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인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1642~1727, 영국,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
1파운드 지폐
뉴턴에서부터 시작된 인류 과학사
뉴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공헌을 많이 한 학자 중 한 명이다. 뉴턴의 위대함은 이전의 수많은 학설이 그 덕분에 하나의 점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후대의 수많은 과학자가 뉴턴을 출발점으로 인류 과학사를 펼칠 수 있었다. 실제로 뉴턴은 이전 시기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천문학에서 행성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따라 공전한다는 케플러법칙이 옳다는 사실을 만유인력의 개념으로 증명해냈고, 역학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제시한 새로운 운동 개념을 가속도와 관성을 통해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단순히 과학 분야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과학의 중요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일상에 가장 크게 공헌한 천재 물리학자
우리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물리학자로 아인슈타인 이전에 뉴턴이 있었다. 그가 사망한 지 3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실생활과 관련한 계산은 대부분 뉴턴역학에 근거한다. 심지어 오늘날 인공위성을 설계할 때도 뉴턴역학을 활용할 정도로 그의 이론은 빈틈이 없다. 이런 이유로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을 대상으로 한 ‘뉴턴과 아인슈타인 중 인류에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을 묻는 조사에서 아인슈타인을 앞섰다.
Episode
뉴턴이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 일화는 후대 사람들이 부풀린 것이다. 사실은 뉴턴이 중력, 즉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사과를 언급했을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
윈스턴 처칠 Sir Winston Churchill
1874~1965, 영국, 정치가·저술가
5파운드 지폐
끝까지 나치와 싸우다
연합군을 앞세워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처칠이다. 미국과 구소련이 참전하기 전,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던 상황에서도 처칠은 끝까지 나치와 싸울 것을 독려했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 이후, 구소련은 히틀러가 본토를 침공(1941년 6월)한 이후에야 참전했으니, 사실상 처칠의 영국이 2년간 나치를 막아낸 셈이다.
불굴의 의지와 용기
처칠은 제2차 보어전쟁(1899~1902년) 때 종군기자로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혔으나 480km를 걸어서 탈출했다는 무용담으로 영국 국민을 환호하게 했다. 이런 용기야말로 처칠이 히틀러의 나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였다. 모두가 제2차 세계대전이 나치 독일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직 처칠만이 끝까지 싸울 것을 독려했다.
Episode
처칠은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심지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6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19세기 이후 유럽 위인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해 영국뿐 아니라 세계적 스타임을 입증했다.
노련한 보건 행정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1820~1910, 영국, 보건 행정가
10파운드 지폐
현대적 군사 보건 체제 기반 마련
‘백의의 천사’로 알려진 나이팅게일은 성격 좋고 착하기만 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는 공중보건과 군사행정을 연구해 온 ‘행정 전문가’로서 소신과 주관이 뚜렷하고, 완고함과 강한 추진력까지 겸비한 ‘프로페셔널’이었다.
당시 영국 귀족 정치가들은 전쟁터에 나간 사병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고, 군대 보건위생을 개선할 의지도 없었다. 그런 정치가들과 대립하며 피 터지게 싸운 사람이 바로 나이팅게일이다. 전장에 의약품 보급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가 따지는 등 사실상 간호사로서 병상을 돌 여유는 그리 많지 않았다.
창조적 개혁 정치인
나이팅게일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오늘날까지 군사 보건 체제의 기반이 된 ‘현대적 야전 병원’ 행정 체계를 혁신적으로 개혁한 일이다. 그러나 전쟁이 도래한 시기에 영웅은 필요했기에 미디어는 그녀를 ‘램프를 든 백의의 천사’로 묘사하며 추앙했다. 나이팅게일은 그런 지지세를 공중 및 군사 보건위생체제 확립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권위, 재능, 업적, 인맥, 여론과 왕실의 지지 등 정치가로서 모든 역량을 갖출 수 있었던 만큼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영국의 군사 보건행정을 확실하게 개혁할 수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32~1799, 미국, 초대 대통령
1달러 지폐
권력을 내려놓은 큰 그릇
워싱턴은 미국독립전쟁과 대통령직 수행 과정에서 리더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권력을 내려놓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독립을 쟁취했을 때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대통령을‘선출된 왕’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위해 스스로 권위를 버렸다. 그는 의회를 존중했고, 새로운 헌법에 충실했다. 대통령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해도 헌법과 법제도 아래에 있게 됐으며, 결코 독재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전통을 세운 것이다. 그는 권력을 양보함으로써 명예를 얻었다.
탁월한 군사 지도자
미국독립전쟁(1775년)이 발발하자 미국 대륙의회는 영국군 장교 출신으로 다수의 야전 경험이 있던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당시 미군은 13개 주가 임시로 연합해 편성한 비정규군이었다. 워싱턴은 오합지졸인 미군을 이끌고 과감한 전술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2년간 버티기에 성공한다. 이후 의외로 선전하는 미군의 모습을 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미국 독립을 지원하면서 전황은 뒤집혔고, 1783년 미국은 마침내 독립을 이뤄냈다.
현대사회 유아 교육의 바이블
마리아 몬테소리 Maria Montessori
1870~1952, 이탈리아, 교육자·정신과 의사
1000리라 지폐
인간 발달 모델을 제시하다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이자 교육자였던 마리아 몬테소리는 세계 최초로 감각 교구를 개발했고, 어린이집 제도를 도입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3회나 지명됐다. 몬테소리는 인격 형성의 중요 시기(3~6세)에 자주성, 협조성, 사회성을 길러 창조성을 발휘해 가면서 긍정적 사고를 갖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위주의적 환경에서 영재가 되길 강요받는 기존 교육 시스템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교육 철학은 교육학계뿐 아니라 심리학, 정신의학계에까지 파급력이 미쳤고, 오늘날까지 유아 교육의 바이블로 삼을 만큼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대리석 조각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
1598~1680, 이탈리아, 조각가·건축가
5만 리라 지폐
창조에 대한 끝없는 열정
베르니니는 조각, 건축, 회화 등 다방면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작품을 남긴 천재로 평가된다. 그가 최고의 예술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남들이 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변화를 주도하고, 새로움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 덕분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폴론과 다프네’라는 조각은 대리석 예술을 최고 경지까지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다. 요정 다프네가 쫓아오는 아폴론을 피해 달아나다가 나무로 변하는 ‘순간’을 표현했는데, 다프네의 손끝에 변해버린 나뭇잎과 바람에 날리는 아폴론의 옷자락이 정으로 때려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얇고 하늘거린다.
근대 수학의 근간을 세운 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Carl Friedrich Gauss
1777~1855, 독일,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10마르크 지폐
근대 수학·물리학·천문학 리더
독일의 위대한 수학자. 대수학·해석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며 근대 수학의 체계를 확립했다. 아르키메데스, 아이작 뉴턴과 함께 세계 3대 수학자로 꼽힌다. 가우스 함수·적분·정수·법칙·정리 등 그의 이름이 붙은 수학 개념도 여럿이다. 수학 천재였던 가우스는 대학 시절 난제였던 정17각형 작도법을 발표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수학뿐 아니라 독일 물리학과 천문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중 185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민족성을 지켜낸 언어학자
그림 형제 Jacob Grimm, Wilhelm Grimm
야코프 그림 1785~1863, 독일, 언어학자·문헌학자
빌헬름 그림 1786~1859, 독일, 언어학자·문헌학자
1000마르크 지폐
구전을 동화로 옮긴 문화 장인
그림 형제란 형 야코프 그림과 동생 빌헬름 그림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독일 민담 수집, 독일어 사전 편찬 등을 통해 자국의 민족성을 지키고자 노력한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였다. 1806년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략하자 민족성이 약해질 것을 우려한 그림 형제는 구전되는 이야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푼첼>, <헨젤과 그레텔>, <개구리 왕자> 등이 담긴 이야기책 《그림 동화》다. 또 열정적인 언어학자였던 이들은 1854년 방대한 분량의 독일어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독일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낸 정신적 지주다.
노벨상 2회 수상한 퀴리 부인
마리 퀴리 Marie Curie
1867~1934, 프랑스, 물리학자·화학자
500프랑 지폐
방사능 물질 발견으로 암 치료 기반 마련
500프랑 지폐 속 인물 중 앞에 있는 사람은 ‘퀴리 부인’으로 불리는 과학자 마리 퀴리다. 그녀는 물리학자였던 남편 피에르 퀴리(500프랑 뒤에 있는 인물)와 함께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해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들 부부의 연구로 인류는 효과적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남편 피에르의 사망 후 마리는 혼자서 연구에 몰입해 1907년 라듐 원자량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해냈고 금속 라듐을 분리하는 데도 성공, 191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인체에 유해한 라듐의 오랜 연구로 방사능에 많이 노출된 나머지 결국 백혈병과 악성 빈혈에 시달리다 사망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인류애 실천
마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주저 없이 노벨상 메달을 녹여 전쟁 기금 마련에 보태고, 상금도 기부하는 등 인류애를 실천해 높이 평가받고 있다. 라듐 분리 기술에 대한 특허권도 포기해 전 세계 사람에게 혜택을 주었으면서 정작 자신은 빈곤한 삶을 살았다.
방사능 노출로 건강이 악화했음에도 마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을 누비며 직접 만든 ‘이동식 X레이 진단 차량’을 이용해 100만 명 이상의 군인을 보살폈다. 훗날 프랑스 정부는 마리에게 훈장을 수여하려 했으나 그는 이마저도 사양했다. 애초에 과학자가 자신의 성과를 통해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을 만든 주인공
귀스타브 에펠 Gustave Eiffel
1832~1923, 프랑스, 건축가·기업가
200프랑 지폐
철근 건축물의 미래를 확신한 혁신가
귀스타브 에펠은 신중한 성격이지만 일단 확신이 들면 무섭게 전진했다. 에펠은 일찍부터 고강도 철근을 교량이나 건물 건축에 이용했다. 당시 이런 시도는 모험적이고도 희귀한 발상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에펠은 철근이 갖는 매력과 장점을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었다. ‘에펠탑은 공장의 굴뚝’이라는 건축계의 비판에도 철근 건축물의 미래에 대한 확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결과 설립 2년 만에 에펠탑은 파리의 얼굴로 정착했다. 수많은 비판 속에서도 에펠의 과감한 결단과 미래에 대한 확신,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새로운 차원의 건축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예술 경영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 주역
에펠은 기업가이자 건축가다. 에펠탑 개장으로 관광객 유치와 각종 비즈니스를 통해 불과 6개월 만에 투자금 전부를 회수하고 흑자 전환을 할 만큼 에펠은 당대 최고 기업가였다. 동시에 고강도 철근을 포함한 첨단 재료를 과학적 기법을 활용해 에펠탑을 만든 성공한 건축가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 만큼 에펠은 ‘건축+예술+경영’이라는 세기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창조한 인물로 평가된다.
Episode
에펠탑은 진화하는 건축물?
1889년 건립된 에펠탑은 원래 20년 뒤 철거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에펠탑의 기능이 통신용, 항공용, 측정용, 관광용, 기후 측정 등 새로운 분야로 확장되면서 존속하게 됐다. 에펠이 당초 건축을 시작했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목적과 기능이 나타나며 벌어진 일로, 건축물이 마치 생물처럼 성장하는 성공 사례를 보여준다.
튀르크인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 튀르키예, 정치인
튀르키예 모든 지폐
발 빠른 개혁으로 나라 발전에 앞장서다
튀르키예 국민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 수립 당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정치, 법률, 군사, 사회, 문화,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개혁 정책을 펼치며 나라 발전을 앞당겼다. 정교분리, 문맹퇴치를 위한 라틴 문자 도입, 히잡 착용 금지, 일부다처제 폐지, 달력 대신 그레고리력 도입 등이 그 예다.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국민 영웅
튀르키예 전신인 오스만제국의 육군 장교였던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참전 영웅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후손을 보지 않은 일은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가 죽은 후 세습 정치, 독재 정치 등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한 것. 이처럼 아타튀르크는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나라의 근간을 세우고, 그 앞날까지 진심으로 걱정한 지도자였다.
아타튀르크라는 성은 ‘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이는 1934년 튀르키예 국민의회에서 헌정한 것이다. 1951년 아타튀르크 모독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됐을 정도로 아타튀르크는 사후에도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Episode
오늘날에도 튀르키예 거리 곳곳에서 아타튀르크의 사진과 어록을 만날 수 있다. 그중 제일은 역시 지폐.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의 모든 지폐 앞면에 등장한다. 액면가가 낮아질수록 아타튀르크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 중 하나.
독재자도 지폐 모델?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으니 못 할 짓이 없다. 현존하는 인물이 지폐 모델로 등장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독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일 좋은 것, 제일 큰 것
김일성
1912~1994, 북한
최고액권
북한 최고액권의 모델
1979년 3차 지폐개혁 때부터 최고액권에 김일성 초상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최고액권 지폐 앞면에는 김일성 초상이 들어간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그러다가 2014년에 최고액권(5000원권) 디자인이 바뀌어 김일성 초상 대신 그의 생가가 들어가게 됐다. 이를 두고 김정은의 김일성 흔적 지우기라는 추측과 1만원권 발행을 위한 준비라는 설이 엇갈렸다.
정권 분괴와 함께 사라진 지폐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1937~2006, 이라크
이라크 모든 지폐
정권 분괴와 함께 사라진 지폐
후세인은 1993년부터 모든 이라크화에 자신의 초상화를 넣었다. 이 지폐들은 일명 ‘사담 디나르화’라고 불렀다.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후, 신권 지폐가 발행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세인은 부통령 시절(1968~1979년)에는 이라크의 경제발전을 진두지휘한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1979년부터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최소 50만 명 이상을 학살하는 등 이라크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다.
미치광이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 Muammar al-Qaddafi
1942~2011, 리비아
50디나르 지폐
42년 독재, 지폐 모델은 고작 5년
카다피는 2008년부터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50디나르 지폐를 발행했다. 42년간 집권한 독재자치고는 뒤늦게(?) 지폐에 손을 댄 셈. 이 화폐는 2013년까지 유통됐는데, 2011년 시민혁명으로 카다피가 처형당하고 난 후 ‘더 이상 카다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국민 여론을 수렴해 2013년부터 발행이 중지됐다. 집권 초기에는 리비아의 경제발전을 이끈 공로도 있었지만, 말년에는 “(시민혁명에 참가한)시위대는 ‘개’다”, “전시에는 모든 폭력 행위가 합법이다” 같은 망언을 쏟아내는 등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대한민국 지폐 속 인물
우리나라 지폐 속 인물은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겼을까?
조선의 영원한 스승
퇴계 이황
1501~1570, 한국, 유학자
1000원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큰 어른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황은 학문과 인품을 겸비하며 동 시기 여러 지식인에게 존경받았다. 조선 성리학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성리학의 대가다. 1534년 21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약 20년간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도 지조와 절개를 지킨 이황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명망 높은 선비였다. 59세이던 1560년, 이황은 경북 안동에 도산서원을 짓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수많은 개혁안을 제시한 충신
율곡 이이
1536~1584, 한국, 유학자
5000원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직언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손꼽힌다. 관직 생활 중에는 끊임없는 상소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한 충신이었다. 조세, 관료제, 군정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또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도 게을리하지 않아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정치 철학서인 <성학집요>는 조선 후기 임금의 필독서가 됐다.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대왕
1397~1450, 한국, 조선 4대 국왕
1만원
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리더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물론 과학기술, 국방, 문화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농업에 도움을 주는 측우기, 앙부일구, 물시계 등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또 왜구를 소탕하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탄탄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압록강, 두만강까지 국경을 넓히기도 했다.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이끈 왕으로,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모양처
신사임당
1504~1551, 한국, 문인
5만원
시대의 어머니상
율곡 이이의 어머니. 조선을 대표하는 현모양처로 알려진 신사임당은 깊은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자녀 교육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 결과 셋째 아들인 율곡 이이는 시대의 성현으로, 장녀 매창과 막내아들 이우는 걸출한 화가로 키워냈다. 시문과 서화에 능한 신사임당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Episode
2009년 신사임당이 그려진 5만원권이 발행되면서 율곡 이이와 더불어 모자(母子)가 지폐 인물로 등극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일. 한국 지폐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모델이자 현재 유통되는 원화 중 유일한 여성 모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