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안곡이란?
외국곡을 이용해 멜로디는 그대로 두고 가사만 시대의 풍토에 맞게 한글로 바꿔 다시 만든 곡. 1990년대 이후 외국과 저작권 협정이 이뤄지며 번안곡 대신 리메이크곡이라 부른다.
1960년대 이전
일본 창가, 엔카가 주류
한국전쟁 이후 미군을 통해 유입된 팝송 번안곡 태동.
1960년대
서양 번안곡의 황금기.
한명숙, 현미, 패티 김, 신중현 등 미군 부대 공연단 출신 연예인들이 주로 활동.
1970년대
DJ 시대.
무교동의 ‘세시봉’ 등 음악다방에서 포크 가수들이 번안곡 위주의 앨범 활동.
1980~1990년대
글로벌 리메이크 시대
경제발전, 해외여행 자유화, 문화 교류 확대 등의 영향으로 세계 각지의 음악이 소개되기 시작.
2000년대 이후
일본 가요 전성시대.
한류 열풍이 불고 일본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일본 가요 번안곡이 대거 등장.
2010년대 이후
K-팝 세계 진출
K-팝의 위상이 올라가며 번안곡은 사라지고 우리 가요가 외국에서 리메이크되는 사례가 많아짐.
흑인 소울의 시작
현미 '밤안개'(1962)
원곡: 냇 킹 콜 'It's a Lonesome Old Town'(1962)
트로트가 유행하던 1960년대에 도저히 우리나라 가수의 감성이라고 믿을 수 없는 세련된 재즈풍의 노래가 나타났다. 현미의 데뷔곡 ‘밤안개’는 끈끈한 멜로디와 그녀의 굵직한 탁성이 만나 1960년대 최고의 인기 곡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지금 들어도 세련된 멜로디의 원조는 1950년대 미국 빌보드 차트를 휩쓴 흑인 재즈 가수 냇 킹 콜의 ‘It’s a Lonesome old town’이었다.
이 곡이 현미에게 간 이유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작곡가 이봉조 덕분이다. 그는 라디오에서 우연히 냇 킹 콜의 원곡을 듣고는 ‘이거다’ 싶어 급히 편곡을 했고, 여기에 한글 가사를 붙여 현미에게 주었다. 흑인 소울이 넘쳤던 현미의 목소리와 끈적한 멜로디는 찰떡같이 맞아떨어졌고, 현미는 이 곡을 자신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으로 만들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Episode.
냇 킹 콜의 원곡 역시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사랑받았는데, 1995년에는 스팅이 동명의 제목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그루브'와 '뽕짝'의 믹스 매치
조영남 '최진사댁 셋째딸'(1969)
원곡: 앨 윌슨 'The Snake'(1968)
가수 조영남은 번안곡을 많이 부른 것으로 유명하다. 데뷔곡 ‘딜라일라’(1968) 역시 미국의 톰 존스가 부른 ‘Delilah’(1968)가 원곡이다. 그의 커리어 중에서도 독특한 가사로 유명한 ‘최진사댁 셋째딸’은 한국적 소재와 노랫말로 민요 같은 느낌도 있는데, 실상 원곡은 미국의 유명 소울 가수 앨 윌슨의 ‘The Snake’다. 심지어 가사 내용은 꽁꽁 언 뱀을 녹여주려 품속에 품었다가 녹은 뱀이 자신을 물어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교훈을 남긴 <이솝 우화>에서 착안한 것. 트럼프가 대선운동 당시 난민을 뱀에 비유하며 이 노래를 사용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원곡의 펑키한 리듬과 소울 넘치는 샤우팅은 조영남 버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원곡을 들어보면 가장 놀랄 만한 노래 중 하나다.
‘Oh, shut up, silly woman’ said that reptile with a grin
(‘조용히 해 어리석은 여자야’라고 뱀은 웃으며 말했어) - 앨 윌슨 ‘The Snake’
대한민국 1세대 힙합 듀오
하청일·서수남 '팔도유람'(1971)
원곡: 행크 스노 'I've Been Everywhere'(1962)
흔히 대한민국 1세대 힙합 가수 하면 1990년대에 활동한 듀스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팔도유람’을 들어보면 진정한 1세대 힙합 전사는 하청일과 서수남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 ‘팔도유람’은 느린 템포의 포크송으로 시작해 숨이 가빠질 정도의 빠른 템포로 변하며 전국 팔도 여행지를 속사포 같은 랩으로 나열한다. 가사도 적지 않아 웬만하면 완곡하기 힘든 곡이다.
두 사람을 스타덤에 오르게 한 이 노래의 원곡은 캐나다 가수 행크 스노의 ‘I’ve Been Everywhere’. 원곡 역시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지역을 빠르게 늘어놓는데, 어린 시절 떠돌이 생활을 하며 음악을 배운 행크 스노의 자전적 가사라고 한다. 서수남은 미8군 쇼 출신으로 미군부대에서 팝을 즐겨 듣다 이 곡을 접했다.
시대상을 담은 아름다운 명곡
양희은 '아름다운 것들'(1972)
원곡: 스코틀랜드 민요 'Mary Hamilton'
1970년대에 탄생한 곡들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과 비상시국에 대한 분노를 가사로 풀어낸 사례가 많다. 양희은이 부른 ‘아름다운 것들’ 역시 그 대표 격인 명곡. 작사가 방의경은 스코틀랜드 민요 ‘Mary Hamilton’에 아름다운 것들이 계속 사라지는 1970년대의 시대상을 담아 가사를 붙여 한 대학교 축제에서 불렀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양희은이 노래를 듣고 곡을 달라고 요청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아름다운 것들’과 마찬가지로 원곡 역시 슬픈 가사가 돋보이는데, 왕의 시녀가 왕의 아이를 가졌다가 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로 당시 서구권에선 이미 여러 가수가 리메이크한 바 있었다. 가장 유명한 버전은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가 자신의 데뷔 앨범에 실은 동명의 곡이다.
동요가 아니라 빌보드 2위곡
이용복 '어린 시절'(1974)
원곡: 클린트 홈스 'Playground in My Mind'(1973)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1절 도입부만 들어도 누구나 ‘아! 그 노래!’ 하게 되는 국민 가요. 어린이 대상 방송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한 콩트에서 공식처럼 등장하는 곡이다.
MBC 10대 가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이용복의 대표곡이자 최고 히트곡인 이 노래의 원곡은 1973년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오른 클린트 홈스의 ‘Playground in My Mind’다. 원곡 도입부에도 나오는 어린이의 앙증맞은 코러스는 작곡가 폴 밴스의 아들 필립 밴스가 불렀다. ‘어린 시절’에도 이 곡의 백미인 어린이 코러스를 그대로 담아 원곡의 느낌을 살렸다.
레크리에이션 간판곡
전영 '모두가 천사라면'(1983)
원곡: 베르너 토마스 'Il Ballo del Qua Qua'(연도 미상)
4050 남성이라면 누구나 어린 시절 ‘국민학교’에서 이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해본 기억이 있을 것. 교회 수련회에서 레크리에이션용 음악으로 질리도록 쓴 곡으로도 유명하다. 원곡은 스위스 아코디언 연주자 베르너 토마스가 작곡한 ‘Il Ballo del Qua Qua’다. 곡 중간에 나오는 반주 소리가 마치 오리 소리 같다고 해 ‘꽥꽥송’으로도 유명하다.
해외에서는 1970년대 독일 옥토버페스트에서 맥주를 마시며 부르는 노래로 먼저 알려졌다가 1980년 독일 그룹 일렉트로니카스가 ‘The Dance of Little Bird’라는 제목으로 편곡해 크게 히트했다. 이를 계기로 전 세계에서 140번 넘게 리메이크됐는데, 이탈리아의 칸초네 가수 알바노 카리시와 로미나 파워가 동요 버전으로 부른 것이 다시 한번 인기를 얻으며 20세기 최고 인기 동요로 자리 잡았다. 가수 전영은 독일 유학 시절 들은 이 곡을 ‘모두가 천사라면’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알 수 없는 배신감
전인권 '사랑한후에'(1987)
원곡: 앨 스튜어트 'The Palace of Versailles'(1978)
두 말하면 입 아픈 한국 록의 전설 전인권. 그가 밴드 들국화를 떠나고 처음 발표한 솔로 앨범에서 가장 크게 히트한 노래 ‘사랑한 후에’는 아직까지 남자들의 노래방 애창곡으로 인기가 높다. 들국화의 감성과 전인권 스타일의 보컬이 너무 완벽하게 맞았기 때문일까? 이 곡이 번안곡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 든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원곡은 영국 포크송 가수 앨 스튜어트가 부른 ‘The Palace of Versailles’인데, 차분한 포크송으로 전인권 버전과 매우 다르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가사로 멜로디가 조금 더 가볍고 템포 역시 빠르다. 하지만 전인권은 이 곡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가사를 담아 더 무겁고 애잔한 분위기를 더해 원곡을 뛰어넘는 노래라는 평을 받았다.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 전인권 ‘사랑한 후에’
전설과 레전드의 만남
김광석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1995)
원곡: 밥 딜런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1963)
요절한 천재 가수이자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가수 김광석. 그가 1995년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다시 부르기 2>에 수록된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또 다른 해외 레전드 가수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다. 원곡의 주인공은 바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가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 김광석은 밥 딜런이 1963년 발표한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를 번안해 노래했다.
사실 김광석이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직접 번안한 것은 아니다. 1974년 가수 양병집이 ‘역’이란 노래로 번안한 것을 김광석이 자신의 스타일로 다시 부른 것. 김광석과 밥 딜런의 시대는 다르지만 두 가수의 음색과 툭툭 던지듯 부르는 창법이 비슷해 마치 한 가수가 부르는 듯하다. 한편 원곡이 실린 밥 딜런의 앨범 ‘The Freewheelin’ Bob Dylan’(1963)은 2012년 <롤링스톤>이 선정한 세계 500대 명반에 선정되어 시간이 지나도 명반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알고 들으면 영락없는 동유럽 스타일
심수봉 '백만송이 장미'(1995)
원곡: 라트비아 민요 ‘Dāvāja Māriņa’
‘트로트 발라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전설 심수봉의 경력 중 가장 이질적인 노래다. 그녀의 메가 히트곡인 이 음악은 사실 라트비아 민요 ‘Dāvāja Māriņa(마리냐가 준 소녀의 일상)’을 번안한 곡이다. 음악 방송 PD 출신인 심수봉의 남편은 어느 날 우연히 들은 원곡이 심수봉과 잘 어울리겠다 싶어 소개해주었고, 심수봉 역시 편곡과 멜로디가 좋아 듣자마자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다만 원곡 가사가 라트비아의 비극적 역사를 모녀 관계에 빗댄 것이라 심수봉이 직접 새로운 가사를 썼다고 한다. 워낙 애절한 노래를 잘 부른 그녀였기에,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것뿐. 그녀는 방송에 나와 ‘백만송이 장미’ 탄생 이야기를 할 때면 꼭 남편 덕분에 탄생한 곡이라며 남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부부가 아니었다면 많은 이가 명곡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인정한 명곡
쥬얼리 'One More Time'(2008)
원곡: 인그리드 'One More Time'(2005)
2000년대 후반 ‘텔미’(2007), ‘So Hot’(2008), ‘No Body’(2008)로 이어지는 원더걸스의 이른바 ‘텔쏘노’ 아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댄스 열풍을 일으킨 곡으로 쥬얼리의 전성기를 이끈 곡이다. 중독성 넘치는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두 손가락을 맞대는 ‘ET춤’이 큰 화제가 되어 인터넷상에서 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냈다.
원곡은 이탈리아 가수 인그리드의 첫 번째 싱글 앨범 <One More Time>으로 발매 직후 그리스, 스웨덴 차트에서 1위를 휩쓸고 덴마크·독일 등 유럽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끈적한 원곡 가사 분위기를 쥬얼리가 그대로 살려 섹시 콘셉트로 밀어붙인 것이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재미있는 사실은, 2021년 현재 원곡의 공식 유튜브 뮤직 비디오 댓글에 “쥬얼리 노래 타고 들어온 사람?”, “쥬얼리가 원곡보다 낫네”라는 외국인들의 댓글이 넘쳐난다는 것.
시대를 앞서간 난해한 콘셉트
에프엑스 'Hot Summer'(2011)
원곡: 몬로즈 'Hot Summer'(2007)
2011년에 발매한 그룹 에프엑스의 대표곡 ‘Hot Summer’는 한 단어를 계속 반복해 리듬감을 살린 후크송의 정석이다. 한 번 들으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아 그해 수능 금지곡으로 불렸다.
원곡은 2007년 발매한 독일 댄스 그룹 몬로즈의 ‘Hot Summer’. 이 곡은 원곡으로 선정적이고 섹시한 가사와 안무로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이었던 에프엑스 멤버들이 소화하기엔 너무 버거운 내용이었기에 여름을 대표하는 깜찍한 가사로 바꾼 것. 하지만 뛰어난 멜로디와 달리 도무지 맥락을 가늠할 수 없는 난해한 가사는 팬들조차 외면하게 만들었다. 다만 에프엑스가 같은 콘셉트로 후속 앨범을 발매했고, 시간이 지난 후 난해한 가사가 에프엑스 특유의 감성으로 자리 잡아 그들만 할 수 있는 음악 장르가 되었다.
“땀 흘리는 외국인은 길을 알려주자
너무 더우면 까만 긴 옷 입자”
- 에프엑스 ‘Hot Summer’
살아 있는 이수만의 촉
에스파 'Next Level'
원곡: 애스턴 와일드 'Next Level'(2019)
4세대 아이돌의 시작으로 불리는 걸그룹 에스파는 요즘 가장 핫한 뮤지션이다. 이들이 아이돌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소속사 대표 이수만의 촉 덕분. 그는 영화 <분노의 질주> OST인 애스턴 와일드의 ‘Next Level’(2019)을 듣고 바로 곡을 구매해 리메이크했다. 1952년생, 우리 나이로 70세임에도 10대·20대가 빠져들 만한 곡을 오직 감각으로 찾아낸 그의 촉이 놀라울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