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안창홍의 예술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하다.
그가 그리는 죽음은 곧 삶을 향한 몸부림이다.
195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자신만의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1979년 ‘인간 이후’ 연작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980년대에는 ‘위험한 놀이’ 연작 등 사회·정치적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화제를 모았다. 이후 ‘가족사진’, ‘베를린’ 연작 등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깊이 있게 다루며 한국 현대미술계의 대표 작가로명성을 공고히 했다.
부서진 장난감, 해부된 인형, 나체인 무언가와 박제된 무언가. 안창홍의 작업실에 놓인 것들이다. 양평 시내와 거리를 둔 자연 속 어딘가, 푸릇한 숲길과 정갈한 잔디 정원을 지나 허술한 철문을 열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풍경이다. 아름다운 별장 안에 이렇듯 끔찍한 것들이 자리하고 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이 모습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민낯을 그리는 안창홍의 예술 세계를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안창홍의 예술은 선뜻 달갑지 않다. 불편하고 낯부끄럽다. 사진과 오브제, 회화에 담긴 그의 시선 속에는 역사적 고통과 현실의 모순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올바른 것에 대한, 삶과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비롯된다. 그의 예술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미술사학자 김정락 교수가 그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안창홍이 죽음을 그리는 이유
김정락 교수(이하 김) 당신의 작품에선 하나의 맥락이 보인다. 바로 ‘죽음’이다. 어떤 동기나 목적이 있을 것 같은데?
안창홍 작가(이하 안) 어릴 때부터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감각이 밝은 쪽보다는 어두운 쪽에 이끌렸다. 이런 관심이 화가가 된 이후 사회의 이런저런 사건과 뒤엉키면서 삶과 죽음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 화가 안창홍이 그리는 ‘죽음’은 그 표현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유령 패션’이나 ‘마스크’, 박제 작품 등이 그 예다. 죽음의 소재를 건들면서도 그것을 날것으로 표현한다.
안 내가 작업한 ‘유령 패션’에도 죽음의 향기가 스며 있었을 수 있다. 사회현상과 문명사회, 자본주의의 그늘은 허깨비같다고 늘 생각했다. 시체들이 움직이는 듯한 도시의 향락 문화 같다. 인간의 욕망과 쾌락이 생명을 훼손하는 모습이 마치 유령의 거리를 보는 듯했다. 육체와 혼백은 사라지고 물질만 남은 상태 말이다. 단순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사회현상을 바라본 모습이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 대량생산이 만들어낸 부조리 같은 것. 그런 것이 뒤엉켜 ‘유령 패션’이 됐다.
김 미술시장은 자본주의 토대 위에 만들어진 마켓이다. 미술품 거래나 유통 방식 모두 그 구조에 속한다. 그런데 당신은 시장에 적응하는 동시에 비평적 거리감을 둔다. 한편으론 그 모습이 양가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인다.
안 애초에 진실이란 것이 양가적이고 모순적이다. 진실은 달콤하지 않다. 피 냄새 나고, 상처가 곪아 터져야 새살이 돋는다. 진실은 불편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보기에 거칠고, 인상을 찡그리게 하더라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나의 메시지가 여과 없이 전달되는 형식을 선택했다.
미술사학자
'미술의 불복종' 저자
김 요즘 아름다움이란 감각이 너무나 매끈하고, 부드럽고, 달달한 데만 한정되는 것 같다. 미술시장이나 아트페어에 나오는 작품을 보면 마치 ‘꿈동산’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런데 안창홍은 그런 것을 일그러뜨리는 사람이다. 혹여 돈을 벌기 위해 꽃을 그린다고 해도, 그조차 심상치 않다. 그저 예쁘지 않고, 예쁜 꽃일지라도 피비린내가 나는 듯하다.
안 나는 원초적 근원을 그린다. 자연은 인간의 삶 못지않게 치열하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다. 처음 이곳에 와 꽃씨를 한 자루 뿌렸는데, 작은 꽃부터 큰 꽃까지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싸우면서 결국 큰 꽃만 살아남았다.
자연에도 적자생존이 존재한다. 큰 나무는 작은 나무 옆으로 가지를 뻗어 작은 나무의 성장을 막는다. 그저 예쁜 꽃보다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치열하게 생존하는 과정을 작품에 담고 싶다. 여기에 나의 현실 사회 의식이 개입하니 꽃이 예쁠 수 있겠나.
몇 년 전 ‘맨드라미’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일이다. 당시 몇몇 사람은 ‘안창홍도 꽃을 그리네. 먹고살려니 별수 없네’라며 비아냥댔다. 전시를 준비하는 중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꽃 같은 아이들이 물속에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너무 고통스러웠다. 작품을 그리면서도 고통이 맨드라미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피가 흘러내리듯,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꽃이 그려졌다. 나는 그 맨드라미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흔히 예쁜 것을 아름답다고 착각한다.
아름다움 속에 예쁨이 포함될 수는 있지만,
예쁜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 속에는 숭고함이 있고,
삶의 흔적과 땀 냄새가 스며 있다.
나는 그것이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처절한 아름다움을 작품으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안창홍의 미술 사조
김 독일 ‘카셀 도큐멘타’ 등의 전시를 보면, 그곳 작품은 하나같이 정치나 사회, 경제까지 작가가 살아가는 현실 사회의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한국 미술은 그런 이야기가 강하지도, 뚜렷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당신 혼자 그런 이야기를 해왔다.
안 우리나라 현대미술은 대부분 서구 미술의 흉내다. 독창적이고 자기 언어를 가진 미술은 오히려 열외로 취급한다. 미술이 모방에서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극복해 자기 언어를 만들어낸 작가도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런 그림보다 서구 사조를 흉내 낸 것을 수용하고 통용한다.
평론계도 마찬가지다. 작가 본인의 언어로 조형체계를 구축한 작가는 해석하기 어렵다 보니 아예 배제해 버린다. 대신 자신들이 공부한 익숙한 사조와 연결되는 그림, 흉내 낸 그림을 더 선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작품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으니, 컬렉터들도 새로운 언어로 사회현상을 담은 그림보다 서구 사조를 흉내 낸 그림을 선호할 수밖에.
그러다 보니 작가들이 그런 방식으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종속된 사대주의 개념은 미술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본다. 나는 그와 관계없이 내 작업을 해왔다.
김 외톨이인 셈이다.(웃음) 그 독창성을 고집하기 위해 일부러 양평으로 들어온 건가?
안 맞다. 부산 화실 문을 닫고, 도시 삶을 그리고자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생활과 삶의 방식이 크게 달랐고, 도심에서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는 걸 느꼈다. 작업에만 집중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조형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양평으로 왔다. 벌써 35년이 넘은 일이다. 이곳에서 만족할 만큼 나만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김 현대 작가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아트페어형 작가로, 돈을 벌고 상업성을 추구하며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비싼 작가로 성장하는 것을 추구하거나 누리는 작가다. 다른 하나는 비엔날레형 작가로, 상업 화랑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독창적 작업을 하면서 외부의 지원을 받아 전시를 하는 작가다. 당신은 둘 중 어디에 속한다고 보나?
안 둘 다 아니다. 지원을 받는다는 건, 지원이 없으면 창작을 못 한다는 뜻이 된다. 지원 액수에 따라 규모를 정하는 것도 싫다. 아트페어형 작가는 더더욱 끔찍하다.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작가는 꾸준히 자기 세계를 조형화해야 한다. 형편이 되면 되는 대로, 형편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하면 된다. 무조건 비싼 캔버스와 물감이 필요한 건 아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재료를 쓰면 된다.
김 지금까지의 작업 중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담이 없었던 시리즈는 무엇이었나?
안 ‘새’라는 작품이 있다. 부산에 살던 시절, 미국문화원 건너편 새마을회관 위층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작업할 때였다. 옥상에 올라가면 부서진 합판, 양철 조각, 생선 박스로 쓰던 작은 나무 판자가 흩어져 있었다. 그걸 주워 모아 박스를 얼기설기 붙이고, 그 안에 생선을 넣어 팔던 것들을 재료로 새를 만들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만든 작품이다.
버려진 붓, 아이가 놀다 버린 장난감도 다 모아뒀다. 치과에서 임플란트 만들기 전에 쓰는 도구 같은 것도 주워 왔다. 그런 것을 부서진 합판에 붙여 오브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김 작품을 위해 많은 것을 수집한다. 수집품을 보면 참 계통 없이 종류가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이유가 무엇인가?
안 약간의 편집증적 성격 탓이다. 내가 모으는 것은 값진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일상 속 특이한 물건이다. 부서진 인형, 완제품이면서도 약간 뒤틀린 것. 값나가지 않지만 보기 힘든 것이다. 수집품은 대부분 작품과 연결된다. 사방에 던져놓거나 배치해 두면 생활 속에서 크든 작든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런 물건이 작품으로 바로 연결되기도 하고,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방에 이상한 물건이 흩어져 있다. 쉽게 말하면 ‘중구난방이 나의 질서’다.(웃음)
김 작품에 쓴 사진도 수집한 건가?
안 그렇다. 작은 사진을 수집해 재촬영하고 확대해 프린트했다. 예전에는 고물상에 가면 앨범이 쌓여 있었다. 앨범을 보면 한 가정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그 세월의 두께가 묵직하게 들어 있다. 무명인의 사진을 통해 그들의 역사를 엿본다. 그러면서 조형적으로 울림이 있는 것들을 뽑아 그림으로 옮긴다.
도쿄 화랑에서 초대전을 한 적이 있다.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 일본에 징용 가는 남편과 기념 촬영한 사진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다. 그 사진은 친구 집 앨범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아버지는 징용 전 모습, 어머니는 한복을 입은 사진이었다. 친구에게 사진을 빌려 그림을 그린 뒤 일본 전시에 걸었다. 물론 일본 관람객들은 매우 불편해했다.
그 작품이 프랑스 ‘카뉴 회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사진 한 장이 1차원 세계에서 3차원 세계로 옮겨지는 과정이었다. 사진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그림 위에 붓고, 뿌리고, 흔적을 남기며 역사의 고통을 옮겼다.
김 ‘베드 카우치’ 같은 연작도 같은 맥락인가?
안 그런 셈이다. 여자 누드 작품은 관음증을 유발하는 그림이 많다. 대부분 누드의 목적이 거기서 시작됐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었다. ‘이것이 누드다’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전철, 맥줏집 아르바이트생, 양복점 점원, 문신 가게를 하는 지인을 통해 모델을 섭외했다. 우리 집 아래서 농사짓는 시골 농부 아저씨도 있었다. 그들의 옷을 벗기기도 하고, 입은 채로 베드 카우치에 앉히기도 하고, 또 길에 세우기도 했다. 잘 가꾼 몸이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강한 몸, 삶과 맞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소시민의 몸을 그렸다. 그 작업을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했다.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 속에 진실이 숨어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진실은 불편한 것이고,
감추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 예술은 삶과 인간, 올바른 것에 대한
끝없는 프러포즈다.
그게 내 예술의 힘이다.
수치심과 불편함을 일으키는 작품
김 ‘예술이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 수 있나’, 이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수치스러운 걸 보는 건 가능하다. 반대로 그림을 보는 내가 수치스러울 수 있을까. 이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당신의 그림을 보면 내가 부끄럽다. 관념화된 아름다움이 아니고,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베드 카우치’가 좋은 예다. 카우치라는 한정된 제재 안에서 인간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림을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장치를 잘 활용하는 것 같다.
안 원래 베드 카우치는 침대 옆에 두고 옷을 걸치는 등 여러 용도로 쓰는 가구다. 그런데 물감투성이 작업실 바닥에 두고, 모델을 그 위에 누드로 눕게 했다. 그러면 몸을 욱여 맞출 수밖에 없다. 편하게 펼 수가 없다.
그 장치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보는 사람은 ‘이렇게 불편한데 물감투성이 화실 바닥의 베드 카우치에 왜 벌거벗고 앉아 있나, 서 있나’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전시 제목도 <불편한 진실>이었다.
