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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취향엔 책임이 따른다

철학에 빠지든, 야구에 빠지든.
매일같이 골머리를 썩는 건 마찬가지.

 

 

나의 서사는 나의 것인가

서사의 위기

한병철, 다산초당

정지환 에디터

유독 짧았던 4월의 벚꽃이 못내 아쉬워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애써 찍어 올린 스토리는 하루 만에 사라진다. 나의 이야기는 꽃잎보다 빠르게 졌다. 꽃과 함께한 순간마저 가벼워진 듯했다.

 

<서사의 위기>는 서점에 갔다가 제목만 보고 고른 책이다. 대부분 철학 서적은 그 내용이 깊어 분량은 짧아도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데, <서사의 위기>는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점이 평소 의문을 품던 지점과 같아 비교적 빠르게 읽었다. 저자는 서사의 위기를 말하며 SNS 플랫폼의 ‘스토리’를 예로 든다. 스토리는 시간을 파편화해 데이터로 만든다. 어떠한 서사도 포함하지 않는, 찰나의 시각 정보다. 24시간 동안만 유지된다는 시간 제한은 묘한 강박마저 일으키며 더 많은 데이터를 강요한다. 스토리는 인간을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순간에 예속된 존재로 만든다.

 

서사엔 시간적 원근감이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손실과 왜곡, 틈이 있다. 다시 말해, 서사에는 그만한 시간의 폭이 필요하다. 경험한 모든 순간이 데이터가 되어 ‘현재’에 존재한다면 이는 보고서와 다를 바 없다. 타인이 나를 정보로 본다면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해석할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은 나의 이야기는 나의 ‘서사’라고 볼 수 있을까.

 


 

 

이기지 않는 야구를 하는 것

불펜의 시간

김유원, 한겨레출판

김보미 에디터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어쩌면 이제까지 이런 책을 찾아 헤맸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남 후 지금까지 <불펜의 시간>은 나의 ‘인생 책’ 리스트에서 다른 책에 자리를 내어준 적이 없다.

 

이 작품은 야구를 중심으로 세 인물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 보인다. 트라우마로 볼넷을 남발해 ‘쿠크다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프로야구 투수 ‘혁오’, 불안장애를 가진 회사원 ‘준삼’, 승부 조작 사건을 파헤치게 되면서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기자 ‘기현’까지. 차갑고 날카로우며,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승패의 논리로 바라보면 이 책 속 등장인물은 모두 패전투수다. 하지만 이들은 이기지 않는 것을 ‘선택’하며 승자와 패자로 분류되는 시선을 거부한다. 어떤 내일이 올지 모르지만 마운드가 아닌 불펜에서의 시간을 자신으로서 살아간다.

 

<불펜의 시간>은 흔한 스포츠 서사와는 다르다. 개인적 서사에서 출발해 거대 시스템의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범위를 넓힌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 그리고 이러한 분류에 참여하지 않는 것.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실패해도 괜찮아’와는 결이 다른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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