 사랑이여.

난 갖고 싶은 것이 없어요.

오로지 당신만 무사히 돌아와줘요.

저 쓸쓸한 바다를 건너.

- 밥 딜런의 ‘Boots of Spanish Leather’ 중에서

 밥 딜런은 1960년대 초반 포크 붐을 일으킨 미국의 싱어송라이터다. 1963년 발표한 앨범 <The Freewheelin’>의 커버 사진에는 당시 연인 수지 로톨로가 등장한다. 열일곱 살 수지를 처음 본 스무 살 딜런은 “마치 로댕의 조각상이 살아서 걸어오는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로 수지에게 매료됐다. 인권 단체에서 일하며 사회 운동에 활발히 참여한 수지의 영향으로 딜런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가 사회 참여적 가사를 여러 번 쓴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지 가족의 반대, 다른 여인의 등장 등을 이유로 여러 차례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 결국 헤어졌다. 이후 딜런은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려 ‘Boots of Spanish Leather’, ‘One Too Many Mornings’ 같은 노래를 만들었다. 마음의 상처를 음악으로 극복한 것이다.

두 기타리스트의 불꽃 같은 사랑

패티 보이드 Pattie Boyd

1944년생, 영국, 모델패티 보이드와 조지 해리슨

 

그녀의 미소 어딘가에는

그녀가 알고 있단 것이 보여요.

내겐 다른 사랑은 하나도 필요 없다는 것이요.

그녀의 스타일에는 뭔가가 있어요.

난 지금 그녀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 비틀스의 ‘Something’ 중에서

두 기타리스트의 불꽃 같은 사랑패티 보이드 Pattie Boyd. 1944년생, 영국, 모델 패티 보이드와 에릭 클랩턴
두 기타리스트의 불꽃 같은 사랑패티 보이드 Pattie Boyd. 1944년생, 영국, 모델 패티 보이드와 에릭 클랩턴

1962년 영국 패션모델이던 패티 보이드는 영화 촬영장에서 비틀스 기타리스트였던 조지해리슨과 만난다. 패티를 보고 첫눈에 반한 조지는 적극적으로 구애했고, 3년 후 둘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조지가 발표한 자작곡 ‘Something’은 달콤한 멜로디와 가사로 패티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그러나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조지 때문에 속을 끓이던 패티는 의도적으로 남편의 동료인 에릭 클랩턴에게 접근한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에릭 역시 패티에 대한 진심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1970년에 발표한 노래 ‘Layla’ 에는 에릭의 절절한 애심이 녹아 있다. 결국 1977년 조지와 이혼한 패티는 2년 후 에릭과 결혼한다. 패티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시기, 에릭이 선보인 ‘Wonderful Tonight’은 세기의 러브 송으로 뜨거운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결혼 생활도 8년 만에 파경으로 치닫고 만다. 이제 두 기타리스트와 패티 보이드 사이에는 사랑 대신 아름다운 시절을 그린 노래만이 남아 있다.

존 레넌이 의지한 영혼의 동반자

오노 요코 Yoko Ono

1933년생. 일본, 행위예술가

 

1940년 10월 9일 출생,

1966년 오노 요코를 만남.

- 존 레넌이 직접 정의한 자신의 삶

 1966년 가을, 영국 런던의 한 전시장에서 마주한 존 레넌과 오노 요코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각자 가정이 있는 상태였지만 이혼도 불사한 두 사람은 1969년 부부의 연을 맺는다. 얼마 후 비틀스가 해체하자, 요코는 멤버 불화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되며 ‘희대의 마녀’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다. 세간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은 두 사람은 다양한 행위예술을 펼치며 평화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신혼여행 중에는 호텔 침대 위에 앉아 평화를 이야기하는 ‘Bed in Peace’ 퍼포먼스를 전개하고, 1971년에 발표한 곡 ‘Imagine’을 통해서는 종교와 국경, 사유 재산이 없는 유토피아를 꿈꿨다. 이렇듯 진보 성향의 행위예술가 오노 요코의 존재는 존 레넌의 삶과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80년 마흔 살의 나이에 기습 총격으로 사망한 존 레넌은 피살되기 5시간 전에 미국 대중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의 표지 촬영에 임했다. 당시 레넌은 “요코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해달라”는 사진작가의 주문에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요코를 끌어안았다. 영혼의 동반자인 요코를 죽는 날까지 사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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