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상업의 경계에서 혁신을 즐긴 괴짜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1931년에 발표한 작품 ‘기억의 지속’을 빼놓을 수 없다. 해변을 배경으로 3개의 시계가 각기 다른 모양으로 녹아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그림으로 달리는 초현실주의 대가 반열에 오른다. 그는 회화뿐 아니라 영화, 사진, 연극, 패션 같은 상업 분야에서도 맹활약했다. 영화감독인 월트 디즈니, 알프레드 히치콕과 협업한 것은 물론 1969년 달리가 제작한 사탕 브랜드 ‘츄파춥스’ 로고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한 달리는 다방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천재다.
1904년 스페인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달리는 슬픈 운명을 타고났다. 달리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첫째 아들이 달리로 환생했다고 믿었고, 형의 이름을 달리에게 그대로 물려줬다. 자신에게서 죽은 아들의 흔적을 찾는 부모의 눈빛은 어린 달리에게 상처를 줬다. 자신은 자신일 뿐 형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던 달리는 평생 동안 기행과 일탈을 일삼았다. 발작적으로 소리 지르며 웃기, 망토와 왕관 쓰고 왕 행세하기, 염소 똥으로 만든 향수 뿌리기 같은 기상천외한 행동은 그에게 괴짜, 광대, 쇼맨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의 천재성은 점점 더 빛을 발했다.
비극적 현실을 지우는 상상력, 초현실주의
남다른 숙명을 짊어진 달리는 예민한 예술가로 성장한다. 이런 불안한 심리 상태는 그의 작품에도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달리가 인상파, 점묘파, 큐비즘 등 여러 미술 사조를 거쳐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탐구하는 초현실주의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1939년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퍼졌다. 이성이 아닌 상상력이야말로 참혹한 현실을 이겨낼 원동력이라고 본 것이다. 1928년 프랑스 파리로 터전을 옮긴 달리 역시 형의 그림자를 떨쳐내줄 무의식의 세계에 심취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수학과 과학, 종교를 탐구한 다양한 기법
달리의 작품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 차례 변화를 겪는다. 온 인류가 핵무기의 파괴력에 무력함을 느낀 것에 반해 달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놀라고 만다. 내면에 특히 집중하는 초현실주의 시기를 넘어 과학의 진보와 종교의 신비성에도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탄생한 달리의 여러 작품에서 원자물리학이나 DNA, 종교와의 연결성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달리는 수학과 과학을 깊이 탐구해 기존의 착시기법을 넘어서고자 노력한다. 말년에는 벨라스케스부터 미켈란젤로까지 위대한 거장의 작품을 재해석하거나 응용하면서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타고난 천재 화가 달리는 새로운 도전을 게을리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넓혀갔다.
달리가 사랑한 유일한 여인, 갈라
달리는 스물다섯 살에 갈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열 살 연상인 갈라는 당시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와 결혼한 상태였다. 몇 년 뒤 엘뤼아르와 이혼한 갈라는 달리와 부부의 연을 맺고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한다. 달리의 작품 속에는 다양한 모습의 갈라가 등장한다. 갈라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은 달리는 1930년대 초부터 자신의 그림에 ‘갈라와 살바도르 달리’라고 서명하기 시작했다. 갈라의 존재가 그만큼 달리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달리는 “진정한 걸작을 만들려면 내 아내와 결혼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82년 갈라가 숨을 거둔 후 칩거하던 달리는 1989년 세상을 떠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대가, 살바도르 달리가 작업한 유화, 영상, 사진, 설치미술 등 140여 점을 한자리에서 만난다. 달리의 유년 시절부터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시기별 작품 특성을조명하고, 영향을 주고받은 인물과 개인적인 순간도 함께 소개한다.
기간 3월 20일까지(휴관일 없음)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전시관
문의 www.gncmedia.com
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천재들은 죽지 않는다.
사후 28년 만에 관 뚜껑이 열린 사연
달리 사후 28년 만인 2017년 기가 막힌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이 달리의 혼외 자식이라 주장하는 필라 아벨 마르티네스가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스페인 법원이 달리의 DNA를 채취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달리와 갈라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탓에 달리의 유산은 스페인 정부에서 관리해왔다. 마르티네스가 친자인 경우 수억 달러 상당의 유산 소유권에 변화가 생긴다. 이 때문에 달리의 관 뚜껑이 강제로 열리고 말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달리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이 여전히 10시 10분 방향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달리를 사후 DNA 검사까지 받게 한 마르티네스는 친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