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의학서 <의약론(醫藥論)>에서 말하는 최고의 의사는 “병을 고치는 것을 넘어 환자의 마음까지 치유하는 ‘심의(心醫)’”다. 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안고 있는 망막질환자들에게는 정밀한 수술만큼이나 심리적 안정이 필요하다. 망막질환에 정통한 안과 전문의 이성진 교수는 탁월한 술기와 함께 환자의 마음까지 살피는 진료로 ‘심의’의 길을 걷고 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 옛말이 있다. 눈이 세상을 인지하고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80% 이상이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만큼 안과질환은 일상생활에 제약을 불러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특히 눈속 가장 뒤쪽에 위치한 망막이 손상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치료 시기를 놓치면 영구적인 시력 저하나 실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환자의 마음까지 다치게 만든다. 망막질환자 중에선 신체적 불편뿐 아니라 불안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나이관련 황반변성을 진단받은 환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우울증 발병 위험이 15%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망막 전문의에게 세밀한 술기뿐 아니라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요구되는 이유다.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안과 이성진 교수는 망막질환은 물론 환자의 마음까지 돌보는 의사다. 그가 이끄는 망막클리닉은 환자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응급수술이 가능하도록 ‘원스톱(One-Stop)’, ‘온콜(On-Call)’ 시스템을 구축해 24시간 수술 대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새벽 출근도, 밤늦은 퇴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술을 통해 인연을 맺은 환자들에게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면서 원활한 치료를 돕고, 환자의 불안감을 줄이기 위한 ‘핫라인’을 마련한 의사도 바로 그다. 그동안 1000례가 넘는 망막박리 수술을 응급으로 진행하며 수많은 환자에게 세상을 향한 희망의 창을 열어주고 있는 이성진 교수를 만났다.
1991년 순천향대학교 의과대학을졸업하고, 1996년과 2000년에 순천향대학교병원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세브란스병원에서 안과 전공의와 망막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2005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안과학 박사과정을 마친 후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에모리대학교 의과대학 안센터에서 연수했다. 2019년까지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 안과 과장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고,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진료부원장으로 근무했다. 또 순천향대학교중앙의료원 대외협력단장과 순천향대학교건강과학대학원 건강과학CEO과정 부원장을 맡고 있다. 보건의료 분야전문지에 12년간 350회 이상의 망막 관련칼럼을 기고했으며, 2013년부터 현재까지 베트남 퀴논시 병원에 백내장 수술센터 건립을 돕고 현지 안과의사의 수술을 지도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수술 일정이 있었다. 평소 응급수술이 많은 편인가?
그렇다. 2001년부터 당일 응급 망막박리 수술을 시작해 2010년부터는 연간 100건가량,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야간 응급수술을 했다. 그 외에 다양한 응급수술을 당일에 시행 했으므로 젊은 시절 20년간 수술실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지금은 최근 의정 갈등으로 전공의가 없어 당일 응급수술을 이전처럼 많이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응급수술을 정규 수술로 바꿔 진행하고 있다.
망막은 수련하기 고된 분야 중 하나인데, 이 분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
중학생 때 선생님께서 망막박리로 수술을 받으셨는데, 그 분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눈앞에 검은 커튼이 점점 드리우다가 결국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고 하셨다. 떨어진 망막을 붙이기 위해 눈 안에 가스를 넣고 한 달간 엎드려 있는 등 치료 방식도 생생하게 들었는데, 1980년대만 해도 망막박리를 치료할 수 있는 전문의가 많지 않았고, 기술적 한계도 있어 결국 실명하셨다. 망막박리 증상과 치료에 대해 생생하게 들은 경험이 인상 깊게 남아 이 분야에 차츰 관심이 생겼다. 또 어릴 때 읽은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는’ 일이 예수의 사명 중 하나라는 성경 구절도 영향을 주었다. 망막은 실명의 기로에 서 있는 환자가 많은 분야다. 그분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질환을 치료해 다시 빛을 볼 수 있게 돕고 싶다는 생각에 망막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주로 어떤 질환을 다루나?
망막에 생긴 다양한 질환을 본다. 우리 눈을 카메라에 비유하면 망막은 필름 역할을 한다. 망막은 눈 속에 벽지처럼 발라져 있는데, 이 벽지가 찢어져 떨어지는 망막박리, 당뇨로 인해 망막혈관이 손상되는 당뇨망막병증, 망막에 노폐물이 쌓여 나타나는 황반변성, 망막혈관이 막히는 망막혈관폐쇄, 그리고 유전질환인 망막색소변성 같은 질환은 실명의 위험이 매우 높은 질환이다.
최근 망막질환 발병률이 높아지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망막질환은 대부분 노화와 관련이 있다. 망막은 외부로부터 빛을 받아 전기로 바꾸는 일을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단백질이 물로 분해되어 빠져나가지 않으면 망막에 노폐물이 축적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망막의 시각세포들이 손상된다. 또 현대화된 식생활 습관으로 인한 당뇨, 고혈압, 고지혈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질환은 망막의 미세한 혈관을 손상시켜 시력에 문제를 일으킨다.
이제까지 어떤 수술을 집도했나?
망막 수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가장 많이 하는 수술은 망막의 중심부인 황반 표면에 생긴 비정상적 막(망막앞막)이 오그라들며 생긴 황반주름을 펴주는 수술이다. 망막혈관이 약해져 비정상적 출혈과 망막견인이 생기는 당뇨망막병증 수술도 많이 한다. 그 외에 시야가 점점 검게 변하는 망막박리 수술과 백내장 수술 중 문제가 생겨 연락이 온 경우 가능하면 당일에 수술을 한다.
망막 클리닉에 24시간 온콜 시스템을 도입한 계기가 궁금하다
36세 때 망막 전임의 과정을 마치고 모교 병원에 돌아와 진료실을 열었을 때만 해도 환자가 많지 않았다. 망막 수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의사로서의 무력감에 당시 우리 병원 명의셨던 외과 교수님을 찾아가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남들이 하기 싫어하고 어려운 분야를 맡아 10년간 꾸준히 하면 환자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다 실명의 기로에서 불안해하는 망막박리 환자를 당일에 신속하게 수술해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망막박리 당일 응급수술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안과의원에서 백내장 수술을 하다 문제가 생긴 경우도 콜을 받으면 대기하고 있다가 당일 바로 문제를 해결해 드렸다. 어떤 의사는 “안과가 왜 이렇게 힘들게 일하냐”고 말하기도 했는데, 당시 내게는 밤에 응급수술로 몸이 피곤한 것보다 낮에 내가 볼 수 있는 환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더 힘들었다.
안과질환은 생명을 위협하는 응급 상황은 아니라고 인식하는 이가 많다. 그런데도 망막박리를 응급으로 수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최근 망막박리는 진단을 받은 후 2주 안에 수술하면 결과가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응급수술 항목에서 제외가 되었다. 그러면 밤에 응급수술을 하러 나와야 하는 마취과 의사와 간호사, 응급수술 간호사, 안과 의사 등 대략 10명의 응급수당이 지원되지 않아 병원이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병원은 응급수술 항목에 있는 수술이 아니면 손해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환자는 어떨까?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검은 점들이 떠다니다 위쪽 시야에 검은 커튼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점점 내려와서 눈앞이 보이지 않게 된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두렵겠는가? 그런데 2주 기다렸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시간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불안하겠는가? 당연히 빠른 수술을 시행하는 것이 불안을 덜어주는 일일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가 궁금하다
성악과 학생이 졸업 연주회를 하루 앞두고 망막박리가 생겨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을 마친 다음 날 아침 퇴원해 한쪽 눈을 가린 채 연주회를 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동료 교수님의 자녀가 양안 망막박리로 내원한 경우도 있었는데, 수술이 까다로운 상황이라 나보다 경험이 더 많은 스승님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하지만 꼭 내가 수술해 주면 좋겠다고 해 밤늦도록 두 눈 망막박리를 수술했고, 다행히 시력을 되찾았다.
단안으로 시골에 사시던 어르신을 수술한 사례도 기억난다. 한쪽 눈마저 황반변성으로 출혈이 생기며 앞이 안 보이게 되었는데, 치료가 어려워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사정을 들은 이웃이 내 환자였는데, 예전에 받은 내 명함을 건네며 한번 연락해 보라고 했다더라. 환자에게 연락을 받은 다음날 바로 응급수술을 진행해 현재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계신다.
또 호주에서 망막박리가 발생해 주말에 한국에 급히 도착한 환자의 수술도 진행했다. 경주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하던 중 연락을 받고 올라와 급히 수술을 하고 다시 경주로 내려갔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인데, 그 분은 두고두고 고맙다며 병원에 지속적으로 큰 기부를 해주고 계시다. 망막박리 응급수술을 직접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환자들을 만나면 그 시절 긴박했던 상황이 생각난다.
수술받은 환자들에게 개인 연락처를 알려주고 있다
안과질환에 대해 잘 모르면 두려움과 절망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을 해소해 드리고 싶어 젊을 때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고, 망막질환으로 고민하는 분들이 올린 글에 답변을 달기도 했다. 내가 수술을 집도한 환자에게 개인 연락처를 드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진료 일정이 꽉 차 있지만 그분들이 눈에 이상이 생겼다고 연락하시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다음 날 내원하게 해 진료를 한다. 하루에 대여섯 건 연락이 오고 있다.
오직 환자를 위해 차별화된 진료를 하고 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 온종일 진료를 하는데, 화요일은 당일 접수하신 모든 환자를 그날 진료받을 수 있게 해주다 보니 저녁 늦게까지 진료가 계속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는 아침 7시부터 환자를 진료했다. 사회 초년생인 젊은 환자들이 안과질환으로 회사를 빠지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그 시간에 진료실 문을 열었는데, 환자가 정말 많이 왔다. 10년 전 우리나라에 황반변성이라는 병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는 서울시청 홀을 빌려 세브란스 스승님이신 권오웅 교수님과 함께 황반변성 예방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전국에서 1000명이 넘는 환자를 대상으로 황반변성 예방과 치료를 강의했다. 2년 후에 다시 한번 강의를 열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계속하지 못해 아쉽다.
이런 생활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환자들은 진료실을 찾아 자신이 겪는 두려운 상황을 매우 생생하게 말한다. 그 말만 들어도 무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환자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니 어떻게 그분들을 그냥 지켜보고 있겠는가. 해외 봉사를 갔을 때 현지인들의 어려움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팀을 꾸려 봉사활동을 하러 가게 되지 않나. 그 마음과 똑같다. 그래서인지 망막박리 수술을 당일에 하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24시간 안에 수술하지 않으면 스스로 100점짜리 치료를 못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평소 체력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
40대가 되기 전에 응급수술을 정말 많이 했다. 보람찼지만 한편으론 힘들었다. 40세가 되던 해 미국 연수를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2년 넘게 달리기와 근력운동을 했는데, 그걸로 지금까지 20년 정도를 버티고 있다.(웃음) 이제 체력이 많이 고갈된 것 같아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망막질환의 경우 아직 뾰족한 치료법이 없는 경우도 많다. 실명의 기로에 놓인 환자를 대할 때 어떤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나?
망막색소변성 같은 유전성 실명 질환은 아직 명확한 치료법이 없는 상태이고, 망막박리는 수술을 해도 20명 중 1명은 망막이 붙지 않아 시력을 잃게 된다. 그럴 때는 의학적으로 냉정하게 사실을 말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 문제는 암 환자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이 좋은지 그렇지 않는 것이 좋은지 고민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며, 오래된 의학적 딜레마이기도 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환자가 절망감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다른 병원에서 절망적인 이야기만 듣고 내게 왔을 분들에게 더 이상 그런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수술이 가능한 상태이고,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아질 여지가 있다면 내 실력을 다해 치료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린다. 환자들에게 실명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도 치료에 중요한 부분이며, 그것은 의사들이 할 수 있는 당연한 몫이라고 생각한다.
관심을 두고 있는 망막 치료 분야가 있다면?
망막 치료 방식은 크게 세 분야로,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줄기세포를 망막에 주사해 시각세포의 손상을 막는 줄기세포 치료, 변형된 유전자를 정상으로 치료해 질병의 진행을 막는 유전자 치료, 그리고 컴퓨터 칩을 망막 아래에 삽입하는 인공 망막 수술이다. 아직 모든 것이 한계가 있지만 언젠가 줄기세포나 유전자 치료도 듣지 않는 눈에 인공망막 수술을 해주고 싶은 꿈이 있다. 지금보다 더 넓은 시야와 정밀한 상이 맺히게 하는 인공망막이 빨리 개발되기를 바란다.
최근에는 망막색소변성 중 특정 유전자에 문제가 생긴 타입에서 시각세포가 아직 손상되지 않은 젊은 환자에게 유전자 치료가 가능한 약물이 개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건강보험이 적용되면서 실제 치료받는 환자가 생기고 있는데, 앞으로도 치료 기술이 발전해 유전성 망막색소변성 환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의사로서 최종 목표가 궁금하다
병아리 망막 의사 시절, “망막이라는 학문을 좋아하고, 망막 수술을 좋아하며, 망막질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제까지 그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환자가 없으면 의사는 쓸데가 없다’는 성경 말씀이 있듯, 의사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사람이 아닐까. 어쩌면 진단과 수술보다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학생 때부터 들은 ‘늘 겸손하게 환자들을 대하고, 사랑과 희망의 말을 전하는 의사가 되라’는 순천향의 정신을 마지막 환자에게까지 지키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