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머니가 흘러들어간 축구계
2022년 12월 31일, 세계적인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알나사르’로 이적했다. 알나사르는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리그 ‘사우디 프로페셔널리그(SPL)’에 속한 팀이다. 호날두는 알나사르로 이적하며 “사우디 리그가 세계 5위 안에 드는 리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적인 선수들이 사우디 리그로 이적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중은 호날두의 이런 발언을 단순히 ‘자신이 사우디로 이적했으니 곧 세계적인 리그가 될 것’이라는 자신을 높이는 발언 정도로 받아들였다.
상황이 달라졌다. 사우디 축구 리그가 천문학적 금액을 투자하며 세계적인 축구선수를 끌어 모으고 있다. 카림 벤제마, 네이마르, 응골로 캉테 등 한때 세계 정상으로 평가되던 선수들이 사우디로 항했다. 그뿐 아니라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 후벵 네베스 등 주요 리그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선수까지 사우디 리그행을 택했다. 사우디가 이번 시즌(2023-2024 시즌) 선수 이적료로 사용한 금액은 무려 6억 유로, 한화 약 8750억원이다. 영국 일간 <더 미러>가 지난 8월 18일 공개한 축구선수 세계 최고 연봉 리스트에 따르면, 톱10 중 올해 사우디 리그로 이적한 선수가 8명이나 되었다.
천문학적 금액이 축구계에 흘러 들어가며 구단과 선수들은 사우디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하며 축구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한 지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사우디는 축구계의 유의미한 균열을 일으켰다.
천문학적 돈 앞에 장사 없다
선수들이 사우디를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돈’이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10월 14일 발표한 최근 1년간 축구선수 수입 순위에 따르면, 호날두는 1년 동안 2억6000만 달러, 한화로 약 3523억원을 벌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알나사르에 입단하며 받은 계약금과 나이키 등의 후원사에서 받은 금액을 합친 것이다. 이를 환산하면 호날두는 1년 동안 하루에 9억6000만원을 번 셈이다.
올여름 이적 시장에 사우디 리그 소속 알힐랄로 이적한 네이마르도 마찬가지다. 네이마르의 이적료는 한화 기준 약 1315억원에 달하며, 연봉은 최대 2190억원으로 추정된다. 네이마르는 앞으로 사우디에 머물면서 하루에 6억원의 돈을 벌 예정이다.
호날두와 벤제마, 네이마르 등 이름값 높은 선수들은 연봉이 1억~2억 달러 이상 된다. 직전 소속팀에서 받던 연봉의 5배가량이다. 아무리 선수가 소속팀에 애정을 갖고 유럽 리그에서 비전을 찾는다 해도, 막상 눈앞에 제시된 천문학적인 계약 금액을 보면 팀과 선수 모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사우디는 소득세가 없다. 계약서에 적힌 연봉이 그대로 통장에 들어온다. 유럽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은 연봉의 절반가량을 세금으로 지불한다. 손흥민과 황희찬이 활동하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소득세 최고 세율은 45%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몸값이 수억 원에 달하기 때문에 대부분 최고 세율이 적용된다. 대부분의 유럽 리그 선수도 비슷한 수준의 세금을 낸다.
반면, 사우디 리그는 다르다. 사우디에서는 선수가 해외 거주자로 분류된다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몸값이 100억원인 선수가 잉글랜드 리그에서 활동하면 45억원을 세금으로 낸 후 나머지 금액을 받지만, 사우디 리그에서 활동하면 세금 없이 100억 원을 그대로 받는다. 이는 고액 연봉을 받는 스타 선수에게 매력적인 옵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우디 국가 차원의 사업
사우디가 축구 산업에 뛰어든 건 왕세자 빈 살만의 의지다. 그가 계획한 ‘국가개발 프로젝트 비전 2030’의 일환으로 축구 투자가 이뤄지는 것이다. 빈 살만은 스포츠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를 현대화해 기존의 ‘사막 왕국’ 이미지를 벗어나겠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사우디는 축구뿐 아니라 골프, F1, 복싱, 프로레슬링 등 여러 글로벌 스포츠에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는 중이다.
빈 살만의 주도 아래 사우디 정부는 프로축구 리그를 유명 스타 선수 영입으로 리그 투자와 팬 유입을 활성화하겠다고 밝히며, 방문객을 연 1억 명, 수익 목표를 4배 이상으로 잡았다. 사우디 GDP에서 관광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을 10%까지 늘릴 계획이다.
빈 살만 왕사제는 2030년까지 25개의 국제 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인판티노 FIFA 회장과 접촉하는 모습을 보이며 월드컵 개최권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국가 중심 투자로 중국과 다른 모습
사우디의 천문학적 투자 행보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많다. 과거 중국의 투자 행보가 연상된다는 의견이다. 중국도 자국의 ‘슈퍼리그(CLS)’에 막대한 금액을 쏟아부은 적이 있다. 중국은 당시 세계적인 선수로 촉망받던 선수 오스카와 마루앙 펠라이니를 거액의 이적료를 주고 영입하며 자국 축구 리그의 부흥을 꿈꿨다. 다만,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스타 선수들만 연이어 영입하다 유의미한 결실을 얻지 못한 채 리그의 거품이 가라앉았다.
사우디 투자는 과거 중국의 행보와는 차이가 있다. 중국은 기업 중심의 투자였던 것에 비해, 사우디는 국가가 주도하는 국부펀드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사우디 국부펀드는 7000억 달러, 한화 935조원이 넘는 자금을 운용한다. 이를 기반으로 축구를 비롯한 다양한 스포츠 산업에 투자하는 중이다. 중국은 국가 인식 개선을 최우선 목표로 하며 사업 전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우디는 막대한 오일머니로 스포츠 산업 자체를 사들여 큰 수익을 기대하는 전략 투자를 추진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사우디의 국가 주도 투자는 세간의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안정적 투자라고 보는 시선이 있는 반면, 구단이 중심이 된 투자가 아닌 만큼 언제든 방향이 틀어지거나 거품이 꺼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의견도 존재한다.
또 ‘스포츠 워싱’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사우디의 부정적 이미지를 축구 등 인기 스포츠로 바꾸려는 의도로 투자를 감행하는 것인데, 이는 ‘오일머니’를 앞세워 인권 탄압과 인권 유린 관련 뉴스에서 눈길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평이다.
사우디가 보여주는 비전
장기적 관점의 투자도 중국의 행보와 다른 점이다. 당장의 슈퍼스타만 영입하는 것이 아니라 리그 시스템 구축을 위한 투자를 진행하는 것이다. 최근 이적한 선수 후벵 네베스와 알랑 생막시맹은 둘 다 26세로, 잉글랜드 리그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며 주요 팀들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이들을 영입하며 장기적으로 리그를 이끌 젊고 유망한 선수도 영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한편, 전설적인 선수이자 최근 촉망받는 감독인 스티븐 제라드를 알에티파크 감독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잉글랜드 리그 심판마저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사우디 리그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며 업계에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주요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 입장에선 사우디 리그가 단순히 돈만 많이 주는 것이 아닌, 세계적인 선수들과 함께 뛸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 중 하나가 되는 셈이다.
사우디의 투자는 글로벌 스포츠 산업의 관점에선 새로운 기회이자 동력이 될 수 있다. 다만, 스포츠 워싱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종교 문제, 인권 문제 등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사우디가 꿈꾸는 축구 리그가 중국의 슈퍼 리그 정도로 끝날지, 진정한 ‘슈퍼 리그’의 탄생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pisode. '대한민국 주장은 사우디 리그에 가지 않는다'
올여름 이적 시장에선 손흥민의 사우디행 이적설이 들려왔다. 미국 스포츠 매체 ESPN은 6월 20일 손흥민이 사우디 알이티하드 구단으로부터 4년간 매 시즌 3000만 유로, 한화 약 420억원씩 받는 계약을 제안받았다고 보도했다. 이에 손흥민은 과거 기성용이 중국 이적설에 대해 “한국 대표팀 주장은 중국에 가지 않는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이적설을 부인했다. '대한민국 주장은 사우디 리그에 가지 않는다'는 의미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